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과 오지랖
할매할배들은 남 일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그런 관심을 표현하는 것도 거리낌이 없다. 신규직원이 오면 나이, 결혼여부, 집주소 등의 개인정보를 물어보는 것은 안부인사 수준이다. 관심의 정도가 직원 신상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는 수준을 넘어 오지랖이 되는 순간도 있다.
"이제 조국을 위해 이바지를 해야 될 때가 안 됐나?"
"네?"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싶은 얼굴로 되묻는 영자대리에게 상규할배가 말했다.
"이제 조국을 위해 일할 일꾼들을 만들어내야지." 영자대리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진다.
영자대리는 결혼한 지 1년 정도 지났다. 농협직원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듣게 되는 이야기가 '아기'타령이다. 다짜고짜 와서 '애는? 아직 소식 없고?' 하며 할매할배들이 물어본다. 아이가 생기면 그다음은 성별이다. 딸을 낳으면 아들도 하나 낳아야지, 아들을 낳으면 요새는 딸이 효도한다며 훈수를 둔다. 요즘 세상에 시부모, 친정부모도 못하는 말을 눈치 볼 필요 없는 남의 자식이라 그런지 상규할배는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동안 셀 수 없이 많이 들어와서 이골이 난 영자대리였지만 이번에는 참기 힘들었나 보다.
"어르신,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하시면 좋겠어요." 딱 잘라 말했다. 영자대리의 단호한 말투에 머쓱해진 상규할배는 '난 니 생각해가 그런 거지...' 하면서는 말끝을 흐리고는 유유히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 일이 있은 후, 오랜만에 상규할배가 농협에 왔다. 손에 든 두툼한 봉투 뭉치를 보니 공과금을 내려온 모양이었다. 상규할배의 등장을 영자대리도 의식한 모양이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영자대리가 누른 호출버튼에 상규할배가 번호표를 들며 그 앞에 섰다. 상규할배는 뜯지도 않은 봉투째로 영자대리 앞에 툭 내려놓았다.
"어르신, 다음부터는 봉투정리도 좀 해서 가져오세요." 여전히 냉랭한 말투였다. 봉투를 뜯어 공과금 용지를 정리하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총금액을 계산하던 영자대리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어? 수도세가 와이래 많이 나왔노"
상규할배는 별 대꾸가 없다.
"수도세가 8만 원이나 나왔어요, 지난달보다 3배도 넘는다."
"8만 원이 나왔다고?" 눈썹을 찡그리며 상규할배가 되묻는다.
"겨울에 자주 씻는 것도 아닐 텐데 너무 많이 나왔네. 어르신 어디 물 새는 거 아니가? 어디 동파됐을지도 모르니깐 한 번 알아보세요." 그 말에 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뒤 상규할배가 또 농협에 왔다. 동파된 게 맞았다고 한다. 다행히 수도요금은 어느 정도 감면받을 수 있다고 한다. 상규할배는 바로 옆 하나로마트에서 산 비타500박스를 영자대리 앞에 놓았다.
"니가 그캐줘가 빨리 알았다 아이가. 고맙데이"
영자대리는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하면서 직원들이랑 나눠 먹을게요, 고맙습니다며 답했다.
함께 보낸 세월만큼이나 직원도 손님을 닮아간다. 어르신들의 관심과 오지랖은 때론 불편하고 불쾌감을 줄 때도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진심은 '자식 같아서'일 것이다. 자식 같은 마음에 잔소리도 하고 이래저래 훈수도 두다 보면 쓸데없는 말까지 하게 된다. 우리 엄마, 아빠처럼. 그런 할매할배들을 보다 보니 직원들도 '내 부모 같아서' 관심 갖게 된다. 그래서 '엄마 쫌!' 하는 말로 어르신들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할 때도 있지만, 자제가 안 되는 관심과 오지랖에 새초롬했던 마음이 녹아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