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214화
[대문 사진] 옛 수도원 건물에 캉(Caen) 시청사가 들어섰다.
노르망디 왕국의 수도에 와있다. 춥다. 12월의 한기는 온몸을 꽁꽁 얼어붙게 만든다. 영하로 내려간 날씨가 며칠째 계속되고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먼저 손목의 힘을 풀어지게 만든다.
두 눈도 며칠째 고생하고 있다. 자꾸 눈물이 흐르면서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는 것이 책과 온갖 자료 그리고 컴퓨터와 휴대폰 화면을 너무 많이 들여다본 탓은 아닐까 의구심만 더해진다.
인공눈물로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 습관은 시야를 이처럼 어둡게 만들어 놓고야 말았다. 그 탓에 엉뚱하게도 생각이 빗장을 건다. 이런 때는 전광석화같이 생각에 끼어드는 반짝이는 아이디어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몇 날이 지난 그렇게 덧없이 흐른 뒤, 주섬주섬 가방을 쌌다. 몇 년째 되풀이하여 향하고 있는 캉(Caen)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캉은 1천 년 전 노르망디 왕국의 수도였다. 정복왕 기욤(윌리엄)은 노르망디 왕국의 시조 롤로가 수도로 정한 도시 루앙에서 마침내 캉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다. 그러자 노르망디 공국은 번영을 구가했다. 공국의 안정을 다진 기욤은 이어 영국 정벌에 나서 영국마저 정복하고 거처마저도 런던으로 옮긴다.
영국 정복이 있기 전까지 캉(Caen)은 루앙(Roen)과 함께 명실공히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였다. 기욤이 부재할 캉은 왕후 마틸드에게 맡겨졌다. 캉은 엄연히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로서 그 기능을 다하고 있었다.
루앙과 캉의 관계는 21세기인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노르망디는 두 개의 광역단체, 즉 북쪽 지역은 오뜨 노르망디(Haute-Normandie : ‘위쪽 노르망디’란 뜻)라 부르고 남쪽 지역은 바스 노르망디(Basse-Normandie : ‘아래쪽 노르망디’란 뜻)으로 행정구역을 나누고 있다. 오뜨 노르망디의 주도는 루앙이며, 바스 노르망디의 주도는 캉이다.
이러한 행정구역 상의 나눔은 천 년 전 기욤의 판단과 결코 무관하지가 않다. 심지어 지금의 노르망디 지방은 정복왕 기욤이 지배했던 영토와 거의 일치한다.
프랑스에 살면서 깨달은 바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프랑스인들은 늘 자신들의 소중한 전통을 소홀히 여기는 법이 없다는 점이다. 그것이 비록 무형이든 유형이든 이방인의 피가 섞인 유산이나 전통이라 할지라도 프랑스를 위한 것이라면 모든 것에 우선하여 그 문화유산과 전통을 착실히 계승하는 것이 프랑스 문화의 본질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여행은 이렇듯 깨달음으로까지 이어진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노르망디 왕국을 건설한 롤로, 노르망디 땅에 발을 들여놓은 뒤 왕국까지 세운 이 전설적인 인물은 노르망디에 살던 바이킹의 시조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에 의해서 건설된 노르망디 왕국은 6대째 기욤(윌리엄)이 이어받았다. 그리고 수도는 루앙에서 캉으로 옮겨졌다.
먼 미래를 예견함은 물론 시대를 앞서갈 줄 알았던 정복자는 수도를 캉으로 옮긴 뒤, 영국 정벌에 나서 잉글랜드를 노르망디 왕국에 편입시킬 수 있었다. 그 모든 동력은 캉에서 비롯되었다. 캉은 대서양 안쪽 바다를 끼고 형성된 도시로서 정복왕 기욤 시대 이전에는 별다른 활동이 없었던 변방에 지나지 않던 곳이었다.
하지만 캉은 여러모로 유리했다. 우선 바다에 면해 있고 이로써 내륙 안쪽에 위치한 루앙보다는 바다로 나아가기가 수월했다. 수도를 루앙에서 캉으로 옮긴 것은 바이킹의 피가 흐르는 기욤에게 있어서 거의 본능적인 감각 같은 것이었다.
바다를 제패해야만이 해상 강국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걸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었던 것이나 당시 북대서양을 마구잡이로 유린하고 있는 스칸디나비아와 영국을 기욤은 결코 내버려둘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적어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영국을 손아귀에 넣어 선조의 고향인 스칸디나비아와의 뱃길을 활짝 열어젖힐 계획까지 세워놓았다. 만일 영국을 손에 넣는다면 선조들의 얼어붙은 땅인 스칸디나비아(노르웨이)와 덴마크는 거의 수중에 놓이는 셈이었다.
기욤이 루앙에서 캉으로 수도를 이전한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자리하고 있었다. 프랑크(프랑스) 국왕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이곳저곳을 떠돌던 기욤은 프랑크 왕국의 힘이 거의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와 같은 장소를 원하였다. 그곳이 캉이었다! 당시 캉은 오래된 중세 성곽 도시로서의 기능을 갖추고 있었던 것도 기욤의 판단을 도왔다.
바다에 면한 캉은 우선 물자 이동이 용이했고 주변에 석회암 지대가 있어 당시 제일의 건축 자재였던 석회암까지도 영국에 수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영국 정벌 이후에 영국에 들어선 대성당의 건축 자재인 석회암은 모두 캉에서 수출된 것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이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수산축산물들은 모두 캉으로 모여들었다. 캉에 제일 큰 장이 섰고 이어 노르망디 각지에 큰 장터가 생겨난 것도 이와 무관하지가 않다. 시장 경제를 활성화하고 공국의 부흥을 꾀한 기욤으로서는 캉이 그 어느 곳보다 중요한 지리적 장점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한 것은 지금까지도 역사가들에게 이견이 없을 정도다.
여기에 한 가지 이유를 덧붙이자면 ‘영성의 문제’를 들 수 있다.
11세기는 중세, 그것도 영성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영성이 뭔가 하면 예수의 부활에의 의지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하여 성령이 전하는 모든 힘을 성실하게 따르는 기독교도들의 모든 정신적 행위나 활동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천국에 대한 비전’은 따라서 당대의 가진 것 없고 뿌리 뽑힌 이들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언약’일 수 있었다. 더해 선(善)함에의 의지가 실천 덕목으로 떠오른 기독교적 영성은 이후 다시 1천 년을 이어 나가게 만든 최고의 원동력이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고자 했던 영성이 지배하던 시대에 그러나 기욤과 마틸드와의 결혼은 당대 사회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킬 만한 사회적 이슈가 될 충분한 결점을 잠재하고 있었다. 그 결점이란 다름 아닌 근친결혼이라는 가계의 핏줄에 따른 문제였다.
선대로 올라가면 기욤과 마틸드는 이종사촌 간이 된다. 이를 교황은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교황은 이뿐만 아니라 프랑크 왕국의 변방인 대서양을 끼고 있는 노르망디 지역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바이킹의 혈통을 지닌 ‘이방인 족장’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철퇴를 가하기 위해서는 교황은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징벌을 내려야만 했는데 그게 바로 ‘파문’이었다. 파문을 당하면 이웃해 있는 기독교 왕국들 사이에서 공식적으로 명함을 내밀 수 없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기욤은 당시 베크 수도원장이었던 랑프랑크(이탈리아에서 온 수도사 출신이었던)을 로마 대사로 임명하여 긴급하게 교황을 알현하고 자신의 파문에 대한 보속을 내려줄 것을 간청했다. 이에 따라 1059년 노르망디 공작의 로마 대사로 빛나는 활약을 했던 랑프랑크가 교황 니콜라우스 2세를 알현하고 기욤의 파문에 대한 철회를 성사시켰다. 이로 인해 기욤과 마틸드는 속죄의 뜻으로 캉에 수녀원인 아베이 오담므(Abbaye aux Dames)와 수도원인 아베이 오좀므(Abbaye aux Hommes)를 지을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예순이 되어 파리 인근의 망트 라 졸리(Mante La Jolie)에서의 프랑크 왕국과 격렬하고도 치열한 전투로 부상을 입어 루앙으로 이송된 뒤 찬란한 삶을 마감하는 기욤이 바로 이곳 캉의 아베이 오좀므의 생테티엔느(성 스테파노) 성당에 묻힌 것도 알고 보면 자신의 속죄의 삶이 바로 이곳 캉에서 마지막으로 완성된다는 의미였다. 기욤 보다 먼저 사망한 왕후 마틸드 역시 캉에 소재한 아베이 오담므에 묻혔다.
기욤이 수도원장이었던 랑프랑크로 하여금 짓게 한 이 두 수도원은 오늘날까지도 건재해 수많은 순례자들과 여행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 두 수도원이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연합군의 포화에도 비켜갈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두 수도원이 캉 성벽과 함께 캉을 대표하는 제일의 문화유산이자 당대 역사의 산물임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기욤과 마틸드 이 두 사람의 결혼부터 죽음까지 그 모든 것이 범상치 않음을 미리 짐작한 결과 이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죽음에 대해 늘 궁금해했다. 그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 유(Eu)를 찾아갔을 때의 반짝이던 아내의 시선 역시 무언가 두 사람 간의 엄중한 사랑을 읽은 눈빛이었다. 한평생을 같이 하면서 노르망디 공국과 영국, 이 두 왕국을 동시에 거느렸던 기욤과 마틸드는 역사적으로 확실히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여기서까지 기욤을 영웅화할 필요는 없겠으나 마틸드만큼은 평범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뛰어넘은 참으로 독특한 삶을 산 여인으로서 재평가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그때의 내 판단이었다.
그렇기에 오늘의 행선지는 다름 아닌 두 사람의 무덤을 보기 위함이었다. 이 두 사람은 다정다감한 생만을 영위했던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당대 어느 누구보다도 치열한 삶을 산 사람들이었다. 왕국을 건설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왕국을 다스리고 거기에 더해 영국 땅까지 정벌에 나서는 등 프랑스, 영국 역사에 있어 가장 질곡이 심한 시기를 관통한 인물들이 바로 정복왕 기욤(윌리엄)과 왕후 마틸드다. 결혼부터가 순탄치 않았던 이 두 사람은 결국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그 속죄로 수도원을 짓고 참회하면서 살다가 자신이 지은 수도원에 묻혔다. 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이야기인가?
이 단순한 역사적 사실 말고도 마틸드는 기욤이 영국에 있을 때 온갖 소문의 진원지였다. 매일 낮과 밤 할 것 없이 누군가와 쏙닥 거리며 음모를 꾸미면서 국왕이 부재한 노르망디를 홀로 경영하고자 했던 권력의 화신은 결국 공작이자 국왕이었던 기욤(윌리엄)에 의해 오해를 샀을 뿐만 아니라 분노한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손발이 묶여 돌길을 질질 끌려가는 수모를 당해야만 했던 굴욕으로 점철된 마지막 생을 영위했던 여인이었다. 물론 가난한 이들을 돌본 그녀의 선한 의지를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권력의 정점에서 그녀가 행한 일들이 얼마나 왕국에 위험이 되었는지를 그녀만이 모르는 채였다. 말년을 온갖 고난과 질시와 형벌로 점철했던 그녀는 결국 죽음에 이르러 딸 세실이 수녀원장으로 있는 수도원에 묻히는 영광을 받아들여만 했다. 그 수도원은 자신과 남편 기욤이 지은 수도원이요 성당이었다. 노르망디 왕국의 마틸드의 무덤을 찾아 나선 이번 답사는 그렇듯 천 년 전의 역사를 도저히 비껴갈 수 없는 이유가 도처에 가로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