몽생미셸 가는 길 87화
[대문 사진] 쥬미에쥬 옛 수도원장 관사
내진 한가운데 홀로 서 있자 텅 빈 고요함을 떠도는 그레고리안 성가가 들리는 듯하다. 잠시 호흡을 고르고 샤를7세 통로라 불리는 곳으로 걸어간다. 둥근 천장을 한 통로는 14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노트르담 성당과 성 베드로 교회를 연결하고 있다.
이 통로를 가리켜 훗날 ‘샤를 7세’란 이름을 붙인 것은 샤를 7세가 봉헌한 돈으로 지었기 때문이다. 백년전쟁이 끝나가던 1449년 샤를 7세와 국왕의 애첩 아네스 소렐이 수도원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지은 것이다.
견고하게 지어진 성 베드로 성당은 9세기 바이킹들의 침입이 있기 전 들어선 건축물이다. 수도원 건물 가운데 제일 오래된 유적이기도 하다. 이 작은 교회는 오로지 수사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안뜰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다.
수도원 안뜰 또한 완전히 파괴되어 성 베드로 교회와 함께 묘한 대조를 이룬다. 안뜰 깊숙한 곳에는 원래 필사본을 제작하거나 수사본에 채색을 입히던 필사실(Scriptorium)이 있었다.
이곳에서 수사들은 방대한 수사본들을 제작하였고 이 시기가 수도원이 제일 번영을 구가하던 때였다. 따라서 수도원은 막대한 재원을 바탕으로 하여 교회 신축공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 성 베드로 성당 역시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이어지는 그 몇 세기동안 쥬미에쥬는 건축공사장을 방불케 했다.
성 베드로 교회너머로는 정원이 자리 잡았다. 수도원 안뜰과는 달리 정원은 거대한 공원을 연상시킬 만큼 너른 터에 조성되었다. 수도원 정원 한가운데에는 이중계단이 나있는 테라스가 설치되었는데, 너머로는 채마밭이 올라서있다.
오른편으로 18세기에 지어진 수사들이 빵을 굽던 건물이 있었지만, 대혁명 이후로 전소되고 말았다. ‘기도하면서 일하는 공동체’였던 수도원은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들의 후원이 끊기면서 자력갱생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백년전쟁 여파와 대혁명의 혼란이 이어지면서 수도원은 결국 폐허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베르사유 궁전을 완성한 건축가 아르두앵 망사르가 처음 설계한 프랑스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은 수도원장 관사 건물은 쥬미에쥬 수도원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세워졌다. 전쟁과 혁명의 불길을 피해 갈 수 없었던 수도원의 운명은 어떤 것이었을까? 수도원장 관사 건물은 대체 왜 이리 높은 곳에 수도원을 굽어보는 자리에 세워진 것일까?
15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국왕의 권위는 날로 높아만 갔다. 프랑스 역사상 베르사유 주인공 루이 14세 때에 이르면 국왕의 권위는 하늘을 찌를 듯 용솟음쳤다.
이미 이전에 필립 4세는 로마에 있는 교황을 폐위시키고 프랑스 성직자 가운데 새로이 교황을 임명했을 뿐만 아니라 교황청마저 아예 로마에서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겼다.
이 시기를 교황의 ‘아비뇽 유수’라 부른다. 저 ‘카노사의 굴욕’에 정반대 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필립 4세는 십자군원정에 참여했던 템플 기사단장이었던 자크 드 몰레를 산 채로 화형 시켰음은 물론, 국가 재정을 위해 수도원의 성유물에까지 손을 댔다.
앞으로 교황뿐만 아니라 수도원장은 성직자들 가운데에서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국왕이 평신도 가운데에서 한 명을 수도원장으로 임명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임명된 수도원장이 수도원의 재정을 맘대로 휘젓기까지 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상당수의 재원이 국왕에 헌납되는 사태로까지 악화되기까지 한 것이다.
이 평신도 출신의 수도원장은 교회참사회 기능을 마비시켰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오늘날의 패키지 관광지처럼 성지순례 코스로 개발하면서 순례를 떠나온 신자들에게 막대한 교회 봉헌금을 강요하고 또한 이 상당수를 국왕에게 아부하고자 갖다 바치는 타락과 부패의 절정으로 치달았다.
수도원장이 수사들의 숙소로부터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심지어는 쥬미에쥬 수도원에서 보듯, 언덕 위 수도원을 한눈에 굽어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기까지 한 이유는 국왕이 임명한 평신도 출신의 수도원장 권위가 어떠했음을 짐작케 해 주고도 남는다.
수도원이 본래 지향하던 목표와 기능을 잃어가던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물론 그에 저항하던 수도원 또한 많았지만, 생 모흐 수도회[1]가 건설되기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중세 수도원은 쇠락의 길을 걷다가 대혁명 이후로는 종적마저 감추게 되었다.
[1] 생 모흐 수도회(Congrégation de Saint-Maur) :1621년 가톨릭 반종교개혁의 일환으로 생 제르맹 데프레의 ‘어머니(성모)’ 수도원에서 창설된 베네딕도 수도회. 모리스트들(수도회원들)은 박학다식하고 특별히 역사고증에 탁월하였기에 평판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