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에 있다 보면 노인만큼이나 자주 마주하는 것이 죽음이다.
봄과 겨울이 엎치락뒤치락하던 환절기가 지나고 이제쯤이면 완연한 봄이구나 싶은 어느 날, 처음 보는 손님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얼굴만 보아도 광윤 할배의 자식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농협 창구에 마주 앉아 농담도 하고 노령연금도 찾아가시던 할배가 '요즘은 왜 안 오시나~'하고 생각했었는데 할배는 온데간데없고 그 얼굴을 빼다 박은 아들이 창구에 앉아 있었다. 할배의 상속서류를 들고서.
사람의 죽음은 모두 제각각인 듯싶지만 유난히 상속고객이 몰리는 시기가 있다. 뉴스에서는 한 여름의 폭염으로 사망소식을 많이 전하지만, 농협 창구에서 느끼기에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무렵 혹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무렵에 가장 사망소식을 많이 듣게 된다. 그리고 따사로운 봄, 무르익은 가을쯤 그 자제분들이 농협에 와서 상속업무를 처리한다.
상속업무는 꽤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려서 상속 한 건만 처리해도 한 나절이 다 날아가버리곤 한다. 피상속인(사망자)의 예금금액과 상속인의 수에 따라서 필요한 서류가 다르다. 농협의 경우는 예금, 대출 상속뿐만 아니라 조합원, 농협 카드, 농협 보험까지 함께 상속처리 해야 하기 때문에 유난히 오래 걸리거나 일처리가 늦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8,90세 노인이 결국 사망하셨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지만 얼굴과 목소리를 아는 사람의 죽음은 언제나 쉽지가 않다.
신규직원일 때 유난히 내게 짓궂은 할배 한 분이 있었다. 20대에 결혼도 안 한 나를 보며 대뜸 '아지맨지 아가씬지 모르겠다'하시며 말을 툭툭 내뱉는 할배였다. 그냥 나를 놀려보려 하는 말인 것을 알면서도 그 말이 그렇게도 듣기 싫었다. 내가 싫어하더나 말거나 할배는 매번 내게 그렇게 말했다. '아지맨지 아가씬지 모르겠는데 이거 좀 해도' 그 목소리가 듣기 싫어서 난 마음속으로 '어휴~ 저 할배 좀 안 오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들 소용은 없었다. 할배는 거의 매일 농협에 오는 단골손님이었고 나도 매일 출근하는 직원이었으니 나는 매일 싫은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할배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음이 철렁했다. 이렇게 짧게 볼 인연일 줄 알았으면 그렇게 미워하지 말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일을 하다 보면 당연히 미운 손님, 불편한 손님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그 할배의 죽음 이후에는 더 이상은 농협에 오는 할매할배들을 미워하고 싫어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밉다 밉다, 싫다 싫다 하지 않아도 결국 못 보게 되는 날이 생각보다 빨리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죽음에 나는 매번 마음을 철렁하게 될 것이 뻔하다.
이번 봄은 유난히도 꽃샘추위가 길게 느껴진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 할매할배들이 이 환절기를 잘 견디어 따스한 봄을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