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욤이 잠든 아베이 오좀므

몽생미셸 가는 길 217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기욤이 잠들어 있는 생테티엔느 성당


정복왕 기욤(윌리엄)의 대서사를 답사하기 위한 시도는 2019년 유월에 시작되었다. 나는 지금도 그걸 우연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2024년 12월 오늘에 와서야 생각해 보니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여행길은 안개 자욱한 밀밭 한가운데 한없이 이어진 트랙터가 지나간 흔적과도 같다.


끝나지 않을 답사길은 안개 자욱한 밀밭 한가운데 한없이 이어진 트랙터가 지나간 흔적과도 같다.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유월의 찬란한 햇살은 비에 꺾여 색이 바랬다가 오후가 되면서 다시 청명한 하늘 아래 눈부시게 빛날 뿐이다. 근 5년간 계속되어 온 답사와 글쓰기도 그와 같이 우중충한 날씨와 화사한 유월 햇살을 갈마들고 있다. 밀밭 한가운데로 한없이 빨려 들어간 트랙터 커다란 바퀴자국은, 그 흔적은 내게 여행을 통한 글쓰기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냉혹하게 되새기게 만든 셈이다.


여행 중에 병행하여 틈틈이 네덜란드의 작가 세스 노터봄의 『산티아고 가는 길』을 다시 읽어가면서 그만의 빛나는 시적 표현이나 모래 사이 반짝이는 보석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돌처럼 섬광을 발하는 옥돌과도 같이 종횡무진 행간을 누비는 어휘의 행렬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곤 했다.


나의 『몽생미셸 가는 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세스 노터봄이란 네덜란드 작가가 아니었다면 쉽게 그와 같은 길에 들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산티아고 가는 길』은 내게 있어서 스페인에 관한 역사책이자 성당이자 박물관이었다. 더군다나 영원히 변치 않을!


세스 노터봄의 책은 단숨에 읽어가기에 쉽지 않은 글이다. 천 년 동안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문학의 힘을 빌려 써 내려간 글이기 때문이다. 베네딕도가 어찌했고 로마네스크의 세계가 어떠했으며, 수르바란이 어찌했고 벨라스케즈, 엘 그레코, 고야가 어떤 그림을 그렸고 스페인의 고토 회복운동은 어찌어찌해서 일어났고 필립보 2세와 3세 그리고 4세 국왕으로부터 빚어진 정치, 사회, 문화의 기현상 등, 더하여 현대에 와서 프랑코의 철권통치가 가져온 폐해, 스페인 내전의 참상,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로부터 성서의 기호학자인 움베르토 에코에 이르기까지,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의 아라베스크 문양에서 톨레도 대성당 기둥머리에 새겨진 형상들을 거쳐 피레네산맥 기슭에 자리한 고색창연한 수도원 돌기둥에 이르는 그 길은 아득하고도 무성한 기호와 상징의 숲을 그것도 통째로 건너뛰고 있다. 성서적 상징과 기호의 숲 가장자리에 자리한 로마네스크 성당 제단 위 궁륭마다 새겨진 천장화들은 또 어떠한가? 그의 책은 내게 로마네스크 시대로 가는 길을 일러주는 나침반과도 같았다.


그걸 어찌 다 재현할 수 있으랴. 궁극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였지만, 그의 발걸음은 지금도 스페인의 들판을 정처 없이 걸어가고만 있을 우리네 청춘 남녀의 발자국과는 다르며, 돌길에 새겨진 그만의 어휘나 문장도 순례자가 등에 매단 바랑의 너덜거림과는 격이 다르다. 누군가는 ‘결이 다르다’란 말을 항용 차용한다. 매스미디어의 이 천박한 용어를 함부로 갖다 붙이는 이런 못된 버릇이 글쓰기를 좀먹고 있다. 정신의 피폐함은 말장난이 난무하는 속어의 비현실적 감상에서 기인한다. 참고 참았던 말을 덧붙이자면, 인간이 생선인가? 인간의 말이나 글이 생선 비늘인가? 결이 다르다 말하게?


나는 그에 대해 격분했기에 통속적인 여행을 멈춰버렸다. 그리고 노르망디에 빠져들었다. 2차 세계대전의 상륙작전의 지명만이 아닌 노르망디의 실체를 직접 느끼면서 그 끝까지 걸어가는 집요함을 내 스스로 진행시키고자 작정했던 것이다. 그것만이 나 역시도 역사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길이요, 세계시민의 이름으로 인류의 한 명이 될 수 있는 길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이제 더없는 동반자가 된 아내와 손잡고 걸어가는 길이 전혀 낯설지가 않다. 나는 이러리라고 미리 짐작했었다. 속내는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을 길을 계속 걸어가라고 일러준다. 그렇다. 이 길도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다. 그 끝에서 나는 또 어떤 생각에 빠져들지 지금의 나로서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정복왕 기욤에 관한 역사서는 차고 넘친다. 대략 간추려만 봐도 다음과 같다.


1. 부야르 드 미셀(BOÜARD [DE] Michel), 『정복왕 기욤(Guillaume le Conquérant)』, 화야르(Fayard), 1984.


2. 부에 피에르(BOUET Pierre), 『헤이스팅스, 1066년 10월 14일(Hastings, 14 octobre 1066)』, 탈랑디에(Tallandier), 2010.


3. 부에 피에르(BOUET Pierre) & 느뵈 프랑수아(NEVEUX François), 『11세기의 노르망디 주교들(Les Évêques normands du XIe siècle)』, 1993년 10월 3일 자 세리지 라살 심포지엄, 캉 대학출판사, 1995.


4. 부에 피에르(BOUET Pierre), 가조 베로니크(GAZEAU Véronique) & 바트 다비드(BATES David; 서문) 『중세 시대의 노르망디와 영국(La Normandie et l’Angleterre au Moyen Âge)』, 2001년 10월 4-7일 세리지 라살 심포지엄, CRAHM 출판사, 2003.


5. 부에 피에르(BOUET Pierre) & 느뵈 프랑수아(NEVEUX François), 『바이외의 자수(La Tapisserie de Bayeux)』, 우에스트 프랑스(Ouest-France) 출판사, 2013.


6. 우르께 미셸(HOURQUET Michel), 피바르 질(PIVARD Gilles) & 세이에르 장-프랑수아(SEHIER Jean-François), 『정복왕 기욤의 발자취를 따라(En chemin avec Guillaume le Conquérant)』, 우에스트 프랑스(Ouest-France) 출판사, 2003.


7. 위베르 마들렌느(HUBERT Madeleine), 『사생아 기욤의 경이로운 말 탄 채로의 질주(La Grande chevauchée de Guillaume le Bâtard)』, 꼬흘레(Corlet), 1987.


8. 위베르 마들렌느(HUBERT Madeleine), 『왕위의 재탈환(À la reconquête d’un trône)』, 꼬흘레(Corlet), 1992.


9. 주에 로제흐(JOUET Roger), 『노르망디는 어떻게 프랑스 영토가 되었나(La Normandie devint française)』, 오렢(OREP), 2004.


10. 주에 로제흐(JOUET Roger), 『노르망디 역사(Histoire de la Normandie)』, 오렢(OREP), 2009.


11. 라 바랑드 드 장(LA VARENDE [DE] Jean), 『사생아 정복왕 기욤(Guillaume, le bâtard conquérant)』, 프랑스 애서가(愛書家) 연합, 1946.


12. 르그로 위게뜨(LEGROS Huguette), 『도전에 직면한 정복왕 기욤(Guillaume le Conquérant face aux défis)』, 2005년 디브 쉬흐 메흐 심포지엄, 파라딤므(Paradigme), 2008.


13. 모리스 필립(MAURICE Philippe), 『정복왕 기욤(Guillaume le Conquérant)』, 플라마리옹(Flammarion), 2002.


14. 느뵈 프랑수아(NEVEUX François), 『10-11세기 국왕들에게 심각한 위협 요소였던 노르망디 공작들(La Normandie des ducs aux rois Xe-XIIe siècle)』, 우에스트 프랑스(Ouest-France) 대학출판사, 1998.


15. 느뵈 프랑수아(NEVEUX François) & 뤼엘르 클레흐(RUELLE Claire), 『정복왕 기욤, 영국을 정벌한 사생아(Guillaume le Conquérant, Le bâtard qui s’empara de l’Angleterre)』, 우에스트 프랑스(Ouest-France) 출판사, 2013.


16. 쥠또르 폴(ZUMTHOR Paul), 『정복왕 기욤(Guillaume le Conquérant)』, 탈랑디에(Tallandier), 2003.


이 많은 책을 언제 다 읽느냐 핀잔할 사람이 많다. 하지만 책을 정말 많이 읽는 사람들이 있다. 출판인과 출판사에서 원고 교정을 보는 이들과 죽자 살자 서평을 다는 이들이다. 그들만큼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지금으로서는 적어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러나 이들의 책에 대한 심미안이 정독을 압도할 만큼 출중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어떤 책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문제는 21세기인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20세기 우리는 책의 홍수 속에서 살았다. 21세기 지금에는 인터넷 영상에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다. 이른바 유튜브 채널에 손상당한 우리의 시력은 20세기 좌우 대립의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궤멸했던 보수와 진보의 가치만큼이나 회복 불가능하다.


책은 말한다.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종이책은 작가가 말하는 하나의 소통 수단이요, 통로다. 전자책 출판의 플랫폼이 이를 못 따라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작가의 말이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화려한 수사와 그럴듯한 사진과 그림들이 난무하는 전자책에는 작가의 진솔한 목소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인생은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럴 정도가 되면 깨달음의 경지에 올라서야 한다. 그 세계의 깨달음을 획득한 작가의 진솔한 목소리를 듣는 종이책으로의 회귀가 더 그리워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전기를 발명한 에디슨은 영화의 시대를 예견했고, 아이폰을 개발한 스티브 잡스는 유튜브 시대를 예견했겠지만, 움베르토 에코는 베스트셀러의 홍수 속에 살아남을 역사적 사건들을 다룬 책들을 예시했다. 나아가 세스 노터봄은 영원히 변치 않을 역사 교과서는 성당, 박물관 그리고 책이라고까지 단언했다.


각설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마틸드의 무덤을 뒤로하고 기욤의 무덤을 찾아가는 순례는 계속되었다. 2019년 유월 금방 어두워질 것 같은 흐릿한 날씨 탓에 마음은 조급해지고 운전대를 잡은 손은 자꾸만 구시가지의 골목길을 헛돈다. 그때마다 아내가 조급증을 잠재우는 말 한마디로 심란한 맘을 잠재운다. “유월인데 벌써 해가 지려구.” 그렇다! 아내가 이야기한 것처럼 어두워지려면 아직도 멀었다. 아직 점심도 들지 못한 상태가 아닌가? 그런데 왜 이 골목길은 이토록 조용하기만 한가? 하고 들어선 골목길이 기욤이 완성한 아베이 오좀므 생테티엔느(성 스테파노) 성당 앞 광장 들머리였다. 다행이다 싶어 차를 주차시키고는 바라보았다.


Abbay aux Hommes 2 - 복사본.jpg 종탑이 높고 건물의 몸체가 육중하다 보니 입구 정중앙 문조차 왜소해 보였다. 캉(Caen) 생테티엔느 성당 서쪽 정문 입구.


성당은 참으로 기막힌 곳에 서있었다. 골목길 주상복합건물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아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없었기에 망정이지 멀리서부터 보였다면 놀라움에 뒤섞인 경이로움은 그만큼 감소했을 것이다.


차를 주차시키고 걸어가면서 바라본 생테티엔느 성당. 주상복합건물들에 가려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이 거대한 성당의 파사드(정면 부분)는 눈여겨 로마네스크 성당들을 찾아다닌 나에게조차도 당장의 시선을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하다. 하지만 입구 3개 나란히 나있는 문들은 거대한 2개의 종탑과 묵직한 건물의 몸체를 못 이긴 채 짜부라질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 3개의 문도 나있다기보다는 뚫려있다는 표현이 더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언뜻 보아서는 입구조차 알아볼 수 없는 서쪽 파사드.
두 종탑과 3층으로 설계된 노르망디 로마네스크 건축물의 몸체는 앞으로 이어질 고딕과는 상관없이 초라하고 단순한 3개의 문들을 만들어냈다.


사진 한 컷만을 찍고 말없이 아내의 손을 잡고 성당 안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기욤의 묘는 저 제단 뒤쪽이리라 미리 짐작했기에 중앙 회중석을 성큼성큼 가로질러갔다. 그러자 좌우 측랑 벽 높이로 나있는 유리창들이 일제히 햇살에 맞춰 노래를 불러댔다.


기둥들이 귓밥 가득 속삭이던 마틸드의 성삼위일체 성당에서의 느낌과는 또 다른 것이 귀를 어지럽히는 천상의 멜로디는 과연 무얼 합창하고 있는 걸까 한참을 귀 기울여 보아도 그 뜻 모를 속내의 상징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기야 돌팔이 신자 같은 내게 기독교적 상징이 쉽게 눈에 들이차랴만, 마음을 비우고 겸손해지다 보니 그제서야 돌기둥들이 내게 인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노르망디 인들이 발명해 낸 채광탑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고 있자니 수도사야말로 중세 시대 가장 탁월한 건축가였다는 사실에 자연 수긍하고 만다.


제단 쪽으로 다가간다. 기욤의 무덤을 찾는 것만이 급선무였던 내게 기욤이 잠들어있는 돌무덤은 아주 덤덤한 형상으로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그때의 감정은 놀라움, 경이라기보다는 아주 담담한 심정에서 흘러나온 탄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 여기 잠들어 있구나. 세기의 영웅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중얼거림은 돌기둥사이를 맴돌았다. 중얼거림은 바야흐로 거의 탄식에 가까운 음조를 띠기까지 했다.


묘비명에는 라틴어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1087년 노르망디 공작이자 영국 국왕이었던 정복왕 기욤(윌리엄)이 여기 잠들다.”


새하얀 아이보리 계통의 석회암 무덤 묘석은 기욤의 무덤을 기리고 있는 유일한 흔적이다. 석판에는 “기욤 여기 잠들다”라는 상투적인 비문이 적혀 있다. 분명 그의 무덤은 어느 시기인가 파헤처져 다시 조성한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이념이 서로 격돌하던 중세나 근세의 어느 시기이건, 아니면 전쟁통에 그리되었건 간에 기욤의 묘는 파헤처져 다시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도굴범의 소행일 수도 있다. 두 왕국을 지배했던 국왕의 묘이다 보니 뭔가 특별한 보물이 있을 것이라 지레 짐작한 도굴범들이 국왕의 석관묘를 금 가게 하고 파헤친 것이리라. 그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는 것은 역사가의 임무다. 여행자인 나는, 글쟁이인 나는 그보다는 기욤이 왜 여기 묻혔느냐가 더 중요한 관건이지 않겠는가?


기욤은 자신이 지배했던 영국 땅에 묻힐 수도 있었다. 그가 점령한 잉글랜드의 상징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힐 법도 한 일이었다. 바이킹이 후손으로서 어디에 묻힌 들 그게 뭔 대수랴! 하지만 그는 노르망디의, 한국인들에게는 전혀 낯설 뿐인 캉(Caen)이라는 도시의 성당에 묻혔다. 왜? 무슨 연유로?


그의 무덤이 있는 생테티엔느(성 스테파노) 성당은 1063년 공사가 시작되었다. 베네딕도 수도원 성당으로 소박하고 검소해야만 했지만,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태생의 수도사 랑프랑크가 베크 수도원장으로 있을 때 수도원들을 개혁한 기욤은 베크 수도원장이었던 랑프랑크를 캉 수도원장으로 임명한 뒤 곧바로 자신의 보속을 위한 성당 건립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이 이탈리아 출신의 수도원장은 북부 이탈리아에서나 볼 수 있는 바실리카 양식으로 화려하고도 웅장한 종교 건축물을 의도하였다. 그 막대한 공사대금은 차차 영국 정벌의 대가로 주어질 것이었다. 인근의 석회암 채석장 역시 중요한 몫을 다했음은 물론, 이미 이탈리아 바실리카 양식에 흠씬 물들어 있던 유능한 건축가들이자 수도사들이 캉의 수도원을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여러 면에서 이 성당이 중요성을 띠는 이유는 기욤 자신을 위한 수도원 건립의 첫걸음이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미 마틸드를 위한 성삼위일체 성당이 착공되었고 이어 자신을 위한 자신만의 성당 공사를 지켜보면서 기욤은 아낌없는 지원을 베풀었다.


1058년은 기욤이 캉으로 공국의 수도를 정한 해다. 앞으로 10여 년간의 프랑크 왕국과의 끊임없는 교전 끝에 마침내 노르망디 공국의 경계를 확정 지은 기욤은 캉을 수도로 정하고 이곳에 수도원을 건립하고 1063년 마침내 생테티엔느(성 스테파노) 성당 공사의 첫 삽을 뜬다. 1077년에 완성된 성당은 따라서 노르망디 공국의 상징이자 염원이며 번영을 뜻한다.


생테티엔느 성당 뒷모습. 성당은 1063년에 착공하여 1077년 기욤과 마틸드가 참석한 가운데 완공되었다.


생테티엔느 성당은 아베 오좀므(Abbaye aux hommes) 수도원 교회로서 베네딕도 수도사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1063년 수도원장이었던 랑프랑크의 감독 하에 캉에서 채석한 돌로 지어졌다. 1077년 완공 당시 기욤과 마틸드, 그리고 출자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헌당식이 거행되었다.


교회 정면부와 중앙 회중석은 건축물 가운데 가장 먼저 지어졌다. 12세기에 나무 뼈대를 만들어 세우고 그 위에 여섯 부분으로 나뉜 둥근 천장을 올렸다. 탑 꼭대기 화살 모양의 덮개는 13세기에 들어와서 완성한 것이다.


로마네스크 풍의 중앙회중석 회랑은 3층 구조로 나뉘어 있는데, 13세기 고딕 양식으로 지은 내진까지 쭉 연결되어 있다. 백년전쟁과 종교전쟁으로 인해 참화를 겪었지만, 17세기 초에 복원되었다. 대혁명 이후로 교회 예산이 줄어들어 1802년부터는 미사를 집전하는 장소로만 사용하고 있다.


1944년 연합군 공습이 한창이던 때에 성당은 캉 시민들의 방공호로 사용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성당 내부 성기-제의실에는 흥미롭게도 수염 난 기욤의 초상화가 소장되어 있으며, 교회 내진 안쪽에는 공작-국왕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기욤의 초상화(생테티엔느 성기-제의실 소장)는 1522년 기욤의 유해에 대한 발굴 작업 때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들이 전하는 기욤의 초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1522년 교황의 특사는 생테티엔느 수도원장에게 기욤의 관을 열어봤으면 좋겠노라고 요청했다. 아마도 시성식을 염두에 둔 행보였던 것 같다. 얼굴을 확실히 알아보기에는 역부족이었겠지만, 말라비틀어졌을 시신이 그래도 보존 상태가 양호해서 초상화를 그리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던 것 같다.


1708년에 제작한 이 초상화 사본은 생테티엔느 성당 성기-제의실에 소장되어 있다. 초상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공작-국왕은 16세기 때 유행하던 복장을 하고 있다. 아마도 기욤의 실제 얼굴에 제일 근접한 초상화라 할 것이다. 물론 또 다른 복제화도 무수히 존재한다.


1562년 종교개혁에 따른 신교도들의 창궐은 공작-국왕의 묘지에도 그 손길이 닿았다. 이때 무덤 속에서 좌측 대퇴골만이 발견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기간 동안에는 석관을 깨트리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국왕의 유골은 건드리지 않았다.


1983년 발굴 작업이 새롭게 추진되었다. 근육이 붙어있다고 생각한다면, 유골의 상태는 아주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를 연상케 할 정도로 이 영원한 기사와 연관 짓는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공작-국왕의 신장은 1미터 73으로 당시 보통 키보다는 큰 편에 속했다.


국왕의 대퇴부 유골은 성당 내진 한가운데에 대리석으로 된 석판 아래 다시 놓였다. 대리석판에는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적혀 있다. “노르망디 공작이자 영국 국왕이었던 정복왕 기욤(윌리엄)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기 잠들어 있다. 수도원을 설립한 그는 1087년에 사망했다.” [1]


자 이제부터는 기욤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여 생테티엔느 성당에 묻혔는지에 대한 서사를 되짚어 볼 때가 되었다. 사가들은 한결같이 흑사병이 돌아 마틸드가 죽자 삶의 모든 기쁨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외롭고 쓸쓸했던 기욤이 결국 영국을 떠나 노르망디로 오면서 서서히 죽음에 이르렀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 중요한 사건 두 가지를 더하면, 영국에서 기욤(윌리엄 1세)은 이미 아들 로베르(꾸흐뜨외즈)의 반발에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아들이어서 그냥 내칠 수만은 없었던 것이 중간에 마틸드가 있었던 탓이다. 그러나 마틸드가 죽으면서 아들과의 싸움은 점입가경이 되었다. 자식이 아니라 웬수였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프랑크 국왕이 호시탐탐 노르망디 공국을 넘보고 있었다. 그냥 방치하면 공국의 수도 캉에까지 프랑스 군대가 물밀듯 쳐들어올 것은 뻔한 이치였다. 그런 탓에 기욤은 어쩔 수 없이 노르망디로 향하게 된다. 다시는 영국 땅을 밟을 수 없는 바닷길을 건너고야 만 것이다.


역사서는 그때의 상황을 흥미롭게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영국에서의 마지막 반란은 진압되었고, 웨일스 지역엔 평화가 찾아왔다. 노르망디 공작이자 영국 국왕은 절대 군주였다. 아뿔싸! 치하 말기에 찾아온 불운이 그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2]



죽음과 애도



기욤의 딸 아델리즈는 헤럴드의 약혼녀였지만, 헤럴드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사망하자 모든 청혼을 거부한 채 살다가 그녀 역시 1073년에 죽었다. 블루아의 백작부인 아델은 과부가 되어 수도원에 들어갔다. 세실 역시 캉에 소재한 아베이 오담므의 수녀가 되었다.


네 아들 가운데 둘째였던 리샤르는 1075년 사냥을 하다가 사고로 죽었다. 장남 로베르는 꾸흐뜨외즈(짧은 넓적다리 또는 짧은 장화)라 불렸는데, 전투에서는 용감했지만, 경솔하고도 방탕한 기질 때문에 아버지에게는 항상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다.


첫 번째 충돌이 1077년에 발생했다. 로베르는 형제들과의 진부한 논쟁 끝에 아버지에게 뻔뻔하게 대놓고 노르망디를 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잠잘 때만 옷을 벗는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같이 응수했다.


로베르는 이탈리아에다 피신처를 구하고 프랑스 왕 필리프 1세에게 다가갔다. 아버지와 아들은 제르브루아에서 손에 검을 쥐고 대결했다. 공작이자 국왕인 아버지가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마틸드는 빼앗긴 아들을 되찾기 위해 구원을 요청했다. 기욤은 이 사실을 알고 격분했다.


1083년 10월 캉에 흑사병이 돌아 도시를 온통 죽음의 도시로 만들었다. 마틸드 또한 흑사병에 걸려 같은 해 11월 1일 죽음에 이르렀다. 그녀의 시신은 아베이 오담므의 성삼위일체 성당에 안장되었다.


슬픔이 가득한 가운데 늙고 고독한 사자는 장남인 로베르(꾸흐뜨외즈)와 화해했다. 영국에서도 애도의 송사가 도착했다. 그러나 마틸드의 죽음은 인생의 좌절과도 같은 것이었을 따름이다. 기욤은 거의 홀로 남겨진 인간이 되었다. 이제 그의 곁에 유일하게 남은 충신은 로제흐 드 몽고메리와 로제흐 드 보몽뿐이었다.


마틸드의 무덤, 아베이 오담므(Abbaye aux Dames) 성삼위일체 성당, 캉(Caen), 칼바도스(Calvados) 도(道).


마틸드는 1083년에 사망했다. 그녀의 시신은 그녀가 캉에 설립한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그녀의 무덤 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그녀는 이제 영원한 삶의 거처를 구하였노라. 11월 초하루 첫 시에 이런 곡절을 적어 가노라.”



오동의 배반



영국 정복을 끝내자마자 기욤은 아버지가 다른 형제였던 오동에게 주교로서의 막대한 권한을 부여하고, 이에 따른 재물도 하사했다. 오동은 영국 남부의 수도였던 켄트 백작이 되었다. 또한 그에게는 권력서열 두 번째인 국왕 다음가는 지위가 수여되었다.


1070년 오동은 영광의 정점에 섰다. 공작이자 국왕이었던 기욤(윌리엄)이 캉에 있는 수도원을 생테티엔느(성 스테파노)라 명명하고, 랑프랑크는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영국의 대주교가 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오동은 깜짝 놀라 반역을 모의하고 추기경들의 협조를 구했으며, 로베르 꾸흐뜨외즈로 하여금 반란을 획책하게 사주했다. 그는 교황을 꿈꾼 것인가? 런던의 이인자이기보다는 로마의 일인자가 되는 것이 그에게는 더 위로가 되는 일이었는가?


1082년 이 고위 성직자가 그를 따르는 신하들과 부르주아들과 함께 위트 섬에서 로마를 향해 출발하는 배에 승선하려는 찰나 기욤이 불쑥 나타나 그를 포박했다. 기욤은 “아! 고통이 가슴을 짓누르는구나. 나는 성직자나 주교에게는 죄를 묻지는 않겠다만, 켄트의 백작 작위는 박탈하겠다.”


반역죄로 오동은 루앙에 5년간 투옥되었다. 1087년 기욤은 죽어가면서 그를 풀어주었다. 그러나 결코 그를 용서하지는 않았다. 절대 교화될 수 없는 주교는 이와 반대로 새로운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군종 주교 오동(Odon)이 감옥에서 나온 직후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 오동은 새로운 정치적 야망으로 인해 그 모든 것을 탕진해 버리고 만다. 바이외 시 – 옛 주교 궁 소장.



최후의 전투



1086년 기욤은 노르망디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는 망슈 저 너머 바다 건너의 왕국에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었다.


1087년 그는 루앙에서 병에 걸렸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프랑스 왕은 “거구가 애를 낳다 몸져누웠나?”라고 빈정거렸다. 아직도 원기왕성하고 만사에 정통한 기욤은 펄쩍 뛰었다. “하느님의 광채로 일어나 산후 산모 감사 미사에 참석하여 감사의 뜻으로 십만 개의 양초를 봉헌하겠노라.”


1087년 여름 “기욤은 평원에서 너무도 어이없는 죽음에 직면하고 만다.” 그는 프랑스의 백쌍 지역으로 침입했다. 그리고 망트 수비대를 쑥대밭을 만들고 도시를 불 질렀다. “(…) 엄청나게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다. 국왕은 손에 검을 쥐고 있었다. 살이 쪘고 육중했으며, 나이 들어 보였다 (…) 그는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배에서는 기름이 흘러나왔고 돌연히 몸에 참기 어려운 통증을 느꼈다.” (여기까지는 중세사가 브누아가 전하는 말). 사가 바스의 말을 빌자면, “기욤이 올라탄 말이 활활 타오르는 재에 두 발이 닿자마자 돌연 앞발을 들고 뒷발로 일어섰다. 그러자 말안장 툭 튀어나온 부분이 국왕의 배를 찔러 상처가 났다.” 루앙으로 돌아오자마자 기욤은 병에 걸려 자리에 누웠다. 상태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도시 바깥 생제르베 수도원으로 그를 실어 날랐다. 죽을 때까지 명석했던 그는 자신의 의향을 털어놓았다. 그가 누워있는 침상의 머리맡으로 오는 것을 거부한 로베르에게 공작령을 하사했다. 막내 기욤 르후는 영국의 상속자가 되었다. 아직 어린 앙리는 5천 리브르(파운드)를 받고 자족해야만 했다. 1087년 9월 9일 목요일 아침 주교좌 대성당의 종들이 일제히 울려 퍼졌다. 영국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인 정복왕 기욤은 그의 영혼을 하느님께 맡겼다. 그리고 숨을 거뒀다. 향년 60세였다. [3]


생제르베 수도원 지하교회, 루앙, 센 마리팀므 지방. 망트 전투에서 부상당한 기욤은 루앙의 생제르베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지하교회는 수도원 유일의 유적이다.



희한한 장례식



도시 전체가 술렁거렸다. 어느 누구도 기욤의 시신을 거두려 하지 않았다. 오직 성직자 한 사람만이 선왕의 죽음을 애도하러 찾아왔을 뿐이다. 생전에 캉의 생테티엔느 성당에 묻히기를 희망했던 국왕의 유언대로 시신을 옮기기 위해 향료를 뿌리는 순간에도 이를 운구하겠다는 어떤 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 일을 맡은 사람은 오직 기마병 한 사람뿐이었다. 시신은 염포로 둘러싸는 대신 쇠가죽으로 둘둘 말아 캉으로 가는 배에 실었다.


중세사가 브누아가 명쾌하게 이 순간을 부연 설명하고 있다. “그가 통치했던 모든 땅과 이 지구상에 그가 소유했던 모든 영토조차도 이제는 아주 조금밖에 남아있질 않다. 그 규모에 대해서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그에게는 도마뱀이 기어다니고 구더기가 우글거리는 오직 누울 자리와 등을 대고 잠들 공간만이 필요하다. 세상의 즐거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샘물에서 이는 물거품처럼. 즐거움은 곧 끝나버리고 재빨리 사라진다.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너무나 유약하기만 하다. 모든 것은 소멸하고 사라질 따름이다.”


사생아는 정복왕이었다. 게다가 시대가 낳은 전설 속의 영웅이었다. 그의 장례식은 상궤를 벗어난 것이었다. 생테티엔느 수도원장과 군중들이 선왕의 시신 앞에 모여들었을 때 캉에 화재가 발생했다. “사람들이 불을 끄기도 전에 이미 도시의 반 이상이 불에 타버렸다.”(중세사가 브누아). “모여든 모든 사람들이 불을 끄러 간 사이 남아있던 수사들이 장례식을 이어갔고, 수도원 교회에 옮겨진 국왕의 시신 앞에서 시편을 노래했다.”(중세사가 오흐데리크 비탈).


노르망디 공작이자 영국 국왕인 정복왕 기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기 잠들어 있다. 수도원을 설립한 그는 1087년에 사망했다.


장례식에는 아들 가운데 앙리만이 유일하게 참석했다. 앙리는 고위 성직자들과 남작들 옆에 앉았다. 아슬랭이란 어떤 여자가 갑자기 나타나 장례식을 중단시켰다. 그러고는 수도원 땅이 그녀의 아버지에게 이제까지 어떤 보상도 해주지 않았다고 외쳤다. 브누아의 말을 빌면, 주교들은 곧바로 그녀에게 지불했으며, 그러고 난 뒤 장례식을 마칠 수 있었다.


오흐데리크 비탈의 글은 너무 장황해서 사실 여부를 따지기가 곤란하지만, 신앙심에 고취 받은 글이라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이어가기를,


“관 속에 시신을 봉안할 때 시신을 구부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관이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결국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배가 터졌다. 그러자 참을 수 없으리만큼 악취가 코를 찔렀다.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먼저 코를 틀어막고 나중에는 군중 전체가 코를 막았다. 향을 태운 연기와 또 다른 향료를 시신 위에 충분히 뿌려댔지만, 지독한 냄새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신부들이 장례식을 서둘러 끝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어지는 공포 속에 그들은 재빨리 처소로 돌아갈 궁리만 했다.” [4]


수도사들은 온데 간데없고 현재 옛 수도원 건물은 캉(Caen) 시청사로 사용하고 있다.






[1] 미셀 우흐께, 질르 피바흐, 장-프랑수아 세이에흐, 이 세 사람이 풀어간 역사 기행서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서, 정복왕 기욤』, 오렢 출판사, 파리.


[2] 위의 책 참조.


[3] 같은 책 참조.


[4] 같은 책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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