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소송』 (1925)
카프카의 장편소설『소송』은 이렇게 시작한다.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한 것이 틀림없다. 그가 무슨 특별한 나쁜 짓을 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p. 9)
그리고 이렇게 끝난다.
그러나 K의 목에 한 남자의 양손이 놓이더니 동시에 다른 남자가 그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고 두 번 돌렸다. K는 흐려져 가는 눈으로 두 남자가 바로 자기 눈앞에서 서로 뺨을 맞대고서 최종 판결을 지켜보는 것을 보았다. “개 같군!” 그가 말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살아남을 것 같았다. (p. 287)
『소송』은 서른 번째 생일 아침에 체포되어 서른한 번째 생일 전날 처형당하는 요제프 K의 1년을 다룬 이야기다. 체포-소송-사형집행이라는 단순한 서사구조에도 불구하고고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지 선뜻 말하기는 쉽지 않다. 사형까지 당하는 K의 죄가 무엇인지 소설이 끝끝내 말해주지 않는 데다가, 알레고리로도 읽을 수 있는 풍부한 다의성 때문이다.
다의적 해석의 출발은 ‘K’라는 이름이다. 카프카(Kafka) 자신을 투영한 작품들이어서 그런지, 그의 ‘고독 3부작’ 주인공들 이름은 모두 K로 시작한다. 『실종자』의 주인공은 칼(Karl)이며, 『소송』과『성』의 주인공은 둘 다 K이다. 머리글자로만 존재하는 ‘K’는 독자가 풍성한 대입을 하도록 존재의 영역을 넓힌다. 그래서 K는 어떤 누군가이기도 하며, 또 우리 모두가 되기도 한다.
소설의 비 완결성 또한 해석을 어렵게 만드는 부분이다. ‘고독 3부작’은 모두 미완의 작품이다. 『실종자』는 완성하지 못한 장으로 끝나고, 『성』은 마침표도 찍지 못한 채 문장 중간에서 끝나버린다. 『소송』은 ‘체포’라는 시작과 ‘종말’이라는 끝이 있어 상대적으로 완성도가 있어 보이지만, ‘미완성 장들’ 혹은 ‘미완성 원고들’이라고 이름 붙은 장들이 작품 안으로 진입하지 못한 채 부록처럼 붙어 있다.
1914년 8월 이 소설의 집필을 시작했을 때, 카프카는 시작과 결말을 미리 써두고 중간 장들을 메우는 형식으로 써나갔다. 첫 장과 마지막 장 사이 어딘가에 들어가야 했지만 결국 소설 밖으로 밀려나 있는 6개의 장. 이 이야기들을 어디다 끼워 넣는 것이 맞을지 프라하의 묘지에 누워 있는 작가는 알고 있을까. 불태워 버리라고 했으니 완성하지 않고 출판한 책임을 작가에게 물을 수는 없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소송』의 생명력이 바로 비 완결성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성서의 원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사회제도의 모순과 부조리, 인간의 원초적 불안과 우울, 권력에 대한 투쟁, 개혁의 이상 속에서 영원히 화석화를 거부하는 작품 『소송』. ‘소설도 우리를 통해 증식을 거듭합니다’(『읽다』 p. 67)라는 김영하 작가의 말을 떠올리며, 내 안에서 이 소설은 어떤 방향으로 증식해 나갔는지 이야기해보겠다.
서른 번째 생일에 아침밥을 기다리던 K는 두 명의 남자에 의해 체포된다. 체포는 전격적으로 이루어진다. 흔한 경고장 하나도 없다. ‘도대체 이유가 뭐죠?’라고 물어도 두 남자는 그런 걸 말해 줄 처지가 아니라고 한다. 체포하는데 무슨 죄인지 말해주지도 않는다니.
인상적인 것은 K의 반응이다. K는 체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니는 직장의 직원들이 꾸민 장난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옆 방의 여자에게는 체포 장면을 연극적 설정을 통해 설명해 주기도 한다. 1년 뒤 결국 ‘개처럼’ 처형될 운명인데도 말이다. 카프카가 좋아했다는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말이 생각나는 상황이다.
인간은 도살업자가 자기들을 하나하나 고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들판에서 뛰어노는 어린 양과 같다
(홍성광 『독일문학기행』재인용).
체포는 당했지만, 죄에 대한 인식도 닥쳐올 운명에 대한 예감도 없는 K. 그의 죄는 무엇일까.
K의 체포 상황은 특이하다. 은행의 자금 담당 부장으로서 직장에도 계속 다니고 사람들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다. K는 자신을 고발한 법원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이곳 저 곳을 다녀 보지만 누구 하나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는다. 결국 ‘도대체 인간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인가’라는 한탄에 이르게 되는데, 이 말에 답이 있다. K의 죄는 바로 인간, 사유 능력을 상실한 무지한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간다는 착각을 하지만 언제나 사회 체제, 법, 정치, 권력 등에 예속되어 있으며, 이데올로기와 전쟁 때문에 휘둘린다. 예속과 휘둘림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으려면, 제대로 들여다보고 비판할 수 있는 사유 능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K에게는 이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체포 장면으로 다시 가 보자. K는 생일에 침대 위에 있다가 느닷없이 두 남자에게 체포된다. 두 남자의 이름은 ‘빌렘’과 ‘프란츠’. 카프카가 『소송』을 쓰기 시작한 1914년에, 동맹을 맺고 1차 세계대전의 빌미가 되는 전쟁을 일으킨 두 황제, 독일의 빌헬름 2세,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를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이다. 유례없는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전쟁이 시작되어도 그 심각성을 모르던 사람들처럼, 빌렘과 프란츠에 의한 체포가 자신에 대한 참형으로 이어질 거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하는 K는 느긋하기만 하다. 그래서 체포를 장난으로도 생각하고, 연극으로도 재현한다. K의 죄는 바로 이것이다. 어쩌면 그의 죄는 체포 전보다 체포 후에 더 커진 것인지도 모른다. 법, 정치권력, 전쟁에 예속된 자신의 상태에 대해 무지함이 K가 저지른 죄의 시작이다.
K에게 또 다른 죄가 있다면 법에 대한 막연한 외경심으로 현실의 법체계에 무지하다는 것이었다. K는 순진한 법 이상주의자다. 죄 없는 사람은 무죄방면 해주는 것이 법의 대원칙이라는 믿음을 확고히 갖고 있다. 정의의 저울로 정확하게 죄를 가려줄 법원의 권위에 대한 경외 때문이다.
소송에 대한 조언을 얻기 위해 K가 만난 화가의 작품에는 의자에서 막 일어서는 판사를 그린 그림이 있었다. 현직 판사가 요구한 대로 그린 그림이었다. 판사가 앉아 있던 의자 등받이 뒤쪽에는 ‘정의의 여신’이 그려져 있는데, 정의의 여신과 승리의 여신을 하나로 합쳐 놓은 듯한 형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 K는 이렇게 한 마디 내뱉는다.
정의의 여신은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울이 흔들리고 공정한 판결을 내릴 수 없지요. (p.179)
이 말에서 K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법 집행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K가 법에 기대하는 것은 공정한 판결이다. 하지만 법원 사무처가 있는 건물의 탁한 공기가 상징하듯, 소설이 그리는 법의 세계는 투명함이나 공정함과는 거리가 멀다. 위계가 분명한 권력 구조 속에서 뇌물이 쉽게 오가고 화가의 말처럼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심각한 죄를 끌어내기도 한다. 죄는 대리인들의 싸움으로 덜어지기도하고 지워지기도 하는데 그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오늘날의 전관예우 변호사들을 연상시키는 ‘대변호사’들이다. 그들은 ‘무면허 변호사’나 ‘소변호사’보다 무죄판결을 받아낼 가능성이 더 크다.
소송의 한복판에서 자신을 스스로 방어하고자 했던 K의 불행은 이런 사실들을 알아가며 지쳐간다는 사실이었다. 법에 대해 몰랐을 때보다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K는 더욱더 법의 보호에서 멀어져갔다. 법은 불변의 진리도 아니고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공정한 잣대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진화하여 엄청난 강제성을 행사하고 있었고, 법체계 꼭대기에 있어서 얼굴 한 번 볼 수 없는 최고 권력층은 죄와는 상관없이 유연하게 법을 운용하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법의 악의적 운용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거대한 법원 조직은 말하자면 영원한 부유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만일 누군가가 자신의 위치에서 독자적으로 무언가를 바꿔버리면, 그것은 자기 발아래에 있는 지반을 없애는 행위와 같아서 자신만 추락하게 될 뿐이고, 그 거대한 조직은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사소한 장애는 다른 곳에서 손쉽게 보완하여 이전과 다름없는 상태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조직은 전보다 더 단호하고, 더 주의 깊고, 더 엄격하고, 더 악의적이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p. 149)
K의 상황은 아포리아(aporia)다. 그리스어로 ‘막다른 곳에 다다름’이라는 뜻을 가진 이 말은 철학 용어로 전혀 해결의 방안을 찾을 수 없는 난관의 상태를 뜻한다. 하지만 정작 K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부족하다. 아포리아를 아포리아로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K의 아포리아는 스스로 불러온 것이다. 악의적인 억압체계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던 ‘무지’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압제자가 들이닥쳐 그를 묶어도 그는 그것을 연극 정도로 가볍게 생각한다. 죄가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묻지도 않는다. 법의 언저리에 있는 주변인들의 말만 듣고 법의 핵심으로는 다가갈 생각도 하지 않는다. 설마 법이 나에게 나쁜 짓을 하겠느냐는 순진한 믿음과 어차피 최고 권력과는 맞설 수 없다는 이른 체념의 합작이 K의 아포리아를 더 깊게 미궁으로 몰아넣는다. 사형집행인이 왔을 때 ‘늙은 조연배우들을 내게 보냈군’이라고 생각하며 ‘당신들은 어느 극장에 출연하나요’라고 물을 정도다.
억압이 억압인 줄 모르는 무사유의 상태, 바로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비본래성’의 삶이다. 영국 철학자 버나드 윌리엄스는 그의 저서『데카르트』에서 ‘오직 깨어 있는 상황에서만 꿈을 설명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깨어서 꿈을 설명하는 상태는 사르트르, 카뮈와 같은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본래성’의 상태, 즉 인간이 그가 처한 조건의 참된 본질을 알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깨어나지 않고 계속 꿈만 꾸고 있다면, 그것은 거짓 믿음과 환상 속에 살아가는 ‘비본래성’의 삶을 의미한다.
처형당하며 ‘개 같군!’이라는 말을 남긴 K. 삶의 마지막 순간에야 자신이 비본래성의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걸까.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살아남을 것 같았다’라는 카프카의 마지막 문장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자체에 대한 인식의 부족, 즉 무사유의 삶이 바로 죄이며 치욕이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K처럼 무지의 아포리아에 빠지지 않으려면 꾸었던 꿈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깨어나는 일이 먼저다.
프란츠 카프카 『소송』(1925), 권혁준 옮김, 문학동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