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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Dec 23. 2021

종교 예술의 두 관점, 쉬제흐와 성 베르나르도

앙드레 보느리가 들려주는 로마네스크 예술 이야기 52화


생 드니(Saint-Denis) 수도원장이었던 쉬제흐와 클레르보(Clairvaux)의 수도원장이었던 베르나르도, 이 두사람은 서로 상반된 종교 예술의 두 개념을 설파했던 이들로 유명합니다.


1081년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난 쉬제흐(Suger; 1122-1151)는 10년간을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왕실 수도원에서 처음 봉사생활을 시작합니다. 같은 나이의 뚱보왕 루이6세(1108-1137)를 만난 곳 역시 이곳에서였죠. 스무 살이 되자 그는 마침내 수사가 될 것을 서원하고 생 드니 고문서관에서 자신의 맡은 바 직분을 다합니다.


재능이 많았던 쉬제흐는 행정가로서의 수완을 발휘했음은 물론 명 연설가였고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외교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으며, 행정가로서의 기질도 갖춰 아당 수도원장으로서의 막중한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1122년에 쉬제흐는 드디어 생 드니 수도원장 직을 맡습니다. 생 드니 수도원은 메로빙거 시대로부터 왕실 지하묘지(네크로폴르)가 자리한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한 수도원이었죠. 물론 프랑스 국왕들의 수호자 성인인 드니(Denis)의 성골함을 모셔놓은 유서 깊은 수도원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쥐스트 데그몽(Juste d’Egmont)이 그린 쉬제흐가 생 드니 수도원장 직을 하사 받는 장면, 17세기, 낭트 미술관.


3세기 때 파리 주교였던 드니는 가끔씩 바울 성인의 제자이자 아레오파고스 재판관이었던 그리스 인 드니스(Denys)와 혼동되기도 합니다. 쉬제흐가 원장으로 부임한 생 드니 수도원은 왕실 문양이 새겨진 물건들이 담긴 레걀리아(regalia)[1]들이 소장되어있는 정말 대단한 수도원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왕홀, 반지, 왕관, 정의의 손과 같이 성스러운 의식이나 미사에 사용된 것들을 소장하고 있었죠. 현재까지도 카페 왕조의 국왕이었던 루이 6세 때부터 전쟁터에서 휘날리던 국왕의 깃발과 수도원 깃발이 아직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요컨대 쉬제흐의 등장으로 수사들의 삶은 모범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수도원에 속한 문화유산 또한 소홀한 관리로 몸살을 앓게 되었죠. 궁정에서 루이 6세와 7세(1137-1180)의 자문관 일을 맡아보면서 동시에 수도원장을 겸임했던 쉬제흐는 루이 6세의 생애를 담은 「일생(Vie)」이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합니다.


이 새로운 수도원장은 일시적이나마 수도원을 영성적으로 개혁하려고 애썼습니다. 개혁은 베네딕투스 성인이 제안한 규칙을 적용하여, 수도원 경내에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하고, 단식을 행하며, 정숙을 지킬 것과 옷차림 역시 아주 간소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한 것이었습니다.


수도원 재정 또한 투명할 것도 요구하였습니다. 그의 느려 터진 행동 탓에 새로 시작한 수도원 건축공사도 더디게 진척되었죠. 처음 완성을 본 것은 1134년의 일로 고딕 건축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완성된 것이 커다란 장미창을 낸 파사드(정면 입구의 스테인드 글라스)였습니다. 현관 정문은 밋밋한 기둥들로 채워졌고, 내진은 1144년에 애송이 국왕 루이 7세와 왕비 알리에노흐 다끼탠느의 입회 하에 17명의 주교들에 의해서 성대하게 축성되었습니다.


생 드니 대성당의 장미창.


교회 후부 벽 쪽에는 방사상 제단들이 일렬로 나열된 구조로 자리했으며, 이중의 회랑 또한 작은 제단들을 향하여 열린 형태로 자리 잡았습니다. 제단이나 회랑 모두 송곳 모양의 뾰족한 형태의 교차형 둥근 천장으로 마감되었죠.


파리 생 드니 대성당 중앙 회중석. 13세기에 증축된 모습.


커다란 색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형형색색의 빛은 홍수를 이뤘습니다. 쉬제흐가 시도한 이 새로운 건축술에 입각한 스테인드글라스는 하느님의 영광이자 그에 대한 엄숙한 찬양이면서 또한 신성함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빛을 낸다는 것은 빛과 한쌍으로 불을 환히 밝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또한 빛을 발한다는 것은 고귀한 건축물에 쏟아지는 새로운 광명을 가리킨다.”라고 쉬제흐는 자신이 지은 바질리크 대성당을 주제로 한 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광명, 즉 불을 밝힌다는 의미는 물질에 의해 환하게 밝혀진 상태를 가리키는 것은 물론, 영적인 빛과 하느님의 새로운 지혜라는 의미까지도 내포한 것이었습니다. 쉬제흐는 다시 언급하기를 “사실인즉슨 물질적인 것만으로 정신적 고양을 이루려는 어리석은 영혼조차도 이 빛을 바라봄으로써 과거에 침수식 때의 일들을 소생시킬 수 있음이로다.”라고까지 설파합니다.


그의 이러한 정의는 신 플라톤주의에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그는 5세기경 시리아의 수사였던 또 다른 드니스가 남긴 「천국의 등급」이란 글을 인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리아 수사 또한 가끔씩 파리 출신의 드니 성인과 혼동됩니다. 인간의 정신이 고양되기에 이르러 모든 것을 초월하여 성스러운 비물질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물질적 아름다움을 매개로 해서인데, 이 물질적 아름다움이 바로 빛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다채로운 색깔을 지닌 돌들의 아름다움이 나로 하여금 바깥 세계에 대한 고민들을 떨쳐버리게 하누나. 이 훌륭한 매개물이 나로 하여금 깊은 명상에 잠기게 하고 물질적인 것을 비물질적인 것으로 바꿔놓으면서 성스러운 힘들의 다양성에 이끌리게 만드는구나. (···) 내 믿음 또한 신의 은총에 힘입어 이 내면의 세계로부터 저 천상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구나.”


그의 이 같은 종교 예술에 대한 개념은 클레르보의 수도원장인 베르나르도의 예술관과 대척점에 놓이게 됩니다. 쉬제흐는 진귀한 물건들로 가득찬 수도원을 아름다운 장식들로 꾸몄을 뿐만 아니라, 만인에게 낱낱이 공개하기까지 했던 것이죠.


생 드니 수도원이 소장하고 있던 진귀한 물품은 성작들을 비롯하여 값을 매길 수 없는 온갖 보석들과 함께 에메랄드가 박힌 금으로 만든 높이가 5미터에 달하는 십자고상은 물론이고 금은보석으로 치장한 제단하며, 금은 세공품이라 할 수 있는 성물함에 이르기까지 끝이 없습니다.


“우리를 헐뜯는 자들은 성스러운 영혼의, 순수한 정신의, 믿음을 위하여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반박합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성체성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나는 또 이렇게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찬식 때 사용하는 성작들의 외부 장식들 또한 우리의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준다고 말입니다. 성체에 담겨있는 그 모든 것 이상으로, 모든 내적인 순수함 이상으로, 모든 외적인 고귀함 이상으로 성작들의 장식들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쉬제흐(Suger)의 독수리’라 불리는 반암으로 제작한 화병, 생드니 대성당 보물,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쉬제흐보다 10년 젊은 베르나르도(1115-1153)는 기사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디종 근처의 퐁텐느에 봉토를 소유한 명성이 자자한 귀족 가문과 인척관계였죠. 일찍이 가톨릭 영세를 받고 기독교도가 된 베르나르도는 샤띠용 쉬흐 센느의 생 보흘레 교회 참사회 소속 학교에서 수학합니다.


1112년, 30명의 친척과 친구들을 거느리고 그는 1098년에 호베르 드 몰레슴므가 창건한 시토회 소속 수도원인 노붐 모나스테리움에 입문합니다. 그리고 베르나르도는 수도원에서 누르시아 태생의 베네딕투스 성인이 제창한 규칙에 따라 본래의 모든 순수함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정진하면서 갱생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이러한 그는 기도하고 성서들을 읽으며 묵상하고 노동일을 하면서 나날을 보냈죠. 무엇보다도 가난과 고독과 침묵 속에 생활하며 수도원장에 대한 복종과 인격적으로 겸손함을 갖춘 나날들을 이어갔습니다.


흔히 ‘클레르보(Clairvaux)의 베르나르’라 불리는 베르나르도 성인, 퐁텐느 레 디종 성당 조각.


1114년에 베르나르도는 샹프누아 가문의 영지에 새로 설립된 시토회수도원의 원장직을 맡습니다. 클레르보 수도원이었죠. 10년 뒤에 그는 「생 티에리의 기욤을 위한 옹호」라는 저술을 통하여 그가 제안한 규율에 대한 대변자가 되기로 작정합니다. 이는 진실로 시토회의 영성이 어떠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논설에 해당합니다.


그는 표명하기를 수사의 삶이란 내적 존재의 모든 것에 대한 개조를 포함하여 선한 것을 추구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나아가 이와 같은 삶의 본질을 추구하려면 수도원의 건축물들조차도 기능보다는 목적에 우선하여 지어야 하며, 또한 수사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만드는 감염 요소들일뿐인 장식들조차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수도원 경내에 자리잡은 이 더러운 원숭이 조각하며, 사나운 사자들과 거짓으로 꾸며낸 이 반인반수들 가운데 무엇 하나 선한 것이 있단 말인가? (···) 만일 여기 다양한 모습들로 표현된 것들이 그토록 매혹적인 것들이라면 수사본을 읽어가는 것보다 대리석들을 쳐다보는 것을 더 즐겼을 테고, 하느님의 계명을 묵상하기보다는 그것들을 상탄하는데 허송세월했을 것이다.”


<반인 반수와 사슴>, 세라보나(Serrabona) 수도원 교회의 특별석 기둥머리 장식, 1151년경.


게다가 하느님의 성전을 아름답게 장식한답시고 낭비를 초래한 그 돈으로 어렵고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썼다면 그들이 겪는 고통이 훨씬 덜어졌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교회는 여기저기 보석들로 꾸민 듯 번쩍거리지만 가난한 자들은 더욱 배가 고프다. 교회의 벽들이 황금으로 덮여있지만, 교회의 아이들은 헐벗은 상태에 처해있다. 하느님을 어리석음으로만 대하는 그대들이 정녕 수치심을 모른다면 그렇듯 하느님 교회를 치장하는데 재화와 시간을 낭비하시라!”


이 같은 주장은 시토회의 건축에 대한 개념이 얼마나 엄격한 윤리에 입각해 있었는지를 짐작케 해 줍니다. 다시 말해 모든 기교적 장식들을 뿌리 채 뽑아낸 듯한 무미건조한 공간을 창출해낸 시토회 건축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공간 개념은 오직 벌거벗은 빛만이 나뒹구는, 빛에 의해 드러나는 형태의 지극히 단순함, 건축 자재 고유의 순수함만이 느껴지는 공간에서 홀로 명상에 잠기는 순수한 상태를 지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쉬제흐가 고딕건축의 심미감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생 드니 수도원 교회 건축물 공사를 시작한 1134년 같은 해에 시토회 일반문서에는 처음으로 종교예술에 관한 규칙들을 규정하는 조항이 등장합니다.


이 규칙에 따르면 우선 교회 안에서의 모든 회화 조각 장식을 배척합니다. 이로써 기둥머리에는 오로지 소박한 물 이파리 장식만이 등장하게 되었죠. 또한 형형색색의 색유리창들의 제작을 금지합니다. 이로써 그리자이유 기법[2]에 입각한 기하학적 문양만으로 채워진 얽힘 장식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수사본에서의 채색은 첫머리글자만으로 한정되며, 그 어느 곳에도 색을 입히거나 사람과 짐승 형상을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 또한 세워집니다.


 『시토회 예술』이란 주목할 만한 저술에서 조르쥬 뒤비(Georges Duby)는 이러한 상반된 주장들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이끌어냅니다. “화려하고 성대한 축제가 생 드니에서 펼쳐진다. 교회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왕실의 보물들이 현시되는 이 기막힌 광경에 몰입될 수밖에 없다. 반면 시토회 수도원에서는 똑같은 축제가 내면에서 전개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호사스러운 허식에 물든 수사들 각자의 영혼 안에서 펼쳐진다. 휘황찬란함보다도 더 영광스러운 개인에 대한 개혁이 얼마나 진척되었는지를 시험하는 의식이 펼쳐지는 것이다.”


물 이파리 장식을 한 기둥머리, 12세기, 에투알(Étoile) 노트르담 수도원.




[1] 주교나 수도원장이 공석 중일 때 그 교구의 소득을 마음대로 처분하는 국왕의 특권을 일컫습니다.


[2] 그리자이유(grisaille) 기법이란 회색과 같은 단색만을 사용하여 농담, 명암 등을 표현하는 기법을 가리킵니다. [대문 사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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