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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탕탱의 지명(地名)

몽생미셸 가는 길 247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께흐끄빌의 생 제르맹 교회



코탕탱 북쪽 지역에 산재한 지명들 역시 바이킹들이 사용하던 언어와 일치한다. 바이킹들은 원래 살던 춥고 혹독한 스칸디나비아 지역을 벗어나 온화하고 살기좋은 프랑스 북서쪽 대서양가에 정착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들은 원주민들과 어울려 살면서도 그들의 언어를 버리지 않았다. 그들이 사용하던 언어들은 점차 원주민들의 언어에 침투하면서 변이를 일으켰다.


고정된 문화라 할지라도 속성적으로 이질적 문화에 침윤되지 않을 도리는 없는 법이다. 충격적이고도 혼란스러운 문화에 침윤된 고정된 문화는 다시 순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조화롭게 변화한다. 이렇게 변화한 문화가 문명이 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와도 같다.


다시 스칸디나비아-노르망디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장 르노는 그의 탁월한 저서 『바이킹들이 이룩한 노르망디』에서 기술하고 있기를 노르망디 지방, 그 가운데에서도 코탕탱의 지명은 바이킹들이 사용하던 언어들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진단한다. [1]


“코탕탱 북쪽 지역(pagi)에 대한 프랑크 왕국의 행정구역 분할 체계상의 지명은 상당수가 바위로 된 갑(岬)에 붙은 이름들일 경우 바이킹들이 거주했던 연안의 지명들과 똑같은 용어들을 차용했다.


1027년 리샤르 3세가 자신의 젊은 아내인 호베르 르 피외이의 딸 아델을 위해 설정한 <과부 상속 유산에 관한 법>을 살펴보면, 세 개의 행정구역상 지역명이 등장한다.


아가(Haga), 사흔느(Sarnes) 그리고 엘제흐(Helgeres ; 엘젠느(Helgenes)로 읽어야 한다)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앞의 두 지명은 라 아그(la Hague ; 노르망디어로 갑을 뜻하는 haka)와 라 셰흐(la Saire ; 노르망디 어로 갑, 곶을 뜻하는 네스(nes), 갑(cap), 그리고 사라(Sara), 셰흐(Saire))라는 것이 분명하다.


르 발 드 셰흐(Le Val de Saire) 등대


이 용어들은 제각기 고유한 지명들로 지칭되기 이전에는 아그와 셰흐의 갑이나 곶을 뜻하는 말과 같은 어원을 지녔다. 엘젠느(Helgenes ; 엘지(Helgi) 또는 엘지(helgi), 생(saint)이란 인명과 같은 형태)란 지명도 흘라망빌의 곶에 부합하는 구역을 가리키는 명칭과 관계가 깊다.


아그의 서쪽 지명이자 에꺌그랭 만에 있는 작은 언덕 기슭에 위치해 있는 르 탱글랑(Le Tingland ; 구역(locale), 땅(land), 대지(terre)와 같은 뜻을 지닌 스칸디나비아 어로 딩(Þing))이란 지명 역시 바이킹들이 그들의 공동체의 관심사항을 논의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모였던 장소에 해당하는 딩(Þing)이란 말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딩(Þing)의 소재지가 틀림없는 탱글랑(Tingland).


노르웨이 바이킹들에 의해 식민지가 된 영국 북서쪽 지방 컴벌랜드(Cumberland)에는 핑글랜드(Fingland)(1279년에 팅글랜드(Thingland)라 공식적으로 명명된)란 지명이 나오는데, 이 또한 두 단어의 유사성이 확인된다.


영국 컴벌랜드의 팅글랜드(Tingland).


게다가 아그(Hague) 지역에서 1263년에 ‘로제리우스 위스꺄이유(Rogerius Huscaille)’란 인명과 1274년 흘로뜨망빌 근처에 발리 위스꺄이(Vallis Huscalli)란 지명이 등장하는데, 이 두 단어는 스칸디나비아 어로 후스카알(húskarl), 즉 왕자(hirŏ)의 개인 경호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사람 이름에서 파생했다.


1062년 사생아(정복왕) 기욤(윌리엄)은 예외적으로 ‘부아빌의 오그(la hogue de Boiville)’ 야외에서 개최된 모임에 참석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이 말은 오늘날 보몽 아그(Beaumont-Hague) 지구에 위치한 비빌(Biville) 언덕을 가리킨다. 이 밖에도 바이킹들이 연속적으로 코탕탱 북쪽에 미친 영향력에 대한 수많은 증거를 예시하는 징후들이 발견된다.


보몽 아그(Beaumont-Hague) 지역에 위치한 비빌(Biville) 모래언덕.


코탕탱의 스칸디나비아 인들은 오랫동안 루앙 당국에 자신들의 존재를 숨겨왔다. 또한 오랜 기간 동안 이교도로 살아왔다. 비록 그들 가운데 개종을 한 자가 있었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는 그들의 선조들이 믿었던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로 회귀했다. 이 지역의 프랑크 왕국의 백성들조차 10세기에는 본당 신자로서의 삶을 영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11세기 초반까지 이 지역에는 성직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이유도 작용했다. 실상 바이킹들이 생로를 포위 공격함에 따라 징세 요구가 점증했던 889-890년경에 신앙 공동체로부터의 탈출은 일반화되었다.


예를 들어 생 마흐꾸프 수도사들은 수도원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리스타 주교가 살해당한 꾸탕스 교구 신자들은 그들의 신앙마저 내던져버렸다. 로베르 르 마니피크 공작이 스리지 라 포레(Cerisy la Forêt) 수도원을 설립한 1032년까지는 공작령 서쪽 지역은 수도원이 중심이었다는 어떠한 근거도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이다. 단, 예외가 있었다면, 바로 몽생미셸이다. 루앙에 거주하던 꾸탕스의 주교 로베르가 자신의 교구에 속한 몽생미셸로 되돌아온 것이 1049년의 일이다.


몽생미셸, 자비에 라슈노(Xavier Lachenaud) 사진.


1000년이 시작된 이후 이틀레드 왕이 노르망디를 공격하고자 원정군을 조직한 것이나 영국군이 상륙지점으로 헤빌르와 생 바스트 라 우그 사이에 위치한 르 발 드 셰흐를 선택한 것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리샤르 2세는 영국을 공격한 바이킹들에게 코탕탱 지역을 내주었기 때문이다.” [2]


노르망디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에 속하는 께흐끄빌(Querqueville)의 생 제르맹 교회. [3]








[1] 여기서부터는 장 르노(Jean Renaud), 『바이킹들이 이룩한 노르망디 왕국(La Normandie des Virkings)』, 오렢(OREP) 출판사, 파리를 참조하였다.


[2] 위의 책.


[3] 께흐끄빌이라는 지명은 바이킹들이 사용하던 ‘케르카빌라(Kerkavilla)’란 말에서 기원했다. 교회에 속한 농가를 가리키는 케르카빌라란 단어가 12세기 문서에 등장한다. 장 르노(Jean Renaud)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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