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농협의 직원들은 복숭아를 먹지 않는다. 대신에 신비, 유명, 천하제일을 먹는다. 보통 사람들은 복숭아를 딱딱이 복숭아와 물렁이 복숭아로 혹은 털복숭아와 뺀질이복숭아 정도로만 구분한다. 하지만 복숭아 산지에서 근무하는 농협직원들은 시기별로 신비, 신선, 유명, 대극천, 천하제일, 마도카 등 품종으로 구분하여 먹는다. 사과나 포도도 마찬가지이다.
품종별로 맛과 식감, 향도 다르기 때문에 직원들마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다르다. 내 경우에는 신비복숭아를 좋아하는데 제일 먼저 수확되는 조생종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이든 처음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는 법이다. 직원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품종을 생산하는 농가를 줄줄이 꿰고 있다. 나도 신비 복숭아 농사를 짓는 조합원이 오면 '신비 언제쯤 나오나요?'하고 꼭 물어보게 된다. 한창 바쁠시기라 농협에 잘 보이지 않으면 일부러 전화를 걸어 직원들이 학수고대하고있음을 알리기도 한다.
농사꾼들은 자식같은 자기 과일을 자랑하고파 수확철이 되면 일부러 농협직원들 맛보라며 과일을 콘테나에 담아 오시기도 한다. 이것은 일종의 마케팅 수단이 되기도 하는데, 농협직원들은 철마다 맛나는 여러 농가의 과일을 두루 먹다보니 입맛이 꽤나 고급이다. 그렇다보니 직원의 지인들이 과일박사인 농협직원을 통해 과일을 주문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직원들에게 품질 좋은 과일을 좀 맛보이면 직거래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지난 여름에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최근 포도농가들 대부분이 기존에 짓던 작물을 포기하고 샤인머스켓으로 갈아탔기 때문이다. 나는 포도 중에서도 자옥을 제일 좋아한다. MBA나 캠벨 같은 머루포도는 너무 달고 알이 작지만 자옥은 거봉과 머루포도의 중간 쯤 되는 크기다. 거봉은 껍질을 손으로 까서 먹어야 하는 점이 귀찮지만 자옥은 그냥 포도 처럼 쪽하고 빨아 먹어도 되고 과즙이 풍부하고 적당히 달아서 내 입 맛에 딱이다. 그런데 자옥농사를 짓던 많은 농가가 샤인머스켓으로 품종을 바꾸어 버리는 바람에 작년에는 자옥을 맛볼 수 없었다.
사과는 부사를 제일 좋아한다. 겉보기에는 홍옥이나 홍로에 비해 뭔가 색도 얼룩덜룩하니 숙기가 덜 되었나 싶지만 부사는 칼로 껍질을 탁!칠 때부터 맛있는 사과인게 느껴진다. 그 손맛이 다르다. 너무 단단하지도 않고 너무 무르지도 않으며 물이 많고 당도가 좋다. 사과는 저장성도 좋아서 박스째로 구입할 때도 종종 있다. 물론 '상품'은 너무 비싸서 부담스럽고 '기주'라고 부르는 못난이 사과를 주로 사 먹는다. 개인적으로 맛도 못난이 사과가 더 맛있는 것 같다.
농사는 하늘에 달린 것이라 어떤 해는 뭘 먹어도 맛이 좋지만 어떤 해는 아무리 농사를 잘 짓는 집이라도 맛이 영 없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한 해도 특별히 게을리 하진 않았을 텐데 품질이 좋지 않거나 값이 좋지 않으면 내가 다 속상하다. 내 한 입이야 맛있는 신비나 부사를 먹기 위해 일 년을 그냥 기다리면 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