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거 내가 할게.

심리상담사의 아침 편지

by 나무둘

아니 이거 내가 할게.


집에 계신 분께서 아침부터 큰 사고를 쳤습니다.

요플레를 만들겠다고 우유를 유리그릇에 한가득 붓더니 어인 일인지 냉큼 바닥에 다 쏟아 버렸습니다.

그 양이 그렇게 많을 줄이야.

주방을 온통 다 적시고 의자와 식탁까지 다 적신 양이 1리터는 넘어 보였습니다.

아마 바닥에 쏟아져 있으니까 더 많아 보였겠지요.


어쨌든 유리그릇에 담겨 있어야 할 우유가 바닥에 흥건히 흐르고 있는 이 사태.

잠깐 바라보다가 서둘러 화장실에 가서 수건을 물에 적셔 가져왔습니다.

바닥을 조금 닦아 보니 도무지 한 장으로는 감당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수건을 더 가져와야 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현행범에게 물어봤습니다.


수건 더 가져올까?

아니 이거 내가 할게.


눈이 번쩍.

이렇게 놀라운 이야기라니.


결자해지.

내가 엎었으니 내가 닦는다.

내가 저지른 문제니까 내가 푼다.


참 놀라운 말이었습니다.

사람이 정신이 혼란스럽고 흔들릴 때는 이런 말하기가 좀처럼 어렵지요.

집에 계신 분께서 많이 회복하셨구나.

요새는 스트레스가 좀 줄었나.

내가 집안일을 적당히 잘하고 있는 건가.

이런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다 부질없는 망상이었습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지요.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우리는 잠깐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때 집에 계신 분께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 왜냐고 묻지 않겠어.

왜냐고 묻는 건 안 중요해.


아침부터 무슨 소린가 했더니

이제는 '내 인생이 왜 이렇지? 이거는 왜 이렇지? 저건 왜 저것밖에 안 되어 있지?'

이런 질문을 안 하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방점을 찍었습니다.


'왜'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야!

지금부터 어떻게 할 건가!


의기가 넘치는 눈빛.

아침 댓바람부터 참 어색하고 희한했지만

어쨌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는 우주의 섭리로 그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주방 바닥을 우윳빛으로 물들인 우주의 기막힌 타이밍.


자기가 내뱉었던 말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그 의기가 진심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정말로 '어떻게'에만 집중하던 그대.

아무 말 없이 치우던 그대가 어찌나 아름답던지.

아침에 뜨는 태양을 보는 듯했습니다.


아니 이거 내가 할게.

내가 직접 하겠다는 그 정신은 태양을 닮았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내가 하는 존재.

오직 태양만이 그렇게 하지요.

온 우주에 어떤 상황이 와도 꼭 그렇게 실행하는 태양.


오늘 아침에도 해가 떴습니다.

자기의 언약을 틀림없이 지켰습니다.

귀찮아서 뜨기가 싫었어, 이런 말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집에 계신 분이 태양을 닮았습니다.

참 감사한 오늘입니다.

오늘은 집 밖에도 집 안에도 해가 떴습니다.


당신은 오늘 무엇을 하나요?

'이거 내가 할게'라고 말하기 싫은 그것은 무엇인가요?

그럼에도 내가 하려고 작정한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 함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거 내가 할게'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도 태양 같아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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