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투리 네이티브 스피커
밤사이 내린 눈이 꽤나 쌓였다. 우리 지역은 눈이 자주 내리지 않는다. 눈길 운전이 익숙하지 않아 잔뜩 긴장한 채로 운전했더니 아침부터 피곤했다. 창 밖으로 다시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풍경이 보였다. 겨울철이 되면 논과 밭은 휴식에 들어가지만 시골농협의 은행창구는 꽤 바쁜 시기이다. 하지만 오늘은 이렇게 눈이 내리니 좀 조용하려나 생각했다.
적막을 깨고 옥화할매가 들어왔다. 하얀 머리 위에 하얀 눈이 살포시 내려앉아있었다. 할매는 곧장 내 앞에 와 앉았다. 옥화할매는 나의 팬이다. 시골농협의 할매할배 손님들은 좋아하는 직원들이 따로 있다. 꼭 그 직원 앞에서 업무를 본다.
처음 입사했을 때 할매할배들은 아무도 내게서 업무를 보려 하지 않았다.
"어르신~ 제가 해드릴게요! 저도 잘 할 수 있어요! 얼른 해드릴게요!" 하며 호객을 해도 '아이다 게안타-'며 15년 차 정숙대리 앞에 서서 기다렸다. 참 머쓱하고 섭섭했다. 결국 정숙대리 혼자서 줄 지어 기다리는 손님을 다 쳐내야 했다. 어쩔 도리가 없는 나는 정숙대리 뒤에 서서 업무를 조금 더 눈으로 익히는 수밖에 없었다. 한 차례 손님이 빠져나간 후 정숙대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낯설어가 그렇다, 또 익숙해지면 금방 괜찮을끼다" 참 고맙고 따뜻한 선배였다.
어쩌다 손님이 내 앞에 앉아 업무를 볼 때에도 어려움은 있었다. 내가 '어떤 업무 보시려고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하고 물으면 할매할매들은 '머라캐쌋노? 머라꼬?' 하며 반문했다. 목소리가 작아서 그런가 싶어 크게 외쳐보아도 '이 아가씨가 머라카노?' 하는 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기리까이해도' 하며 통장과 도장을 던지는 할매에게 '네? 뭐하라구요?'하고 물어봐도 귀찮은 표정만 보일 뿐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통장을 펼쳐본 후에야 그 말이 '예금 재예치'를 하러 왔다는 뜻인 줄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말이 통하지 않으니 손님이 나에게 오지 않으려는 것은 당연했다.
할매할배들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바로 '사투리'였다. 나 역시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사투리야 숨 쉬듯 할 수 있지만, 읍면리까지 들어오는 시골의 사투리는 그 깊이가 달랐다. 다른 직원들은 어떤가 싶어 유심히 살펴보니 과연 네이티브 같은 유창한 사투리였다.
나도 한 단계 레벨업 된 사투리를 쓰기 위해 노력을 했다. 처음에는 '너무 할매같나?' 싶어 부끄럽고 어색했다. 사투리를 쓸 때는 목소리 마저 바뀌었다. 말문이 트이니 귀도 트였다. 할매할매들의 말을 알아듣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사투리를 노력하는 그 모습이 참 웃겼을 것 같다.
시간이 해결해 준 것이었는지 사투리 덕이었는지 나에게도 차츰차츰 손님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젠 나만을 찾는 팬들도 꽤 생겼다.
"눈도 이래 많이 오는데 머할라고 오셨능교?" 옥화할매의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주며 물었다.
"십만 원만 찾아도" 옥화할매가 칼톤에 통장과 도장은 툭 던졌다.
"십만 원은 말라꼬? 눈 때문에 시내도 못나갈낀데"
"보름 아니가, 부럼 깨라고" 옥화할매가 이번엔 칼톤에 강정과 땅콩을 툭 던졌다.
"아이고~ 부럼땜에 부러왔네" 하고 말하자 옥화할매는 온 얼굴에 주름을 잡으며 웃는다. 나의 시시껄렁한 말장난에도 내 팬은 빵빵 터진다.
시골의 할매할배들은 낯선 것에는 잔뜩 경계의 벽을 쌓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높인 쌓았던 벽만큼이나 아니 그 보다 더 깊이 마음을 퍼내어 우리에게 준다. 항상 무언가를 주고 싶어, 먹이고 싶어 안달이다. 보름에는 부럼을, 동지에는 팥죽을, 여름에는 아이스크림을. 어떤 때는 이뻐서 준다면 돈까지 쥐어 주실 때도 있다.
반짝이는 새것보다는 편안하고 익숙한 오래된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참 좋다. 새것은 금방 헌 것이 되어버리지만 오래된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오래되어 버리고 마니깐. 이런 할매할배들이 더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