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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과 코탕탱

몽생미셸 가는 길 246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레타크(L’Etac)


파리 세느 강 계곡에 바이킹들이 출현한 충격적인 사건들에 관해 기술하고 있는 수많은 역사적 문헌들이 존재하는 반면 그처럼 많은 연대기나 시대 연표 어느 곳에도 프랑스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코탕탱(Cotentin) 주변의 섬들과 망슈(Manche) 해협의 섬들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 분야의 석학인 장 르노(Jean Renaud)는 이를 아쉽게 생각하면서 이 지역에서의 바이킹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여기 그가 기술한 코탕탱에서의 바이킹들의 활약상을 길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아브랑생과 코탕탱
Avranchin et Cotentin



047 - Le Contentin et ses îles.JPG 바이킹들과 관련된 유물이 발견된 지역인 코탕탱과 인근의 섬들.


“바이킹들이 코탕탱 저 남쪽 몽생미셸 성소를 침공하여 수도원이 보유하고 있던 성유물과 재물을 약탈한 것은 840년의 일이다. 몽생미셸 수도원 교회 참사회 공동체는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이 소규모로 운영되던 공동체는 708년부터 오베르 주교가 창건한 재단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아브랑슈 교회에 소속된 공동체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시대의 문헌들은 9세기 초반 코탕탱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해서는 어떤 암시나 언급조차 없다.


le-mont-saint-michel-mascaret, David Daguier.jpg 몽생미셸(Mont Saint Michel)


대머리 왕 샤를은 브르타뉴 인들과 바이킹들 간의 동맹을 깨부수기 위해 867년 급기야 살로몽과 맺은 협약을 파기하기에 이른다. 협약은 브르타뉴 인들이 적들로부터 프랑크 국왕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무엇이 바뀌었나? 「생 베흐탱 연대기」에 따르면, 살로몽의 지위가 박탈되었다.


“코탕탱의 백작은 모든 세금징수 권한을 잃어버렸고, 그가 다스리던 왕실의 영지와 백작령에 위치한 수도원들, 또한 주교에 소속된 것들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에 대한 효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아브랑슈 주민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언급이 없다. 다만 브르타뉴 인들이 이미 아브랑슈를 점거했으리라고만 짐작될 뿐이다. 국왕 또한 이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048 - Roi de mer.JPG 아돌프 르뢱스의 동판화 「뿔고동을 불고 있는 바다왕」 [1].


어마어마한 선단을 이끌고 나타나 엄청난 인명 피해와 손실을 불러일으킨 세느 강 계곡에 들이닥친 바이킹들의 존재는 연대기 편찬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이킹들은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홀로 뚝 떨어진 곳에 위치한 코탕탱 북쪽으로는 조용하고도 은밀하게 침투했다.


그들은 이곳에 얼마 되지 않은 숫자로 떼를 지어 상륙하거나 기다란 해안을 따라 정주하면서 대를 이어 점점 은밀히 내륙 안쪽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셔틀란트나 헤브리디즈 군도에서와 같이 바이킹들은 코탕탱 지역의 라 아그(La Hague)나 르 발 드 셰흐(Le Val de Saire)에 정주했으리라 추측된다.


6 Le Val de Saire 3.jpg
5 La Hougue, Photo B. Almodovar 2.jpg
사진 오른쪽은 라 아그(La Hague), 사진 오른쪽은 르 발 드 셰흐(Le Val de Saire).


노르망디 어에 어원을 둔 지명학에 관한 저술들을 보면, 유난히 이 지역의 인구밀도가 높은 것이 이를 여실히 입증해주고 있다. 바이킹들의 공동체 상당수가 이 지역에 몰려있었던 점도 그 같은 사실을 증명해 준다.


바이킹들은 이 지역에 은밀히 침투하여 대를 이어 세를 불려 가면서 거의 한 세기 이상을 노르망디 어(스칸디나비아 어)로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삶을 이어 나갔다. 지명학에 관한 저술들은 특이하게도 자주 그리고 아주 상세히 이 지역의 바닷가 연안을 언급하고 있다.


이 지역의 토양과 주거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저술들 역시 상당하다. 이 지역에 관한 특히 켈트(스코틀랜드 인들이나 아일랜드 인들) 족에 관한 인명학 저술들을 살펴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이킹들은 서로 연합체로 침투했을 가능성도 점쳐진다. 또한 헤브리디즈 군도나 아일랜드 저 너머에 위치한 노르웨이 지역에서 도망친 노예들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2]


049 - La toponymie côtière.JPG 코탕탱 북쪽 연안의 지명들


여기서 짐작되는 것은 코탕탱 지역은 프랑크(프랑스) 왕국에 있어서 사각지대나 다름없었다는 점이다. 프랑스 대서양 북서쪽, 즉 망슈 해협에 위치한 이 돌출된 반도는 프랑크 왕국의 힘이 거의 닿지 않는 땅이었다. 이곳에 처음 발을 디딘 바이킹들은 원래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을 힘으로 누르고 정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는 세력을 형성하면서 점차적으로 정착 지역을 넓혀 나갔을 확률이 높다.


프랑크 왕국에 속해 있었지만, 왕국으로부터 거의 버림받은 듯한 삶을 영위하던 소외당한 원주민들은 바이킹이란 새로운 종족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혼란을 겪게 되고, 바이킹들 역시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자마자 원주민들과의 동거에 충격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그들은 점차 점령지를 넓혀가면서 원주민들의 삶 속으로 스며든다. 거기에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이 바로 프랑크 왕국이 이룩한 중세 기독교 문명이었다.






[1] 1845년 피트르 슈발리에가 펴낸 『브르타뉴의 과거와 현재』에서 인용. 개인 소장.


[2] 장 르노(Jean Renaud), 『바이킹들이 이룩한 노르망디 왕국(La Normandie des Vikings)』, 오렢(OREP) 출판사,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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