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청이나 회사, 학교 등에서 각기 소속된 사람임을 증명하는 문서.
다음 어학사전에 따르면 신분증이란 '관청, 학교, 회사, 기관 등에서 그 신분을 확인해 주는 내용을 적은 증명서'를 뜻한다. 내가 나임을 증명하기 위해 들고 다니는 증명서인 것이다. 보통 은행이나 관공서에서 업무를 볼 때 꼭 필요한 물건 중 하나이다. 하지만 오늘도 농협의 할매할배들은 당당히 외친다.
일반적으로 단순한 입출금 거래는 통장과 도장만 있으면 가능하다. 하지만 통장이나 도장을 잃어버렸을 때, 정기예적금 만기에 재예치 업무를 할 때에는 반드시 신분증이 필요하다. 통장이나 도장이 없어도 일단 신분증만 있으면 해결이 된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그 신분증을 깜빡하고 들고 오지 않는 할매할배들이 왕왕 있다. 매번 그러는 것은 아니고, 말 그대로 '깜빡' 실수로 챙겨 오지 못한 것이다.
느리고 무거운 걸음으로 시간 내어 농협에 왔건만 왜 하필 손바닥만 한 그 작은 신분증을 깜빡했을까. 자꾸만 깜빡깜빡하는 본인이 제일 원망스럽다. 하지만 다시 왔다 갔다 하자니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거짓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도둑질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내 돈 내가 어떻게 하겠다는데 고깟 신분증이 뭐 대수라고 그런 수고를 해야 하나 싶다. 무엇보다 내가 나임을 나도 알고 하늘도 알고 농협 직원들도 아는데 이번 한 번만 어떻게 안되나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온다.
그래서 '어르신~ 신분증이 있어야 돼요~' 하는 농협직원의 말에 유행어처럼 말해 본다.
"내 얼굴이 신분증 아이가~ 그냥 좀 해도~"
"어르신, 그래도 저희가 신분증은 꼭 받아야 돼서 그래요~"
"니 내 모르나, 내 돈 내가 다시 눌러놓는다는데(재예치하겠다는데) 뭐가 이래 꼬꾸랍노 (왜 이렇게 깐깐하게 굴어요)"
이런 막무가내의 투정에 처음 입사했을 때는 참 난감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이니 이렇게도 받아치게 된다.
"나도 어르신 잘 알지~ 그래도 얼굴을 요 기계에 넣었다 뺄 수는 없잖아요. 요새는(요즘은) 신분증을 여기 안 넣으면 컴퓨터가 안되니깐 그러지~"
"그러면 내가 오따가(이따가) 금방 갖다 줄 테니깐 일단 해도"
"어차피 이따가 갖다 줄 거면 그때 얼른 해드릴게요. 제가 딱 바루코 있다가 (기다리고 있다가) 어르신 오시면 바~로 해드릴게요"
할매할배와 직원과의 이런 실랑이가 계속 이어지면 결국 책임자가 나서게 된다.
"어르신, 요새는 갈수록 다 꼬꾸라와 지지요. 우리도 안그라고 싶은데 어쩔 수가 없어요. 신분증 안 받고 했다가 감사 나오면 우리 직원이 큰일 난다 아잉교. 댁이 어디신데예. 왔다 갔다 하기 힘드시면 제가 태워드릴 테니깐 얼른 가시더(어서 같이 갑시다)."
결국 할매할배들의 승리다. 할매할배들은 최상무의 차를 타고 편안히 집에 들러 신분증을 챙기고 예금 재예치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집에 가기 전에 하나로마트에 들러 두유 1박스, 소주 1박스, 맥심 모카커피 1박스 등 묵직한 장을 보고 집으로 향한다.
생각해 보면 어르신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내가 나인 것을 나도 알고 너도 아는데 그 작은 네모가 무엇이라고 없으면 안 되는 것일까. 내 얼굴, 내 자체가 여기에 와 있는데 결국 신분증이 없다고 '나'임을 부정하는 세상이 더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주 옛날에는 신분증이 없이도 큰 문제없이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서로 간의 믿음으로 해결되던 일들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세상의 허들이 한 칸씩 더 높아지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더 교묘해지니 갈수록 꼬구라와지는 (각박해지는) 것 같다. 허들이 높아질수록 옛 시대를 더 오래 살았던 이들에게는 세상살이가 더 갑갑해진다. 그래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상 그들도 새로운 방식을 따를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 더 그 마음을 헤아리고,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친절을 베풀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