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틸드의 수도원

몽생미셸 가는 길 216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캉에 소재한 아베이 오담므 성삼위일체 수도원 성당


2019년 유월,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프로방스는 태양빛이 뜨거울 테지만 아내와 함께 우리 두 사람이 찾은 노르망디는 써늘하기만 하다. 어제 행복하게도 숙소에서 무지개를 본 건 우연치고는 행운에 가까운 것이었다. 남불(南佛)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무지개를 프랑스 북서쪽 대서양가에 위치한 노르망디에서 볼 수 있었던 건 뭔가 앞으로 전개될 일에 행운이 따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마저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아내와 함께 캉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발견한 무지개, 나는 그걸 행운의 징조로 온전히 받아들였다.


담배를 많이 피워 대 천식 환자처럼 알레르기 증세를 달고 사는 나로서는 연중 내내 햇살 가득한 남불 프로방스가 지내기에 더 좋은 환경일 수 있지만, 특별히 노르망디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 ‘써늘함’에 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기후를 아내도 반겼다. 잘 생긴 외모에 정확한 어조로 늘 우리 부부를 자상하게 진찰해 주는 젊은 일반 주치의 이노조사를 이제 보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있으니 진정 아내에게도 민망하기 짝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저 기욤의 후손들이 아직까지 생을 영위하고 있는 지구 북반구에 살고 있는 스칸디나비아(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인들이 햇빛 가득한 땅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연중 춥거나 덥거나 간에 거의 극한에까지 기온이 다다라 한없는 인내심을 유발하는 한반도의 추위와 더위를 생각한다면 연중 그리 춥지 않으면서 덥지도 않은 노르망디 지역은 나 같은 사람이 지내기에 최고의 조건을 갖춘 장소는 아닐까 늘 반문해 보곤 한다. 추위도 문제지만 실상 더위가 더 큰 악몽이다!


누군가 내 글에서 술 냄새가 난다고 말할 정도로 글 쓸 때마다 와인을 홀짝이는 나로서는 노르망디가 결코 싫지 않다. 이 뜨뜻미지근한 기후가 내게는 더없이 좋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와인을 마시기에 좋은 기후, 물론 노르망디 지방에서는 훌륭한 부르고뉴 산 와인의 상쾌함에 젖어들거나 보르도 산 묵직한 와인의 홀림에 사로잡히는 즐거움과 기쁨보다는 루아르 강 인근 포도밭에서 재배한 포도만으로 발효시켜 제조한 화이트와인 무스카데의 차갑고도 시원한 맛에 취하는 것이 더 온당한 일일 듯도 싶다.


와인을 즐겨 마신 덕분에 몸무게가 보기만 해도 짜증 날 만큼 메마르고 야윈 50킬로에서 70킬로로 급상승했다. 노르망디는 그렇듯 와인을 마시기에 좋은 고장으로 다가왔다. 시원하게 목젖을 넘어가는 화이트와인의 상쾌함에 비릿한 굴 내음이 더해지면 그야말로 ‘환상’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이 유월 그것까지 기대하는 건 좀 곤란하지 않을까? 영어 알파벳 상으로 알(R) 자가 들어가지 않은 달에 생굴을 먹는다는 건 위장병을 달고 사는 나로서는 심각하게 되새겨봐야 할 문제다.


그렇다면 오늘의 점심 식사를 위하여 전식으로 생굴을 시켜보는 건 어떨까 생뚱맞은 생각 또한 연신 끼어든다. 모처럼 다시 모험을 해보는 것이다. 어차피 이번의 답사 또한 모험에 기댈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보니 식사마저 그런 모험을 쫓아 영 뜻하지 않은 쾌감을 기대하는 도리밖에는……


나란 사람은 쾌감에 민감하진 않다. 차라리 소심한 남자라 이야기하는 것이 더 온당할 것이다. 더 적확한 표현이 내게 남아있을까? 나는 나를 설명하기에 영 역부족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평에 늘 의존한다.


나를 가장 잘 표현한 이는 사랑하는 아내라고 분명한 어조로 단정 짓고 싶다. 그녀만큼은 어느 누구보다도 나를 잘 설명해 준다. 나라는 사람은 소심하면서 대범한 남자, 감성을 쫓으면서도 냉철한 이성을 추구하는 참 이해하기 혼란스런 사내, 역사관이 소홀한 듯하면서도 문학적으로 그때마다 그러한 단점을 극복해 가는 무서운 인내력을 지닌 사람쯤으로 설명해 준다.


때로는 아내의 말이 맞고 때로는 아내의 말이 너무 과장되지 않을까 나는 적잖이 불안해한다. 하지만 부부란 이처럼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위해주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가? 나는 내 생각에 마침표를 찍는다.


오직 살풍경한 쇼핑몰들밖에 보이지 않는 캉 근교의 숙소에서 마틸드와 기욤의 수도원에 목말랐던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선다. 늘 웃음을 띠고 인사하는 호텔 주인장 내외도 반가운 건 마찬가지다.


오늘 서둘러 숙소를 빠져나온 이유는 첫날 마틸드가 잠들어 있는 수도원 성당과 기욤이 잠든 수도원 교회를 일찍부터 답사하리라는 계획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딜 먼저 찾아가야 할지는 아직까지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무지개가 다시 뜨기를 고대하는 아내의 옆모습을 살피면서 기욤의 수도원 성당보다는 마틸드가 잠들어 있는 성당을 먼저 찾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그런 연유로 우리의 첫 기착지는 마틸드가 잠들어 있는 아베이 오담므(Abbaye aux Dames) 수도원 성삼위일체 성당이 되었다. 기욤이 평생 사랑했던 여인, 그리고 어느 여자보다도 남편을 잘 이해했던 여인, 평생을 권력과 부를 한 몸에 이고 살았지만 청빈하면서도 검소함을 몸소 실천했던 전형적인 프랑스 여인, 바이킹의 피가 흐르는 남자를 죽는 날까지 사랑했던 여인, 그녀가 죽자마자 몸 둘 바를 모르고 죽음의 전투에 나가 외로움을 죽음으로 마감한 남자의 단 한 명뿐인 배필이었던 여인, 평생 8남매를 키우면서 악전고투 속에 노르망디 공국은 물론 영국 땅까지 지배했던 영웅의 진솔한 동반자였던 여인, 나는 아직도 그녀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를 몰라 서두르고만 있다. 운전대에 힘이 가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캉 도심 한복판으로 들어서면서 아베이 오담므 표지판을 읽는데 정신이 팔렸다. 왜냐면 여러 번 캉을 찾아왔지만 수도원을 이렇게 직접 가까이 가기는 처음이다. 아내가 대신 도로 표지판을 보고 방향을 수정해 준다. 마침내 도착한 수도원엔 적막만이 감돌고 나는 아직 바캉스가 시작하지 않은 걸 너무도 행복해한다. 여행객이나 순례자들이 없으니 이렇게 조용할 수밖에. 조용히 성당을 방문할 수 있으려니 생각은 모처럼 적중했다. 갓길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는 아무도 마중 나온 이 없는 성당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선다. 아내도 기대하는 눈치다.


Abbay aux Dames, 2019 juin.jpg 도착하자마자 바라본 아베이 오담므(Abbaye aux Dames)의 성삼위일체 성당 정면. 압도적이고 위풍당당한 모습이 노르망디 공작부인의 단호하고도 엄격했던 인상과 잘 어울린다.


성당 내부는 높고 길이가 긴 깊고 근사한 분위기다. 로마네스크는 기욤 시대에 화려하게 개화했다. 그때가 고딕 이전의 11세기이니 종교 건축물을 단지 바실리카 양식으로만 설명하기엔 부족함이 없지 않다.


로마네스크란 과연 무엇인가? 전지전능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시대에 태어난 건축 양식, 그래서 성당 건축물 또한 늠름하다. 천국을 예정한 탓이다. 속세의 작은 집에서 살다 보면 이런 거대한 건물 안에 들어서면 마치 천국을 여행하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높고 길게 뻗은 돌기둥들은 저마다 무어라 소곤댄다. 마치 천사들이 저희들끼리 수군대는 듯한 모양새다. 속세의 평범한 신자를 보고하는 소리일 게다. 저놈은 무슨 죄를 짓고도 뻐젓이 천국에 올 수 있었을까? 천사의 환영은 기둥들 사이를 헤집고 날아다닌다.


어디선가 천사장 미카엘의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이놈! 게 섰거라. 네놈은 무엇 때문에 이곳을 찾아왔는가?” 죄지은 인간은 대답이 없다. 다만 눈알을 굴리며 마틸드의 무덤을 찾기에 바쁘다. 선한 아내는 조용히 기도할 곳을 찾느라 이리저리 성당 안을 훑어본다. 남편을 대신하여 참회부터 하고자 하는 것이리라.


아베이 오 담므의 정문 팀파늄은 삼위일체를 상징한다. 성부 성자 성령, 비로소 왜 세 개의 인물 형상이 아치아래 합각벽에 묘사되어 있는지를 짐작한다.
입구로 들어서면 실내가 참으로 검소하고도 소박하다는 인상이 먼저 든다. 수도원 성당이란 걸 잊어서 그렇다. 천 년 전 마틸드의 삶 또한 그렇게 다가온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기둥머리 장식에 묘미가 있다. 다양한 형상들이 등장하는 매력에 빠지다보면 이 시대의 영성적 상상력이 편협함 없이 얼마나 풍요롭고 풍부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기둥머리 장식 가운데 정복왕 기욤(윌리엄)의 모습도 보인다. 기욤은 노르망디를 상징하는 사자 두 마리의 보호를 받고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이 기욤의 시대에 화려하게 개화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 정벌이 가져다준 부에 있었다. 새로운 대형 건축물들을 지을 건축 자재는 노르망디에 널려 있었지만 부족한 건 공사비였다. 인부들에게 공작으로서 떳떳하게 지불해야 할 임금은 적잖이 걱정이 되는 대목이다. 이 막대한 건축비가 영국에서 조달되었다. 풍요로운 잉글랜드 왕국의 젖줄이 바다 건너 노르망디에까지 이어진 것이다.


거기에 더해 배밖에 건조할 줄 몰랐던 바이킹들에게 탁월한 이탈리아 건축술을 체득한 프랑스인들이 있었다. 노르망디가 바이킹들만이 사는 땅이 아니었던 셈이다. 바이킹과 동거하기 시작한 프랑스인들에게는 로마 제국의 대형 건축물을 완공한 지혜가 아직 남아있었다. 그것이 영성과 결합하여 더욱 발전된 형태로 로마네스크라는 종교 건축물을 탄생시킨 것이다. 로마네스크가 고딕으로 가는 도상일 수 있었던 이유를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가 있다.


고딕에 이르면 더 화려하고 더 고도의 건축술을 보여주는 정말 대단한 종교 건축물들이 프랑스 곳곳에 들어설 수 있었던 자양이 이미 기욤의 시대, 즉 로마네스크 시대에 형성된 덕분이다. 따라서 앞으로 만개할 고딕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11세기, 12세기에 건축의 황무지나 다를 바 없던 노르망디에서 개화한 로마네스크 양식을 촘촘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십자가 형태의 성당 내부, 그 한가운데 자리한 제단 그리고 성가대석, 성가대석에 고이 잠들어 있는 노르망디 공작부인이자 영국의 왕후인 마틸드, 그녀를 노르망디인들이 발명해 낸 채광탑이 한없이 그윽한 햇살을 쏟아붓고 있다.


1083년에 사망한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부인 마틸드의 무덤, 아베이 오 담므 삼위일체 성당.


그녀는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듯이 보인다. 영생의 삶을 살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누군가의 무덤을 찾아갈 때마다 드는 느낌은 그렇듯이 한 줌의 재로 강에 뿌려지는 주검보다는 뼈라도 한 토막 땅에 묻히는 느낌에 있다. 뭐랄까? 그녀의 뼈 한 뼘 마디는 분명 이 검은 대리석 석관 밑에 잠들어 있다. 고고학 발굴 조사로도 증명이 된 그녀의 시신은 썩지 않을 영혼과 함께 성당을 은은히 감싸고돈다. 그것이 영성이든 성령이든 그녀에게는 중요하지가 않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도였지만, 그 이전에 평생 한 남자만을 사랑한 프랑스 여인이었다.


마틸드의 죽음을 애도해주고 있는 색유리창들의 은은한 빛을 보고 있노라면 죽음 또한 편안한 휴식일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21세기 인류인 나는 과연 아내를 위해 뭘 준비할 수 있을까? 천 년의 사랑을 증명할 만한 아내의 뼛조각 하나라도 묻을 수 있는 공간을 끝내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녀를 사랑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천 년 전에 기욤은 그렇게 했다. 그걸 몸소 실천한 장본인이다. 사랑한 여인을 지극한 성소에 묻은 천 년이 지나도 다하지 않을 사랑을 보여준 세기의 영웅이었다.


성당 밖 오른편 오텔 디유(Hôtel-Dieu)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마틸드(사진 왼쪽)와 기욤(사진 오른쪽)의 조각상.


나는 그 사실에 감동한다. 아내는 멀찍이서 기도 중이 건만 나는 굳이 애처로운 사랑에 목마른 채 두 사람의 사랑 타령에 매달린다. 어느 영화감독의 고백처럼 삶보다도 사랑이 더 중요했다. 21세기 인류인 우리는 이 말에 동의할까? 할 수 있을까? 궤변이라 무시하지는 않을까? 모르겠다. 사람마다 느낌이 전혀 다르니 굳이 영화감독의 이야기를 정당화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기욤과 마틸드는 1천 년 전에 남녀의 사랑이 어떤 결말을 이루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고도 정당하게 증명해 보인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자 세기의 인류 가운데 한 명이었다.


마틸드의 무덤 쪽에서 입구를 바라보니 입구를 통해 유월의 환한 햇살이 쉼 없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아내에게 이렇게 왔으니 사진 한 장 찍지 않을 수 있겠나 했더니 아내는 다소곳이 포즈를 취해주었다. 마틸드도 성당 입구 안쪽에서 포즈를 취한 이 여인처럼 아름다웠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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