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농협에서 할 수 있는 일
언젠가 도시농협에 근무하는 연수원 동기가 물었다.
"시골농협은 대기번호가 10명도 안 넘기는 날이 많다며? 그럼 출근해서 뭐 해?"
그렇다. 절대적인 손님의 수는 적다. 대기표 자체를 뽑지 않아도 되는 날이 많다. 한 명 들어오고, 한 명 나가고, 또 한 명 들어오고, 또 한 명 나가고. 그렇다면 업무의 강도는? 높지 않다. 대부분이 입출금, 정기예금을 하러 오시고 가끔 통장분실, 자동이체, 인터넷뱅킹 등의 제신고업무 정도이다. 그 외 업무들은 말 그대로 '그 외 수준'으로 있다. 그렇다면 시골농협 직원들은... 뭘 할까?
먼저, 휴대폰을 고치는 업무를 한다. 입출금문자 알림 서비스를 받고 있던 할매할배들이 갑자기 휴대폰이 고장 났다며 찾아온다. 이 경우 대부분 스팸번호 등록을 해놓은 것이다. 꼭 입출금 문자 알림 서비스 문제가 아니더라도 휴대폰을 고쳐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전화벨소리가 안 들리거나, 전화할 때 상대방 목소리가 안 들리거나, 특정 어플이 작동하지 않을 때면 "이거 좀 곤치도~"하며 농협에 온다.
각종 해지업무를 도와준다. 자동이체 해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최종적으로 어떤 서비스를 해지해야 할 때도 농협을 찾는다. 스카이라이프나 다른 보험사의 보험상품 등 ARS나 전화상담원과 통화하는 일이 어르신들에게 힘든 숙제인 것이다. 농협직원은 높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서울말을 쓰는 상담원과 귀도 잘 안 들리고 인내심이 적은 할매할배 사이에서 통역사가 된다.
연말이 되면 경리가 된다. 경로당, 부녀회 등 각종 모임의 결산보고를 위해 농협에 온다. 통장이나 수기로 기록한 장부를 주면 농협직원은 그것을 엑셀로 정리해서 인쇄해 드린다. 수기로 기록한 것은 오류도 많아 그때마다 물어봐야한다. 인쇄도 해드린다. 필요한 부수보다 넉넉히 무료로!
처음 입사했을 때는 이런 업무들을 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이게 된다고?'
근처 우체국이나 면사무소에서는 이런 일을 해주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당연한 거지만. 그런데 왜 어째서 농협에서는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농협의 조직 특성상 조합장을 조합원들의 투표로 선출하고, 그 조합장이 직원들에 대한 인사권을 가지고 있으니 갑을병 관계로 인해 생긴 나쁜 풍토일 수도 있다. 그런 생각으로 처음에는 이런 '업무 외 업무'들을 해주는 관습에 적잖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십 년 정도 농협에서 일하면서 다른 이유들이 더 많다는 것을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오래된' 직원들이기 때문이다. 면사무소나 우체국은 1~2년에 한 번씩 인사이동으로 직원들이 자주 바뀌지만 시골농협의 직원들은 같은 면에서 수십 년을 일하게 된다. 인사이동이 있어도 같은 면 내에서 본, 지점 정도의 이동이거나 같은 사무소에서 담당업무가 바뀌는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시골농협에서는 단순한 직원과 손님의 관계를 넘어 서로 간의 오랜 정이 쌓이게 되는 것이다. 손님들도 농협 직원들은 조금 더 각별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고, 직원들도 손님들에 더 깊은 관심과 애정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이런 아들, 딸이 해줄 법한 일들을 우리 직원들이 대신해서 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이런 '서비스'로 진짜 해야 할 일이 뒤로 밀릴 때도 있다. 예전에는 그럴 때 한숨이 나기도 했지만, 나의 부모님이 점점 늙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다. 우리 엄마아빠도 언젠가는 시골농협에서 이런저런 황당한 부탁들을 하는 날이 오겠지. 그러면 어떤 마음씨 따뜻한 어떤 직원이 딸처럼 아들처럼 그런 일을 대신해 줄 수도 있겠지. 본디 정이란 손에서 손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그렇게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니깐.
P.S. 이 글을 보시고 혹시나 근처 농협에서 무리한 업무 외 업무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은 아니되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