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힘

몽생미셸 가는 길 113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그림]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


기나긴 시간 동안 가끔씩 세상을 휩쓴 온갖 질병들을 떠올려보았다. 폐렴, 페스트, 스페인 독감, 메르스, 사스, 코로나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막세이에서 의사로 활동하는 디디에 라울트(Didier Raoult) 박사의 판단은 적중했다. “코로나는 정도가 심한 독감일 뿐이다.” 그가 한 말이다. 코비드(COVID) 19에 대한 그가 내린 의학적 정의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어느 누구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파스퇴르 연구소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코로나 백신을 개발하겠다고 떠들어댔다. 그러다가 백신 개발은 고사하고 프랑스 정부 당국이 전 국민(프랑스 체류 외국인 포함하여)을 대상으로 접종한 것이 바로 외국에서 수입한 백신이다. 정부가 수입한 백신의 대표적인 의약품이 전 세계 남성들을 홀린 강력 정력제 비아그라를 출시하여 떼돈을 번 미국 화이자가 개발한 백신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것을 두 차례나 맞으면서 저 아득한 중세시대를 떠올렸다.


질병에 모두가 죽어나가던 암흑의 시대에 ‘격리’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그래서 다시 등장한 것이 이른바 우리말로 ‘격리’란 단어에 해당하는 꺄항텐(Qurantaine)이다. 꺄항텐이란 1180년 지중해 가의 도시 막세이(마르세유)에 전염병 환자가 속출하여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환자라 의심되는 사람들을 강제로 격리시키고 검역을 강화한 조치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전염병 예방 조치의 일환이었다. 꺄항텐이란 용어가 뜻하듯 격리는 40일간 주어졌다.


전염병 환자로 의심되는 이들에 대한 격리는 차치하고서라도 정부가 권하는 예방접종까지 마친 멀쩡한 사람까지 집안에 가둬놓은 이 끔찍한 21세기 재앙은 ‘나’라는 존재 역시 집안에 감금되는 결과를 낳았다. 다행이라면 병원이나 수용소가 아닌 아내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집안이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아내는 속수무책인 나를 극진히 보살펴주었을 뿐만 아니라, 매일 방송되는 티브이(TV) 미사를 지켜보면서 기도하고 묵상하고 또한 내 참담한 영혼을 위해 기도해 주었다. 그것도 매일!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나 또한 그녀를 따라 기도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그러면서도 죽음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음을 절절히 체감했다.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몇 년 전 이미 맛본 죽음은 오히려 달콤하기까지 했다. 피를 토하고, 그것도 덩어리 피를 토하고 실신하여 방바닥에 널 부러진 상태에서 온몸에 힘이 빠지며 의식이 없어지는 걸 느낀 순간, 서서히 무의식 상태에 빠져 깊은 잠을 자듯 하다가 다시 깨어났을 때 맛본 죽음은 참으로 달콤하기까지 했다. 참으로 평온한 잠을 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산소호흡기를 뒤집어쓰고 중환자실에 실려갈 때까지 죽음이 저렇듯 평온한 잠 같은 것이라면 그 또한 기꺼이 맞을 수 있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건 지극히 개인적인 주관이나 편견에 가깝다는 걸 깨달은 건 실제 사망자 수가 급증한 코로나 기간 동안이었다. 그들이 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죽어야만 한다는 말인가? 그깟 바이러스에 사망할 정도로 인간이 유약한 존재란 말인가? 대체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건 무얼 뜻하는가? 처참한 상황에서 죽임을 당하는 자들에게 신의 의지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한단 말인가? 수없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몸부림쳐도 쉽게 풀릴 문제는 아니었다. 책들을 이리저리 뒤적여보아도 선뜻 수긍이 가는 글귀마저 찾아보기 어려웠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거룩하고
동시에 엄숙한 것이어야만 한다.
죽음이 자연적이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데 뭔가 뒤틀린 느낌이었다. 나는 오직 곁에서 나를 돌보고 위로하고 보살펴주는 아내에게서 그와 같은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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