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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탕탱에 관한 짧은 역사

몽생미셸 가는 길 245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장 프랑수아 밀레가 그린 코탕탱 풍경



코탕탱(Cotentin)은 노르망디 북서쪽 망슈 해협 인근에 위치한 프랑스 반도로 로마와 중세 시대의 고대 파구스 콘스탄티엔시스(Pagus Constantiensis)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자연 지역은 꾸땅스(Coutances) 마을의 이름을 딴 것으로, 중세 작가 바스(Wace)가 그의 소설 『루의 이야기(Histoire de Rou)』에서 사용한 오래된 철자 코스텐틴(Costentin)에서 유래했다.


아흐모리캉 산악지대(Armorican Massif)의 일부에 속하는 코탕탱은 비르(Vire) 강어귀에서 패션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태어난 그랑빌(Granville) 남쪽의 타르(Thar) 입구까지 뻗어 있다. 남쪽으로는 몽생미셸과 인접한 아브랑슈(Avranches)란 도시가 있고 동쪽으로는 베셍(Bessin) 지역이 널따랗게 포진해 있다.



코탕탱과 코탕탱 반도



소맷자락 같다 하여 망슈(Manche)라 이름 붙은 영국과 프랑스 간의 해협은 전통적으로 서부, 중부 및 동부 해협의 세 가지 주요 구역으로 나뉜다.


습지가 개발되기 전 코탕탱의 북부는 거의 섬이었다. 두브 강을 끼고 있는 습지대(Marais de la Douve : 코탕탱 및 베셍 마흐슈(Bessin Marshes)의 지역 자연공원)에 의해 본토와 분리되어 있으며, 레세(Lessay) 황무지인 습지로 둘러싸인 만(灣)과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물에 떠 있는 문(또는 조수를 조절하기 위한 문) 덕분에 베 만(Baie des Veys)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동쪽 해안의 베 만에서 코탕탱 반도가 분명해진다. 코탕탱은 지리적으로 노르망디와 브르타뉴의 경계에 위치한 항구 도시 생말로(Saint Malo) 만과 망슈 해협 및 세느 만과 인접해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코탕탱의 경계는 진화해 왔다. 코탕탱이란 첫 번째 지명은 그 이름을 부여한 교구의 수도 꾸땅스(Coutances)가 속해 있는 지방 영주의 영토를 가리킨다. 11세기부터 코탕탱(Cotentin)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바다로 북쪽, 서쪽 및 동쪽으로 경계를 이루고 베(Veys) 만에서 시작하여 1789년까지 반도의 영토에 해당하는 두브(Douve)와 시에(Scye)의 물줄기를 따라 형성된 남쪽으로 꾸땅스 교구의 북부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었다.


코탕탱의 대주교는 꾸땅스(Coutances)의 대주교와는 확실히 다르다. 1204년부터 코탕탱의 벨리위크(bailiwick)는 아브랑생(Avranchin)과 발 드 모흐탱(Val de Mortain)이 코탕탱의 그랑 벨리위크(Grand Bailiwick)에서 루이 9세에 의해 합병되기 이전부터 꾸땅스 교구를 이루고 있었으며, 샤를 5세와 같은 국왕은 리지유(Lisieux), 바이유(Bayeux) 및 세(Sées) 교구를 연이어 확장해 간다.


코탕탱 앞바다의 섬들은 점차 프랑스 본토로부터 분리되었다. 지도 사진은 장 르노 『바이킹이 이룩한 노르망디 왕국(La Normandie des Vikings)』에서 인용.


코탕탱 반도는 비르(Vire) 강어귀와 애(Ay) 입구 사이에 뻗어 있으며, 반도를 형성하고 망슈(Manche)해협 북부를 이룬다. 동쪽의 베셍, 비로이스 보카주, 남쪽과 서쪽의 아브랑생, 서쪽과 북쪽 그리고 북동쪽의 망슈 해협으로 둘러싸여 있다. 서쪽으로 섬 해안은 영국의 채널 제도와 쇼세(Chausey) 섬 지역을 마주하고 있으며, 카흐트레(Carteret)와 그랑빌(Granville)에서 페리호가 운행하고 있다.


그랑빌(Granville) 맞은편에 자리한 쇼세 섬은 코탕탱의 일부에 속한다. 라즈 블랑샤르(Raz Blanchard)는 라 아그 곶(Cap de la Hague)과 알데흐네(Alderney) 섬, 데훗뜨(Déroute) 통로, 레 아브르(Les Havres) 해안 및 영국령 섬인 저지(Jersey) 섬과 분리되어 있다.


르 그레니께(Le Gréniquet) 앞바다로 해가 진다.


반도는 서쪽, 북쪽 및 동쪽 바다로 명확하게 둘러싸여 있으며, 남동쪽에는 넓은 범람원 습지가 자리한다. 따라서 노르망디의 나머지 부분과 남동쪽으로 코탕탱의 최북단을 단절시키는 습지대로 인해 겨울에 반도에 접근하기가 어렵고 현대에 와서 도로가 건설될 때까지 역사서에서조차 코탕탱 반도는 섬으로 언급되어 왔다.


비르(Vire) 강이 베(Vey) 만을 통과하면, 코탕탱은 우브(Ouve) 또는 두브(Douve) 강과 광대한 습지가 나타난다. 1925년까지 13세기부터 14세기까지의 중세 바스티유는 뵈즈빌 라 바스티유(Beuzeville la Bastille) 마을에서 반도의 북쪽과 서쪽으로의 통로 그 한복판에 위치했다.


훨씬 더 고대에는 꺄항탕(Carentan) 항구와 바이 항구(Port Bail)를 연결하는 돌길이 가로질러 나 있었고, 드 제흐빌(De Gerville)은 19세기까지 존재했음을 고고학 발굴에 의해 증명되었다.


코탕탱의 기후는 해양성 기후에 적합한 기후다. 겨울은 온화하고 습하며, 여름은 온화한 것이 특징이다. 1월 평균 기온은 3C와 7C, 8월 평균 기온은 14C와 22C 사이를 오르내린다. 강우량은 내륙에서 더 높으며 서리가 내리는 날과 연중 기온 범위도 높다. 마지막으로 눈은 매년 겨울에 체계적으로 내리지는 않지만, 등온 효과로 인해 가끔 폭설이 내리는 경우도 있다.



영토



가장 넓은 정의의 코탕탱(Cotentin)은 망슈(Manche) 지역 부서의 북부 3분의 2, 남부 3분의 1에 해당하는 아브랑생(Avranchin) 전체로 구성되며, 서부 칼바도스(Calvados) 지방의 작은 영토를 포함한다. 때로는 단순히 코탕탱(Cotentin)이라 불리는 이 반도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북쪽 코탕탱(Nord-Cotentin) 또는 코탕탱(Cotentin) 지역으로 불리며, 꾸땅스(Coutances) 마을과 역사적인 코탕탱(Cotentin) 남쪽은 제외된다.


코탕탱 반도는 역사 지정학적인 구별에 의해 4개의 지역으로 나뉜다. 북서쪽에 아그(Hague)가 자리하고 있고, 아그 북동쪽으로는 발 드 셰흐(Val de Saire)가 위치해 있으며, 코탕탱 반도 중앙에는 평야인 보카주(bocage : 초원과 농토가 함께 어우러진 땅) 지역 그리고 남쪽으로는 늪지와 황무지인 코탕탱 또는 보뚜아(Bauptois) 지역으로 나뉜다. 이 구분은 근본적이며, 수세기에 걸쳐 인구의 진화를 초래해 왔다.


1945년대의 코탕탱 보카주(Bocage).


오늘날 코탕탱은 생로(Saint-Lô), 비유디유 레 포엘르(Villedieu les Poêles) 및 그랑빌(Granville)의 도시가 역사적으로 코탕탱에 속해 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코탕탱의 지리적 기반이 반도를 넘어서더라도 코탕탱이라는 프랑스 자연 지역과 종종 혼동되기도 한다.


코탕탱은 2017년 1월 1일 코탕탱만의 공동체 응집이라는 새로운 움직임과 함께 영토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제도적 대응을 개발하고자 하는 경향에 입각하여 9개의 이전 코뮌 공동체(라 셰흐(La Saire), 발레 드 루브(Vallée de l’Ouve), 생 피에르 에글리즈(Saint Pierre Église), 꼬뜨 데질르(Côte des Isles), 레 피외유(Les Pieux), 꾀르 뒤 코탕탱(Cœur du Cotentin), 몽트부르(Montebourg), 두브(Douve), 디베뜨(Divette)와 새로 재편된 발 드 셰흐(Val de Saire)를 포함한 셰르부르 앙 코탕탱(Cherbourg en Cotentin)과 라 아그(La Hague), 이렇듯 2개의 코뮌들로 구성되어 있다.


코탕탱과 베셍 습지(Bessin Marshes) 지역의 자연 공원은 코탕탱 반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제레미 사진.



도시



코탕탱에서 가장 큰 도시는 군사항인 셰르부르(Cherbourg en Cotentin)이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의 무대인 코탕탱 북쪽 해안에 있는 항구는 한때 주요 군사 항구였으며, 영국 및 아일랜드와 연결하는 주요 항구다. 다른 중요한 도시로는 바흐흘뢰흐(Barfleur), 바흔느빌 꺄흐트레(Barneville Carteret), 라 아그(La Hague), 브리끄베끄 앙 코탕탱(Bricquebec en Cotentin), 꺄항땅 레 마레(Carentan les Marais), 레 피외유(Les Pieux), 레세(Lessay), 뻬리에흐(Périers), 포흐 바이 쉬흐 메흐(Port Bail sur Mer), 생뜨 메흐 에글리즈(Sainte Mère Église), 생 소뵈흐 르 비꽁트(Saint Sauveur le Vicomte), 생 바스트 라 우그(Saint Vaast la Hougue), 발로뉴(Valognes)가 있다.


코탕탱의 지질은 화강암, 편마암, 사암 등으로 이루어졌다. 꺄흐트레 곶(Cap Carteret).
전형적인 코탕탱 말안장 모양의 종탑이 있는 협곡 교회. 고르쥬(Gorges) 노트르담 성당.



선사 시대



르 푸(Le Pou)로 알려진 로젤(Rozel)의 구석기시대 유적지는 네안데르탈인의 발자국, 손, 연속적인 수작업의 뛰어난 흔적을 보여준다. 중석기 시대 이래로 인간은 풍경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으며, 특히 다양한 곶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구석기시대 기슭에 사람이 존재했던 흔적은 현재 물에 잠긴 지역에서 발견되며, 수중 석기 물질이 발견되었다. 신석기 시대의 유적으로 호슈빌(Rocheville)의 고인돌, 브르뜨빌(Bretteville) 마을을 덮고 있는 골목, 호빌 라 플라스(Rauville la Place)의 고인돌과 같은 기념물이 발견된다. 또는 생 피에르 에글리즈(Saint Pierre Église) 주변에서 발견된 선돌들도 있다.



원시역사



코탕탱 반도는 할슈타트(Hallstatt)와 라테네(La Tène) 문명의 후계자인 켈트족 출신의 부족인 우넬리(Unellii, Unelles) 또는 베넬르(Venelles)가 거주한 지역이다. 우넬르(Unelles)는 꼬세디아(Cosedia: 오늘날 꾸땅스)이다. 반도의 남쪽(현재 아브랑생)에는 아브린카투이(Abrincatuii : Abrincates),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의 『갈리아 전기』에서조차 언급하지 않은 땅이다. 아브랭카뜨(Abrincates)의 중심지는 앵제나(Ingena : 현재 아브랑슈, Avranches) 마을이다. 코탕탱은 아흐모리카(Armorica)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역 사람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아르모리캔(Armorican)’으로 묘사되었다.



로마의 정복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부관인 티투리우스 사비누스가 이끄는 로마 3개 군단이 기원전 56년 여름에 코탕탱을 침공했다. 비리도빅스의 지휘 아래 우넬 가문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성채 언덕(Mont Castre : 리태흐(Lithaire) 주변의 바위산이 성벽같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독립을 지지하는 갈리아 인들은 아그 디크(Hague Dic)로 후퇴했지만 저항할 수 없었고, 요부르의 황무지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인 뒤 처참한 패배를 맛봤다.


위넬르(Unelles)의 수도인 코세디아(Cosedia)는 298년에 로마 황제인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 Chlorus)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아(Constantia)라는 이름을 취했다. 파구스 콘스탄티엔시스(Pagus Constantiensis : ‘콘스탄스의 땅’)라고 불렸던 이 이름은 코탕탱(Cotentin)으로 발전했다.


또 다른 주요 도시인 알라우나(Valognes)는 클라우디우스(Claudius)의 통치 기간 동안 극장과 온천탕을 획득하여 지역적 중요성을 획득했다. 다른 마을, 포흐발(Portbail : Grannonum?), 코리알로(Coriallo : Cherbourg), 크루시아토눔(Crouciatonum?), 카렌토마구스(Carentomagus : 오늘날 꺄항탕(Carentan))이 로마 가도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3세기 후반에 후기 로마 제국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다. 내전과 단명한 황제의 급속한 계승 및 지방의 탈퇴로 약화된 상태에서 코탕탱 반도는 색슨족과 같은 야만인의 새로운 공격을 받는다. 해상 침략자를 무력화하기 위해 망슈 해협을 순찰했지만, 국경에 대한 압력이 계속 증가함에 따라 도시를 보호하고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를 지키기 위해 제국 전역에 대규모 요새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국 채널 해협 양쪽에 있는 일련의 요새인 리투스 삭소니쿰(Litus Saxonicum) 요새가 들어섰다. 라 아그(La Hague), 셰르부르(Cherbourg)의 요새화, 바흐흘뢰흐(Barfleur), 바흔느빌 꺄흐트레(Barneville Carteret)가 이 시대에 개발되었다.



중세(中世)



10세기와 11세기 노르망디의 북부 정착 지역.
남동쪽에서 본 앙비에 수도원(Abbaye d'Hambye).
폐허로 변한 앙비에 수도원 교회. 노르망디 관광청 인터넷 홍보용 사진.


콩피에뉴 조약에서 브르타뉴의 소유였던 아브랑생과 코탕탱은 933년에 노르만족에 병합되었다.


현재의 노르망디 영토는 주로 동부에서 프랑크 족에 의해 식민지화되었고, 특히 서부 지역에서는 색슨 족에 의해 식민지화되었다. 이 지역은 바타비안(Batavian)과 수에비 레테스(Suevi letes)의 식민지의 제2세기에 서쪽 부분에 설립에 의해 선행되었으며, 바타비안(Batavian) 및 수에비 레테스(Suevi letes) 뿐만 아니라 바이유(Bayeux)와 꾸땅스(Coutance)의 주교 임명에 의해 입증되었다.


프랑크족에 의한 노르망디 식민지화는 고르게 진행되지 않았다. 동부는 매우 밀집되어 있었던 반면 코탕탱은 인구밀도가 미약했다. 색슨족의 식민지화는 노르망디의 문헌과 고고학 발굴에 의해 잘 입증되었지만, 캉 평원(베생 동쪽)에서 더 활발한 양상을 띠었다. 코탕탱(Cotentin)에서의 정착과 이 시기의 역사적 사실에 관해서는, 역사가들조차 역사적인 사건을 연관시킬 요소가 부족해 보인다.


역사가 클로드 포셰(Claude Fauchet)는 “코탕탱(Coutentin)은 메로빙거 왕조 시대에도 해적인 세스네(Sesnes)가 거주했으며, 프랑크 국왕이 인지할 만큼 지리적으로 정확도가 떨어지는, 파리에서 너무 먼 지역에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카를리아 인들에 의해 노르만 인과 다른 바다 해적들에게조차 버려진 땅으로 보인다”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다른 한편으로, 코탕탱은 특히 5세기말의 게르마누스(Germanus the Scotus)와 같은 아일랜드 복음 전도사들의 영향과 6세기 초에 그의 동료 슈빌리옹(Scubilion), 생 비고르(Saint Vigor), 생 마흐쿠프(Saint Marcouf)와 같은 아일랜드 복음 전도사들에 의해 기독교화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클로비스 1세(481-511)의 통치 기간 동안 프랑크 왕국에 병합되었을 때, 코탕탱은 루아르(Loire) 강과 세느(Seine) 강 사이에 뻗어 있는 영토인 로마 아르모리카(Roman Armorica)의 일부였다. 이 지역은 메로빙거 왕조 네우스트리아의 영토였으며, 카롤링거 제국이 해체된 후에는 서프랑크의 일부가 되었다.


프랑크 왕국 시대에는 코미타툼 콘스탄티눔(Comitatum Constantinum)이라는 영지가 주교의 영토에 중첩되어 왕권보다는 변방 지방 권력이 다스리는 거의 ‘버려진 땅’에 불과했다.



820년에서 933년



프랑스 최초의 왕조인 메로빙거 왕조 시대에 네우스트리아의 일부 영토였던 코탕탱은 루앙의 주교좌에 속한 지방에 통합되었다. 9세기와 10세기 초에 이 지역에 출몰한 노르웨이 출신의 바이킹들의 일련의 긴 습격을 경험했으며, 때로는 헤브리디스 제도와 아일랜드, 덴마크를 통과한 바이킹들에 의해 점령당하기도 했다.


867년 콩피에뉴 조약에 따라 프랑크 국왕인 대머리 왕 샤를은 브르타뉴의 솔로몬 왕에게 ‘충성과 평화의 맹세와 적(바이킹)을 무찌르는데 공동으로 협조’할 것을 서약하면서 코탕탱 전체(아마도 아브랑생과 함께)와 재정, 왕실 도메인 및 수도원을 확충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하지만 솔로몬은 브르타뉴 영토에 대한 바이킹의 습격에 대처해야 했기 때문에 코탕탱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이러한 영토 획득은 식민지화나 브르타뉴 왕국으로의 진정한 통합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며, 코탕탱은 루앙의 주교좌 관구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


꾸땅스 대성당의 흑서(Livre noir)에 따르면, 바이킹 첫 번째 침략은 836년 코탕탱에서 시작되어 이후 30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 위협은 889-890년 겨울에 집중되었는데, 파리에서 격퇴된 덴마크 군대가 생로(Saint-Lô)를 포위하고, 마침내 성채(castrum)에 피신한 리스타(Lista) 주교가 암살되고 주민들은 사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노르망디 공작 시대



933년, 노르망디 왕국을 건설한 바이킹의 수장 롤로의 아들인 긴 검을 찬 기욤(Guillaume Longue-Épée)은 아브랑생과 함께 코탕탱과 망슈 해협(채널 제도)를 정복하여 브르타뉴의 인콘과 그곳에 새로이 정주한 바이킹들에게 공격을 가했다. 그는 이 새로운 영토를 911년에 설립한 노르망디 공국에 통합했다. 브르타뉴(Brittany)와의 국경은 셀륀느(Sélune) 근방에 그어졌다. 1008년 또는 1009년에는 몽생미셸 인근의 꾸에농(Couesnon)으로까지 국경이 확장되었다.


934년경, 세느 강을 오르내리던 노르만족과 루앙 백작의 지도자인 긴 검을 찬 기욤(기욤 롱그 에페)은 결혼을 통해 프랑크족과 동맹을 맺었다. 그런 다음 외국에 대항하는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코탕탱 백작인 리울프(Riulf)가 연합전선을 이끌었고, 몇몇 다른 노르망디 공국의 남작들이 그를 따랐다.


그들의 눈에는 바이킹의 피가 흐르는 외국인이라 할 수 있는 국왕이 궁정과 의회에 침투할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비정상적으로 동맹을 맺고 있는 것처럼 비춰졌다. 그 후 긴 검을 찬 기욤(기욤 롱그 에페)은 안슬레흐, 베르나르 데인, 베셍 백작인 보통의 격려를 받아 3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수천 명의 군대에 맞서 싸워야 했다. 그는 루앙(Rouen) 시의 성벽 기슭에 있는 초원에서 그들과 마주쳤고 그곳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938년, 덴마크 왕 하랄드(Harald)가 이끄는 60척의 함대는 그의 아들에 의해 폐위되고 자신의 영토에서마저 쫓겨나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긴 검을 찬 기욤(기욤 롱그 에페)의 동의하에 코탕탱에 정착할 수 있었다. 하랄드는 왕좌를 되찾을 때까지 셰르부르에 거주지를 만들었다. 하랄드는 945년에 포로로 잡힌 우트르메흐(Outremer : ‘바다 너머’라는 뜻) 루이 4세에 맞서 아직 미성년자였던 노르망디의 리샤르 1세를 돕기 위해 22척의 배를 이끌고 돌아왔다. 이때 셰르부르에 최초의 교회와 요새가 세워졌다.


11세기에는 생 소뵈흐(Saint Sauveur) 지역과 마찬가지로 코탕탱은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노르만 서사시의 기원을 이룬 주인공 오뜨빌(Hauteville) 가문이 출현하기에 이르렀으며, 망슈 해협을 통치하고 방어함은 물론, 프랑스 국왕과 영국 왕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꺄흐트레(Carteret) 가문도 출현했다.


이 지역의 지명은 네엘 드 생소뵈흐(Néel de Saint-Sauveur)와 베흐트랑 드 브리끄베크(Bertran de Bricquebec)와 함께 대규모 지역에 걸쳐 있던 남작들로 형성된 스칸디나비아 인들의 후손들이 그들의 식민지를 경영한 흔적을 보여준다.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원 규칙에 입각한 수도원 주의는 11세기와 12세기에 생 소뵈흐 르 비꽁트(Saint Sauveur le Vicomte), 몽트부르(Montebourg), 세리지 라 포레(Cerisy la Forêt), 앙비에(Hambye) 수도원들을 통해 비약적으로 발전을 거듭한다.


노르망디 공국의 로베르 르 마니피크가 1032년에 망슈 지역에 세운 생 비고르 드 세리지 수도원. 노르망디 로마네스크 건축의 탁월한 예에 해당한다. © OREP.


스칸디나비아 지명의 무게를 감안할 때, 레스터 대학의 영국 연구원들은 노르망디의 바이킹 식민지화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 2015년 6월에 수백 개의 타액 샘플을 수집했다. 그 결과 코탕탱의 유전적 유산에 스칸디나비아 인의 분명한 흔적이 나타났음을 입증해 보여주었다.


생 소뵈흐(Saint Sauveur)의 영주들은 10세기 말부터 ‘노르망디 공국의 괴상한 지역’으로 간주되는 코탕탱을 (자작의 칭호로) 통치했으며, 10세기 말경에 자작인 첫 번째 로제흐(Roger)는 그의 아들 네엘(Néel) 1세와 그의 손자 네엘(Néel) 2세에 의해 계승된다.


공작이 통치하는 기간 동안 코탕탱은 공작의 손에 직접 경영되는 봉토로 이루어졌으며, 이를 공작의 봉신인 자작이 이끌면서 자작 스스로 개인적으로 투자한 영지가 되었고 자작은 또한 지방 행정을 담당했으며, 점차적으로 그들의 직위를 세습해 나갔다.


1001년, 잉글랜드 왕 이틀레트(Æthelred)는 노르망디를 점령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 원정을 시작하고, 바이킹의 영토 침략을 도운 노르만족을 처벌하고자 시도했다. 영국군은 가능한 한 많은 노르만 마을 사람들을 약탈하고 학살할 계획을 세우기까지 했다.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이틀레트는 잉글랜드의 힘센 전사들을 모두 소집했다.


잉글랜드의 이틀레트(Æthelred) 2세


앵글로색슨족 병사들은 막강한 군대였다. 발 드 셰흐(Val de Saire)를 통해 코탕탱(Cotentin)에 상륙한 영국군은 처음 발견한 노르만 마을을 약탈하고 불 질렀으며, 이어 루앙으로 이동하여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2세를 포로로 잡고 그의 영토를 이틀레트 국왕에게 제공했다.


상황이 영국군에게 유리해 보이는 동안, 네엘 1세 드 생 소뵈흐(Néel I de Saint-Sauveur)는 정력적이고 단호하게 개입했다. 원래 노르만 기사단은 자체적으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만 거느리고 있었기에 잉글랜드 군대에 맞설 만큼 그 수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노르망디 코탕탱 농민들의 분노는 약탈과 폭력 이후 점차로 비등해졌다. 마침내 네엘은 마을 사람들을 자신의 군대로 모집할 수 있었다. 영국의 노련한 군대 앞에서 장비가 부족하고 경험이 부족하긴 했지만, 네엘(Néel)의 병사들은 타오르는 분노심과 적개심으로 영국군과 맞서 승리를 이끌 수 있었다.


곧 자신의 군대가 패배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이틀레트(Æthelred)는 자존심마저 뒤틀렸다. 이 같은 잔인한 패착의 원인을 알고 싶었던 이틀레트는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한 명을 불러 심문했다. 잉글랜드 전사는 이에 “노르망디에서 호전적이고 무시무시한 적병들을 만나 진력을 다해 싸워 보았지만, 노르만족 아낙네들까지 나서서 머리에 물 항아리를 이고는 영국 병사에 덤벼드는 걸 보면서 진저리 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고백했다.


노르망디 공국의 리샤르 3세(1008-1027년경)의 아내인 공작부인을 위하여 1025년경에 설립한 코탕탱 지역의 왕비 영토를 가리키는 중세 문서는 867년 브르타뉴의 솔로몬에게 부여된 세습되고 있는 재산의 구성에 대한 부분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이 문서에는 포흐발(Portbail) 수도원과 브릭스(Brix)와 셰르부르(Cherbourg)의 성(카스텔라)과 함께 법원(curtes), 세금 징수에 관한 세부항목이 기재되어 있다.


1047년, 훗날 정복왕 기욤(윌리엄)으로 이름을 떨칠 노르망디의 젊은 공작이 출현하면서 네엘 2세 드 생 소뵈흐(네엘 1세의 아들)는 두려움에 떨었고, 결국 그는 기 드 브리온느와 같은 다른 노르만 기사들과 함께 기욤을 암살할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에 가담한 많은 기사들은 원래 노르웨이-게일 혈통의 바이킹이 정착했던 서부 노르망디 출신들이었다. ‘덴마크’ 후손(정복왕 기욤(윌리엄)의 후손)에 의해서 보다 끈질기게, 따라서 이 갈등의 뿌리는 노르망디 공국이 수립된 930년대의 부족 및 영토 다툼의 원인으로 자리 잡았다.


발로뉴에 머무는 동안 어린 공작 기욤은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에 휩싸이게 된다. 젊은 공작은 밤에 몰래 베(Veys) 만을 건너 베셍(Bessin) 지역으로 혼자 도망쳐 활래즈(Falaise)에 도착한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왕인 프랑크 국왕 앙리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발레 뒨느(Val-ès-Dunes)에서 음모를 꾸미는 자들로부터 승리를 거둔다. 역사가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전쟁터에서 코탕탱의 기사가 프랑스 왕을 말에서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다치지 않은 프랑크 국왕 앙리 1세는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섰다. 이로 인해 ‘프랑스 국왕을 쓰러뜨린 창 코탕탱’이라는 속담이 탄생하기도 했다.


영국을 정벌한 정복왕 기욤(윌리엄)이 노르망디에 도착하면서 비로소 코탕탱의 주요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20년 후인 1066년, 기욤(윌리엄)은 잉글랜드를 정복하면서 코탕탱 남부의 노련한 전사 가문인 그랜트(Grant) 가문의 도움을 구한다. 영국을 정복한 데에 따른 감사의 표시로 기욤(윌리엄)은 현재 그랑빌(Granville) 시의 부지가 된 라 호크 드 리우(La Roque de Lihou)의 땅을 그랜트 가문에게 하사한다. 따라서 그랜트 가문은 바이킹 이후 이 도시의 첫 번째 영주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꾸땅스는 866년 바이킹의 첫 번째 공격 이후 수많은 습격을 겪어 거의 파괴된 후 잿더미에서 다시 태어났다. 정복왕 기욤(윌리엄)은 자신의 친척 가운데 한 명인 제오흐루아 드 몽브레(Geoffroy de Montbray)를 도시의 주교로 임명했다. 주교는 앞으로 교구의 발전과 영향력을 위해 상당한 활약을 펼친다. 특히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11세기에 지어진 꾸땅스 대성당과 13세기 초부터 시작된 현재 대성당의 기초와 중세 주교좌 공원을 만든 이가 바로 제오흐루아 드 몽브레다.


앞서 1053년에 노르망디의 공작 기욤(윌리엄)은 이종 사촌 지간인 마틸드와 결혼한 후, 자신을 짓누르는 교황에 의한 파문으로부터 속죄하기 위해 100명의 가난한 사람들의 유지에 할당된 영구적인 연금을 받을 공국의 4가지 중요한 장소 중 하나로 셰르부르를 선택한다. 그때까지 생 에레티올(Saint Éreptiole)이 436년경 뷔까유(Bucaille) 실개천 가에 지은 호스피스(구제원)는 개인의 기부금만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반면에 셰르부르는 공작 치하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항구였다. 그러나 젊은 기욤이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이 되자 반대 현상이 일어났다. 앞으로 셰르부르는 노르망디 공작이 가장 좋아하는 항구가 될 것이고, 이 같은 현상은 기욤이 영국 왕이 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망슈 해협의 바흐흘뢰흐(Barfleur), 전형적인 대서양 포구 모습.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는 노르만족에 의한 잉글랜드 정복의 신호탄이 되었으며, 전투에 참가한 병사들 가운데에는 많은 코탕탱 지역 병사들과 아브랑슈 인근에 사는 병사들이 섞여 있었다. 바흐흘뢰흐 항구가 바로 보이는 바위에 붙어있는 명판은 기욤(Guillaume)이 바흐흘뢰흐(Barfleure)에서 모라(Mora)라는 이름이 붙은 배를 타고 망슈 해협을 건너 영국과 노르망디 사이를 오갔음을 상기시킨다.


바흐흘뢰흐 바닷가 바위에 부착된 영국을 정복한 정복왕 기욤(윌리엄)을 기리기 위한 동판 속에는 기욤이 타고 다닌 모라(Mora)라는 배가 새겨져 있다.


12세기 초, 가족 간의 불화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정복왕 기욤(윌리엄)의 막내아들이었던 앙리(헨리) 1세는 노르망디 공국을 물려받은 자신의 형 로베르 꾸흐뙤이즈로부터 3,000파운드에 코탕탱을 사들인다. [1]






[1] 눈길을 끄는 코탕탱의 역사를 언급한 저술들은 아래와 같다.


필리프 베흐탱(Philippe Bertin), 『코탕탱, 섬은 아니지만 섬 같은 지역(Le Cotentin, ce pays comme une île)』, 렌느(Rennes), 우에스트 프랑스(Ouest-France), 1996.


미셸 브니에, 모리스 르꾀흐, 노흐베흐 지라르(Michel Besnier, Maurice Lecœur et Norbert Girard) 공저, 『섬이 아닌 섬 코탕탱(Presqu’île du Cotentin)』, 셰르부르(Cherbourg), 이소에뜨(Isoète), 1999.


폴 슈넬(Paul Chesnel), 『노르망디 공작들의 지배하에 있던 코탕탱 그리고 아브랑생(Le Cotentin et l’Avranchin sous les ducs de Normandie (911-1204)』, 노르망디 사회적 지위 및 사회 제도 연구소(institutions et état social de la Normandie), 캉(Caen), 델레스끄(Delesques), 1912.


디디에 드꾸앵, 파트릭 꾸호(Didier Decoin & Patrick Courault) 공저, 『빛나는 섬 아닌 섬 : 코탕탱 해안(Presqu’île de lumière : rivages du Cotentin)』, 셰르부르(Cherbourg), 이소에뜨(Isoète), 1998.


장 필리브 도메끄, 노흐베흐 지라르, 세르쥬 모제흐(Jean-Philippe Domecq, Norbert Girard et Serge Mauger) 공저, 『코탕탱 및 셰르부르 베셍 습지(Les marais du Cotentin et du Bessin Cherbourg)』, 셰르부르(Cherbourg), 이소에뜨(Isoète), 1998.


엘리 게네(Élie Guéné), 『두 세기에 걸친 해수욕장 : 아브랑생 및 코탕탱의 백사장에 관하여(Deux Siècles de bains de mer : sur les plages de l’Avranchin et du Cotentin)』, 생 로(Saint-Lô), 망슈 투어리즘(Manche-Tourisme), 1985.


니콜라 알레(Nicolas Hallé), 『코탕탱 해양에 관한 역사(Histoire de l'aéronautique dans le Cotentin)』, 셰르부르(Cherbourg), 이소뜨(Isoète), 2000.


로제흐 장 르바흐방숑(Roger Jean Lebarbenchon), 『노르망디 대중문학과 대중문화(Littératures et cultures populaires de Normandie)』, 셰르부르(Cherbourg), 이소뜨(Isoète), 1988-1989.


피에르 르베뤼에(Pierre Leberruyer), 엘리 게네(Élie Guéné), 안느 보네(Anne Bonnet), 『섬 아닌 섬 같은 코탕탱의 촌락들과 집단 거주지(Villages et sites de la presqu’île du Cotentin)』, 생 로(Saint-Lô), 망슈 투어리즘(Manche-tourisme), 1996.


모리스 르꾀흐(Maurice Lecœur), 『셰르부르 세월 따라(Cherbourg au fil du temps)』, 셰르부르(Cherbourg), 이소뜨(Isoète), 2001.


모리스 르꾀흐(Maurice Lecœur), 『중세 시대 코탕탱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Le Moyen Âge dans le Cotentin)』, 이소뜨(Isoète) 2008.


르네 르쁠레(René Lepelley), 모니크 레옹(Monique Léon), 『노르망디에 관한 이야기와 전설(Récits et légendes de Normandie)』, 코탕탱 선집(recueillis dans le clos du Cotentin), 캉(Caen), 캉 대학 출판물(Centre de publications de l’Université de Caen ; Condé-sur-Noireau), 꼬흘레(Corlet), 1985.


르네 투스탱 드 빌리(René Toustain de Billy), 『코탕탱 및 코탕탱 도시들에 관한 기록과 역사(Mémoires sur l’histoire du Cotentin et de ses villes)』, 생로(Saint-Lô), 엘리(Élie), 1864.


미셀 우흐께, 질르 피바흐, 장-프랑수아 세이에흐(Michel hourquet, Gilles Pivard, Jean François Sehier) 공저, 『정복왕 기욤의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서(Sur les chemins de l’histoire, Le conquérant Guillaume)』, 오렢(OREP) 출판사, 바이유. 2013.


장 르노(Jean Renaud), 『바이킹이 이룩한 노르망디 왕국(Normandie des Virkings)』, 오렢(OREP) 출판사, 바이유,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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