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틸드의 무덤

몽생미셸 가는 길 215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캉에 소재한 아베이 오담므 성삼위일체 성당에 자리한 마틸드의 무덤


정치인, 그것도 최고의 권력을 쥔 권력자의 부인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이러한 의문은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제기되는 의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천 년 전 노르망디 공국과 영국을 동시에 지배했던 세기의 영웅 정복왕 기욤(윌리엄)의 배우자인 마틸드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녀의 무덤을 찾아가기 전날까지 내내 뇌리를 맴돌던 궁금증이었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법이다. 21세기에도 저 아득한 역사 속 인물들의 삶은 똑같이 반복된다. 왜일까? 인간은 자신이 속한 사회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는 그 규모나 성격이 다를 뿐, 그곳에서 벌어지는 암투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 없듯이 여겨지기까지 한다.


중세 시대에는 군주에게 권력이 집중되었고 지금은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군주에게 권력을 준 이와 대통령에게 권력을 준 주체가 다를 뿐이다. 군주는 권력을 타고나지만, 공화국 대통령은 공화국의 주체인 국민이 대통령에게 권력을 위임했을 따름이다.


이 신성한 권력을 선한 백성이나 국민을 향해 행사할 때는 따라서 예나 지금이나 신중해야만 한다. 만일 권력을 잘못 행사하면 반란이나 쿠데타가 일어나 정권이 전복되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권력자는 스스로를 늘 감시하고 행동을 조심하고 공약을 남발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배우자는 어떠해야 할까? 백성이나 국민 앞에 모습을 감추고 권력자의 그림자로 행동하는 것이 옳다. 만일 전면에 나서면 권력자는 배우자로 말미암아 비난을 받고 권력 행사에 치명상을 입게 된다.



권력자의 그림자로서의 배우자란 어떤 모습인가?



파리 시장만을 전전하다가 어렵게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부인 베르나데트 시라크 여사는 대통령 영부인으로서 귀감이 될 만한 삶을 실천한 인물로 알려졌다. 조용히 남편인 대통령을 내조하면서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모범적인 행동을 몸소 실천한 인물로 그녀에 대한 삶은 언론에 별로 조명된 적이 없을 정도로 아주 사사롭고 소소한 삶을 산 인물로 정평이 나 있다.


대통령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을 학벌과 재능과 정치적 감각이 탁월했던 시라크 여사는 단 한 번도 대통령을 대신하여 정치적 발언을 하거나 정치적 모험을 감행한 적이 없는 말 그대로 ‘현모양처’ 상이었다. 그리고 이 ‘신사임당 식 내조’는 앞으로의 프랑스 대통령 영부인의 삶을 규정하기까지 한다.


이에 비해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부인 다니엘 여사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삶을 산 인물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레지스탕스 대원으로서 젊은 시절부터 남편과 함께 대독 투쟁에 나선 인물로 다니엘 여사는 남편이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도 정치적 발언을 지속적으로 쏟아놓는 일에 절대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레지스탕스 대원, 사회주의자, 빈곤한 사회주의 국가의 재정적 정치적 후원자, 권력과 사치를 극도로 혐오했던 영부인, 남편의 사생활을 모른 척했던 여인, 그러나 남편이 죽고 난 뒤, 남편의 여성편력까지 기꺼이 감수했던 편견 없는 사회주의 혁명의 실천가로서 다니엘 여사는 아직도 회자될 만큼 참으로 유별난 삶을 산 여성이다.


중세 시대로 거슬러 가보자. 16세기 말 메디치 명문가문의 손녀로 태어나 수녀원에서 기거하다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눈에 띄어 장차 프랑스 국왕의 자리에 오르는 앙리 2세의 배필로 프랑스로 건너오는 이 여인 말이다.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는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기독교 신앙이 몸에 밴 여자였다. 하지만 앙리 2세가 부왕의 연인 디안느 드 푸아티에와 놀아나자 돌변하여 점쟁이를 곁에 들여 늘 국사를 의논하곤 했다. 이 점쟁이가 저 유명한 노스트라무스다.


남편 앙리 2세가 검투사 몽고메리의 창에 눈이 찔려 피를 쏟고 죽는 것을 점쟁이를 통해 미리 예견했다고 사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전하는데, 점쟁이의 예언이 맞았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어찌하여 점쟁이에 홀렸는지 흥미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을 눈여겨보면 다수의 정치인들이 점쟁이를 찾아가 자신의 운명을 의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 대수로울 것 또한 못된다.


한 여인네의 점쟁이와의 동거는 끝내 프랑스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동족 간의 종교전쟁이란 끔찍한 저 30년 동안의 내분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그저 간과할 수만은 없다.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야 그렇다 쳐도 오늘날 대한민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정치인들의 아내들이 점집을 찾아다니는 꼬락서니는 또 뭐란 말인가? 내 블로그에도 온갖 점쟁이들이 공감을 누르고 댓글을 달고 있으니 인간의 운명은 자신의 앞날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 찬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도에서 부처가 태어난 것도, 중동의 사막에서 예수가 출현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 우리네 인간사가 늘 혼란스럽고 무지몽매하여 판단이 잘 서지 않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바르톨로메오 성인의 축일에 발생한 구교도가 신교도를 학살하면서 시작된 종교전쟁은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의 사주에 의한 것이란 것이 사가들의 대체적인 견해이다. 이 때문에 훗날 신교도였던 앙리 4세가 저 유명한 낭트칙령을 발하여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 건 그나마 불행 중 다행한 일이었다.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는 남편이 죽자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들을 차례차례 왕위에 앉히고는 그녀 스스로 섭정의 자리에 올라 궁정정치를 이어갔다. 남편의 애첩인 디안느 드 푸아티에를 잔인하게 제거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녀의 곁에는 늘 점쟁이들이 우글거렸고 프랑스는 점점 파탄의 늪을 향해 치달았다. 그녀의 외동딸 마르그리뜨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 <여왕 마고>는 당대의 실상이 어떠했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어 전 세계적으로 꽤 많은 관객들을 사로잡았을 정도다.


프랑스 사회의 혼란과 격동 속에서도 장수를 누리며 아들 모두를 왕위에 앉히고 외동딸은 앞으로 부르봉 왕조를 활짝 여는 앙리 4세의 배필로 시집보낸(결혼하자마자 그녀의 딸 마르그리뜨는 앙리 4세와 이혼하고 만다)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는 말년에 이르러 파리를 떠나 낙담과 실의 속에 지내다가 늑막염이 도져 루아르 강변의 블루아(Blois) 성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는다.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의 죽음은 결국 시아버지가 물려준 카롤링거 왕조의 몰락을 예정한 것이었으며, 앙리 4세에 의한 부르봉 왕조가 새로이 시작된다는 걸 의미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점쟁이와 여인과의 밀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 공동체를 상징하며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의 삶에서 입증되듯 정치권력의 운명적 파국은 이미 중세 시대 때 프랑스에서 여실히 증명된 셈이다.



그렇다면 마틸드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플랑드르의 백작 볼드윈 5세의 딸로 1031년 플랑드르에서 태어난 마틸드는 플랑드르의 마틸다로 불리는 역사적 인물이다. 그녀는 어머니 쪽으로 프랑크 왕 로베르 2세의 손녀가 되며 샤를마뉴 대제의 후손으로 플랑드르 백작 볼드윈 6세와 로베르 1세의 누이이기도 하다.


파리 뤽상부르 공원에 있는 마틸드 드 플랑드르 조각상.


키가 약 1미터 52센티미터로 추정되는 마틸드는 1050년에 기욤과 유(Eu) 성채에서 결혼하고 수도인 루앙에서 성대한 피로연을 개최한다. 유 성채는 릴을 포함한 플랑드르 지역과 가까운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양 집안 간의 정치적 유대를 도모하고자 결혼식 장소를 굳이 이곳 샤토 유로 정한 것으로 역사가들은 전한다. 기욤과의 결혼은 부친 볼드윈 5세가 왕족인 기욤과 딸을 결혼시킴으로써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 영국에 대한 이익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샤토 유(Château d’Eu)에 소재한 성당에서 있었던 두 사람의 결혼식을 담은 석판화. © OREP.


문제는 이 두 사람의 결혼식이 있기 전 1049년 10월 랭스 공의회를 통하여 교황 레오 9세가 종교적 논쟁이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해 사촌 간의 결혼을 금지시켰다는 점이다. 기욤과 마틸드는 이종사촌 간이었다.


하지만 기욤은 1050년 유 성채에서 마틸드와의 결혼을 감행했고 이는 결국 교황의 분노를 사게 되어 파문을 당하고 만다. 교황과의 화해를 미루던 기욤은 영국을 정복한 뒤, 마침내 1059년 베크 수도원장인 랑프랑크를 로마 대사로 임명하여 교황을 알현케 하고 자신의 결혼을 받아들여줄 것을 호소하자 교황 니콜라우스 2세는 기욤 마틸드 두 사람이 속죄의 의미로 각각 수도원을 짓는 조건으로 그 둘의 결혼을 소급하여 인정한다. 이런 연유로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인 캉에는 수도원이 두 개씩이나, 즉 아베이 오담므(마틸드)와 아베이 오좀므(기욤)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1059년 교황 니콜라우스 2세가 기욤의 파문을 철회하자 이에 감격한 기욤이 마틸드를 위한 아베이 오 담므(Abbaye aux Dames)를 캉에 지을 것을 결심한다. © OREP


마틸드는 기욤과의 슬하에 4명의 아들과 4명의 딸 모두 8명의 자녀를 두었다. 마틸드는 자식들에게 온화하고도 인자한 어머니였다. 특히 장남인 로베르 꾸흐뜨외즈에게 자상했는데, 로베르가 아버지 기욤과 다투고 노르망디로 쫓겨가자 남편의 금과 은을 몰래 그것도 꾸준히 장남에게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부부간에 오해가 생겨 둘 사이에 트러블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부부 사이는 평생 금실 좋고 행복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기욤(윌리엄) 역시 바람을 피웠다거나, 사생아를 낳았다는 이야기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스스로가 ‘사생아’로 불렸던 기욤으로서는 바람을 피우거나 사생아를 낳는 일을 극도로 삼갔을 수도 있다. 마틸드 역시 바람을 피우거나, 남몰래 아이를 낳았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전해 오지 않는다.


영국 정벌 이후에 기욤은 아내인 마틸드를 노르망디 공국의 섭정 자리에 앉혔다. 남편을 대신하여 아내가 노르망디 공국의 최고 일인자가 된 것이다. 기욤으로서는 두 나라를 동시에 다스리기가 쉽지 않았다. 마틸드 역시 런던에 체류하는 기간이 길어지기는 했지만, 명목상으로는 남편을 대신하여 노르망디 공국을 다스리는 ‘여왕’이었다.


이때 그녀는 중세 시대의 여왕의 모범으로까지 간주되었다. 그녀 주변에는 언제나 아미앵의 기 주교(루앙 대성당에 그의 무덤이 있다)가 대기한 채 자문을 도왔고 종교적으로도 개혁자였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자주 서신을 보내 남편이 영국-노르만 왕국 저 너머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도록 혼신의 힘을 다했다.


영국 정벌에 따른 엄청난 부와 부동산을 거머쥔 마틸드는 이를 아낌없이 종교단체나 자선사업에 베풀 정도로 인심이 후했고 신앙심 또한 두터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1848년 알프레드 기야르(Alfred Guillard)가 그린 남편 기욤을 대신하여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마틸드. 바이외(Bayeux) 바롱 제라르 뮤지엄 소장.


마틸드는 1083년 늦여름 느닷없이 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는데 유언에 따라 딸 세실이 수도원장으로 있는 아베이 오담므 수도원 성삼위일체 성당에 묻힌다. 병명은 흑사병으로 알려졌다.


마틸드의 무덤, 아베 오 담므(Abbaye aux Dames), 캉(Caen), 칼바도스(Calvados) 지방.


마틸드는 1083년에 사망했다. 그녀의 시신은 그녀가 캉에 설립한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그녀의 무덤 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그녀는 이제 영원한 삶의 거처를 구하였노라. 11월 초하루 첫 시에 이런 곡절을 적어 가노라.”


일단 여기까지는 완벽한 영웅의 아내에 대한 묘사다. 다음부터가 문제다. 즉,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인 캉에는 ‘싸늘한 거리(La rue Froide)’란 이름이 붙은 길이 있다. 이 거리 이름이 바로 아이러니하게도 마틸드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거리 이름이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지 않은가? 대체 왜 거리가 싸늘하다는 이야기인가?



싸늘한 거리



영국을 정복하자 기욤은 자신이 다스리던 공국을 아내인 마틸드에게 맡겼다. 마틸드는 이를 다시 신임하던 가신에게 맡겼는데 그가 바로 그리무(Grimoult)다.


기욤은 공국의 재무관리 회계를 보고하도록 명령을 하달했다. 재정이 그리 썩 좋은 편이 아니었기에 공작의 명령은 곧바로 그리무에게 하달되었다. 그러자 그리무는 마틸드가 공국의 재산을 횡령하고 낭비했다고 보고했다. 이것이 거짓인지 참인지는 역사가들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남편인 기욤은 이로 인해 아내이자 왕비인 마틸드를 내쳤고, 이에 격분한 기욤은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틸드를 말에 매달게 하였다. 머리채가 말 꼬리에 매달린 채 마틸드는 캉의 거리 한복판에서 질질 끌려가는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렸는지 기욤은 그녀를 감옥에 가둬버렸다. 그것도 추운 겨울날 거리에서 그녀가 질질 끌려가게 만들다니, 캉에 있는 ‘싸늘한 거리(La rue Froide)’란 이름의 길은 이 혹독하고도 살벌한 추위 속에 벌어진 형벌에서 그 이름이 기인한 것이다.


Caen, la rue froide.jpg 캉(Caen)에 싸늘한 거리(la rue froide)라 이름 붙은 거리가 나있다. 거리 이름의 뜻은 마틸드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전해온다.


화가 가라앉자 기욤은 이제는 아내를 의심했다. 수도사로 변장한 기욤은 마틸드의 고해를 듣기로 했다. 고해성사를 통해 그녀가 잘못한 일이 없다는 판단이 들자 기욤은 변장한 모습을 벗어던지고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두 팔에 안겼다. 그 순간 그리무는 도망치고 말았다.


국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충성스러운 기마병들이 그 뒤를 쫓아 달려갔다. 반역자 그리무는 재빨리 도망쳐 어느새 플르시 소굴에 숨어 버렸다. 기마병들과 함께 기욤이 반역자를 추적해 간 길은 튀리 아르꾸흐 남단 오흔느 강 우안이었다. 도망자를 놓친 추적자들은 한 양치기 여자로부터 도망자가 오흔느 강에 걸쳐 있는 무스 다리 근처의 습지대를 가로질러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러자 기욤이 외쳤다.


“좋은 소식(Bonne nouvelle)이다! 저 언덕에 교회를 세울 것을 명하노라!”


기욤이 던진 말을 따서 지은 에쏭(Esson)에 위치한 본 누벨(Bonne nouvelle) 교회, 칼바도스(Calvados) 지방. © OREP.


어쩔 줄 모르고 도망치던 그리무는 곧 은신처에 도착하리라 생각했다. 아뿔싸! 그가 지나간 길에 풀들이 쓰러져 있는 것을 추적자들이 발견한 것이다. 도망자는 그가 탄 말 옆구리를 더 힘차게 찼지만, 기진맥진한 말은 곧 고꾸라지고 말았다.


습한 땅바닥에 나뒹군 도망자는 재빨리 일어나 가시금작화들 사이를 헤집고 덤불숲 한가운데를 향해 도망쳤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를 추격하던 병사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병사들은 그를 잡아 키 작은 떡갈나무 둥치에 그를 결박시키고는 나무 꼬챙이로 그의 살가죽을 벗겼다. 이 영혼에게 내려진 형벌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사형집행인들은 그의 사지를 네 마리 말에 묶은 뒤 말들을 네 방향으로 뛰게 만들어 그를 능지처참했다.


이야기는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리무의 몸에서 벗겨낸 살가죽으로 만들어진 말안장에 편안히 앉아 기욤이 캉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 기욤은 바이킹의 피가 흐르는 인물이 아닌가? 또한 기욤이 속죄하는 마음에서 지었다는 몽쇼베에 위치한 샤펠(성당) 오 꼬흐뉘는 이 같은 전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1]


물론 이는 14세기 때 기욤 사후에 기욤의 명성을 깎아내리기 위한 수단으로 꾸며진 것이다. 이야기의 실체가 불분명하지만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캉의 ‘싸늘한 거리’다. 거리 이름이 상징하는 바는 노르망디 공국의 섭정이었던 마틸드가 꼭 좋은 이미지만이 아니었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역사는 늘 영웅을 미화하지만 구전은 영웅에 대한 참모습을 되새기게 만든다.


역사 속 인물과 구전되는 인물을 우리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구별해야만 할까? 이것이 바로 이념화된 역사를 경계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인물에 대한 미화에 현혹되어서는 안 될 이유 또한 존재한다.


역사가들은 실증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구술해 가기를 의도하지만, 결국에는 사관을 가장한 이념에 자신도 모르게 매몰당하고 만다. 그래서 영웅 편을 들고 영웅의 참모습을 왜곡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틸드의 무덤을 바라보는 시선조차도 뜨거울 수만은 없다. 그녀에 대한 애도조차 마음 밖을 서걱대는 바람 소리처럼 들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마틸드의 묘석, 캉(Caen) 아베이 오담므(Abbaye aux Dame) 성삼위일체 성당. © OREP.


마틸드는 그녀에 대한 모든 논란을 뒤로 한 채, 캉에 소재한 수도원 성당의 성가대석에서 편히 쉬고 있다. 그녀의 검은 대리석 장례 석판에는 다음과 같은 라틴어 글귀가 새겨져 있다.


“EGREGIA PVLCHRI TEGIT HEC STRVCTVRA SEPVLCRI :

moribus insignem, germen regale, mathildem : D VX

FLANDRITA PATER HVIC EXTITIT, ADALA MATER : francorum

gentis rotberti filia regis :

ET SOROR HENRICI, REGALI SEDE POTITI :

regi magnifico willelmo ivncta marito : P RESENTEM

SEDEM, PRESENTEM FECIT ET EDEM :

tam mvltis terris qvam mvltis rebvs honestis : A

SE DITATAM SE PROCVRANTE DICATAM :

hec consolatrix inopvm, pietatis amatrix : GAZIS

DISPERSIS, PAVPER SIBI, DIVES EGENIS :

sic infinite petiit consortia vite :

IN PRIMA MENSIS, POST PRIMAM, LVCE NOVEMBRIS”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 아름답고도 놀라운 무덤의 묘비는

도덕적으로 인자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왕족 혈통의 마틸다가 잠든 묘를 가리킵니다.

그의 부친은 플랑드르의 지배자였습니다.

또한 그의 어머니 아델은 프랑크 왕국의 로베르 왕의 딸이었고

훗날 국왕의 자리에 오르는 앙리의 여동생이었습니다.

마틸드 그녀는 위대한 왕 기욤(윌리엄)과 결혼하여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지금의 수도원과 교회를 세웠으며,

그녀의 인자하고도 풍성한 봉헌으로 말미암은 보살핌 덕분에

많은 영예로운 것들과 많은 땅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 궁핍한 이들의 위로자,

사랑이 넘치는 신심,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이들을 위해

성당 전례 보물까지 아낌없이 희사함으로써

궁핍한 이들을 위해 헌신한 그녀는

황금 시간이 지난 11월 1일 새벽에

영생을 위한 영원한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1] 미셀 우흐께, 질르 피바흐, 장-프랑수아 세이에흐, 프랑스인 세 사람이 써 내려간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서, 정복왕 기욤(Le conquérant Guillaume)』, 오렢(OREP) 출판사. 파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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