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왕 기욤의 출생에 관한 서사

몽생미셸 가는 길 119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정복왕 기욤의 서사를 다룬 길이 70미터 태피스트리, 바이외(Bayeux) 자수박물관, 스테판 모리스(Stephane Maurice) 사진.


흔히 ‘너그러운 로베르’ 또는 ‘자유분방한 로베르’라 불리는 로베르 르 마니피크는 어렵사리 권좌에 오른 인물이다. 부왕인 리샤르 2세에 대항하여 반역을 도모했던 그는 자신의 형인 리샤르 3세와 늘 각축을 벌이던 반항아였다.


루이 로쉐가 조각한 로베르 르 마니피크.


그런 그가 리샤르 3세가 죽자 마침내 꿈에 그리던 권좌에 올라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를 훼깡에서 프랑스 왕국과 인접한 활래즈로 옮겨버린 것이다. 활래즈는 왕세자였을 당시 자신의 아성으로 만들고자 항상 마음속에 품던 곳이었다. 이어 로베르는 여전히 귀족정치를 꿈꾸며 왕위찬탈을 도모하던 리샤르디드(Richardides: ‘리샤르 주변 인물들’이란 뜻)를 하나하나 척결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 리샤르 주변 인물들은 유(Eu), 에브뢰(Évreux), 마흐탱(Martain) 등지를 관할하던 주교들이나 백작들이었다. 이들은 리샤르 3세가 죽자 막내인 로베르를 위협하면서 공국의 왕위 정통성은 자신들에게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곤경에서 벗어난 로베르 르 마니피크는 항상 시골에 머물면서 자신의 안위를 도모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를 관할하고 있는 주교들과 백작들하고 힘겨루기에 지쳤던 그로서는 자신에게 대적할 이가 없는 한적한 시골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사냥을 즐기면서 공국의 안위를 도모하는 것이 더 현명하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활래즈에서 자신에게 충성을 서약한 세력을 형성한 로베르는 알랑송을 포위하고 가신[1]들과 귀족들 앞에서 자신에게 모욕감을 안긴 기욤 탈바스 드 벨렘므를 굴복시키고 국왕의 권위를 확고히 하기에 이르렀다. 병행하여 이웃해 있는 프랑스 국왕 앙리를 지지하면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프랑스 왕국에 속한 베쌩 지역의 소유권을 쟁취하는 외교적 수완도 발휘했다.


그뿐만 아니라 사촌이나 진배없는 에두아르와 알프레드를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이 두 사람은 다 영국 왕 이틀레드와 노르망디 태생인 엠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었다. 그들은 덴마크 왕 크누트에 의해 독점되어 온 영국 국왕인 부친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한 인물들이었다.


기욤이 태어나기 30년 전에 로베르 르 마니피크는 이미 영국을 침공하기 위한 선단을 훼깡 해안에 집결시키고는 기회만 보고 있었다. 영국 정벌을 위해 항구를 출발한 선단은 그러나 아쉽게도 폭풍우를 만나 영국 땅에 닻을 내리지 못한 채 저지 섬 쪽으로 밀려나버리고 말았다. 그 바람에 프랑스 브르타뉴 지역이 노르망디 인들에 의해 약탈당하는 사태가 초래되었다.


선량한 부왕 리샤르 2세의 통치를 이어받은 로베르 르 마니피크는 바이킹들이 교회들로부터 약탈한 재물들과 영지들을 되돌려주고 세리지와 몽티빌리에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1032년 11월 뷔르 숲 한가운데 건립된 세리지 수도원은 몽생미셸 수도원 이외에는 수도원이 없던 지역에 새로 수도원이 들어섰다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노르망디 망슈 지역에 세워진 생 비고르 드 세리지 수도원은 1032년 너그러운 로베르(Robert le Magnifique)가 건립하였다. 로마네스크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1035년 1월에는 스칸디나비아 인들의 침공으로 사라진 몽티빌리에 수도원을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로베르는 이 두 수도원에 수도사 대신 수녀들을 기거하도록 함으로써 노르망디 지역에 최초로 수녀원이 태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편 세르지 수도원의 헌당식 미사에 참석한 로베르 르 마니피크는 봉헌금을 준비하지 못한 실책을 만회하려 프랑스 국왕 앙리 1세로부터 약탈한 진귀한 백여 권의 서책을 수도원에 기증하는 아량을 베풀기도 했다.


이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로베르는 느닷없이 영광으로 가득 찬 시기를 관통하는데, 예루살렘을 향한 성지순례 출정식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속죄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고해성사라도 하려 했던 것일까? 훼깡에 남작들을 모두 모이게 한 뒤, 로베르 르 마니피크는 자신의 후계자로 이제 막 7살이 된 기욤을 책봉한다는 서약을 했다.


국왕인 로베르는 군신들의 됨됨이를 미리 꿰뚫어 본 것처럼 아이의 장래까지도 예견했던 것일까? 국왕은 신하들에게 아이의 어머니까지도 돌봐줄 것을 부탁했다. 이 여인이 바로 아흘레뜨라 불리는 기욤의 모친이다.


아흘레뜨는 아리따운 용모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지혜까지도 겸비한 여인이었다. 어느 날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모래톱에서 빨래를 하던 아흘레뜨가 사냥을 마치고 성으로 돌아가던 국왕의 눈에 띄었다. 그녀를 발견한 국왕은 갑자기 사랑의 충동에 빠져들어 그날 밤 그녀와 운우의 정을 나누는데, 이때 잉태된 아이가 훗날 노르망디 공국과 영국을 함께 다스릴 기욤이다.


에흘르바 또는 아흘레뜨, 에흘리이외, 아흘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기욤의 모친은 휠베르의 딸로 무두장이이자 가죽수선공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나뮈르와 리에쥬 사이에 위치한 플로렌스 마을에서 노르망디로 이주해 온 오늘날의 지정학적 조건에서 보자면 벨기에 여인이었다. 부친의 직업이 무두장이였다는 점은 활래즈의 기브레 장터가 우(牛) 시장으로 유명했던 터라 쉽게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중세의 전기작가 바스와 브누아는 이 여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아리따운 아가씨는 피부가 흰빛이었으며, 포동포동한 살집을 지녔고 다른 어떤 이들보다도 갑절 아름다웠다. (···) 그녀의 안색은 희다 못해 장미꽃보다 아름다웠다.” 그녀는 “총명하고 우아했을 뿐 아니라 재치 있고 예의 바르게 처신했다.” (바스). 어느 더운 여름날 로베르 공작은 “샘물이 졸졸 흐르는 하천 자갈밭에서 아마사천과 린네르, 양털로 짠 옷들을 빨래하는 그녀를 발견했다. 드러난 그녀의 다리는 너무도 희어서 마치 눈이나 백합꽃송이가 그녀에게 흰 살결을 선물했나 보구나 생각될 정도였다.” (브누아). 갑자기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도다! 그러나 이 아리따운 처자는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그녀는 성에 거주하고 있는 공작에게 성채의 커다란 정문으로 들어가겠다고 요구했다. 그것도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들어가겠노라 요구했다. [2]


또 이런 일화도 전해 내려온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사랑을 나누었다. (···) 그러다가 젊은 여인은 잠들었다 (···)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꿈꾸는 듯하던 그녀가 소스라치며 벌떡 일어났다. 국왕은 그녀에게 물었다. “왜 이리 소스라치듯 일어났느냐?” 그녀가 대답했다. “국왕 나으리!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습니다. 꿈을 꿨는데 제 몸속에서 나무가 자라 몸을 뚫고 나와 온 하늘을 덮는 것이었습니다. 나무 그림자가 처음에는 제 몸을 가리더니 나중에는 온 노르망디 전체를 휘덮는 것이었습니다.” (바스). 브누아에 따르면 “그녀가 말한 나무 그늘은 온 노르망디를 뒤덮고 바다와 영국의 넓은 땅까지 집어삼킨” 것이었다. 상냥한 이흘레뜨는 아이를 낳았는데 기욤(Guillaume)이란 이름의 남자아이였다 (···) 그리고, 한 참 후에 아에리(Aélis)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3]


바이외 자수박물관에 보관 전시 중인 길이 70미터의 태피스트리에 수놓아진 ‘아흘레뜨의 나무’.
<샘물이 졸졸 흐르는 실개천의 자갈밭>. 사냥에서 돌아오던 로베르는 빨래를 빨고 있는 한 처자를 발견하였다. 「아흘레뜨의 샘」, 활래즈(Falaise).


그날 밤 아이를 잉태한 아흘레뜨는 1027년 한 해가 다해가던 때 자신의 친정집에서 기욤을 낳았지만, 벨기에에서 노르망디로 이주해 온 이민자인 데다 출신성분마저 불분명한 까닭에 왕비로 간택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왕세자와 공주를 낳은 관계로 1030년 국왕 로베르 르 마니피크가 지켜보는 가운데 엘루엥 드 콩트빌과 결혼하였다. 이 ‘운수는 사나웠지만 정숙한 여인’이었던 아흘레뜨는 엘루엥 드 콩트빌과 결혼하여 다시 아이 둘을 낳았는데, 앞으로 기욤을 도와 영국 정벌에 나설 오동과 로베르였다.


이쯤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무엇 때문에 기욤이란 이름 앞에 ‘사생아(Bâtard)’란 수식어가 붙느냐 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아버지는 국왕이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을 못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 관계로 자연 그와 같은 수식어가 붙을 수밖에 없다.


앞으로 영국까지 정복하는 기욤(그래서 그에겐 ‘정복왕’이란 수식어도 함께 한다)은 이러한 출생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부단히 노력했지만, 세상사 쉬운 일은 없다고 갖은 우여곡절 끝에 노르망디 공국의 일인자가 된다. 그가 노르망디와 영국을 동시에 거머쥘 수 있었던 힘도 이러한 출생의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자기 성찰과 부단한 노력에 있을 것이다.


자신을 가리켜 사생아라 부르며 업수히 여긴 모리배들을 제거하고 반역을 시도한 영주들마저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공국의 안위마저 흔들던 반역자들을 모조리 척결한 뒤(바라빌 전투), 마침내 이웃해 있는 프랑스 왕국과의 전투(발레 뒨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는 명실공히 공국의 일인자로 우뚝 선 것이다.


이는 한 인간의 인간승리이자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그는 주변에서 아첨하는 이들을 절대 믿지 않았다. 그가 끝까지 믿었던 인물은 다름 아닌 자신의 모친이 낳은 아버지가 다른 형제들인 오동과 로베르였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 준다. 자신의 모친과 의붓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오동과 로베르는 기욤을 도와 영국 정벌을 성공리에 마쳤을 뿐만 아니라 죽는 날까지 노르망디 공국과 영국을 다스렸다.






사족(蛇足) 노르망디 공국을 어린 7살 아들한테 떠넘기고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떠난 로베르 르 마니피크는 소아시아를 떠돌다가 니스에 도착하자마자 사망했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힘이 고갈된 탓인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독살당한 것인지는 확실치가 않다.






[1] 가신(家臣)이라 함은 봉건시대에 군주 측근의 신하들 가운데 작위를 지닌 귀족들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2] 미셀 우흐께, 질르 피바흐, 장-프랑수아 세이에흐 공저, 『정복왕 기욤(Guillaume le conquérant)』, OREP 출판사에서 인용.


[3] 위의 책.


이전 08화정복왕 기욤(윌리엄)의 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