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전에 해야 하는 MRI 일정을 하루 앞당겨 잡아줄 수 있다는 연락이 왔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하고 변경을 해달라 하고 보니, 티칭이 제일 늦도록 있는 수요일 저녁시간이었다. 오전 오후를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확인을 하니 저녁 7:45 이란다...
검사 한번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데 이리 밤 시간에 해주겠다 하는 걸 보면 정말 나는 암환자로구나 실감이 났다. 레슨들을 취소하고 집에서 쉬다가 검사를 받으러 갈까 하다가, 그래 봤자 머릿속에 엄청난 잡념들만 떠오를 테고, 나는 또다시 인터넷 정보의 파도 속에서 이리저리 휩쓸리며 혼란스러워할 게 뻔한지라, 예정대로 레슨을 다 마치고 시간에 맞춰 검사를 받으러 가기로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레슨을 하고 아이들을 만나는 동안만큼은 잠시나마 내가 암 진단받은 환자임을 잊고, 늘 그렇듯이 아이들과 웃고 떠들며 레슨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 편이 몸은 좀 힘들어도 마음은 덜 괴로웠다.
친언니만큼이나 가까운 교회의 언니가 몇 번씩 전화에 문자에, 검사 몇 시냐고 묻고 채근을 해서 할 수 없이 얘길 했더니 끝나는 시간에 맞춰 와있겠다고 했다. 늦은 저녁시간에 혼자 검사받고 나오는 기분이 별로일 거라며 (언니는 몇 년 전에 미국에서 갑상선암 수술을 받은 암 선배님이다) 걱정 말고 잘 검사받고 나와서 보자고 문자가 왔다. 한 시간 남짓 걸린다는 MRI 촬영을 받으러 들어간 병원은, 저녁시간이라서인지 코로나 시국이라서인지 그야말로 나 말고는 다른 환자는 한 명도 볼 수 없었고, 적막감만 감돌았다. 심난해하는 나를 위로해주며 농담을 걸고 이런저런 얘길 해주는 간호사와 함께 검사실로 들어가니, 엄청난 굉음이 나는 무시무시한 MRI 기계가 보였고, 팔뚝에 주삿바늘을 꼽고 검사 관련해서 설명을 들었다. 좀 시끄럽긴 했지만, 많이 힘이 드는 검사는 아니었다. 다만, 그 검사를 혼자 받으러 온 내자신이 좀 서글퍼졌고 결국 치료도 검사도 수술도 오롯이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구나 실감이 났다.
MRI 검사를 하면서 어느 정도는 판독이 가능해서 대강의 설명을 해주기도 한다는데, 내 검사를 해준 선생님은 낼모레 사이에 너한테 연락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줄 거니 피곤할텐데 어서 빨리 집에 가 쉬어라 하고 더 이상의 얘기는 없었지만, MRI 상에서 또 다른 이상소견이 발견되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검사를 다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텅 빈 로비에서 혼자 기도를 하며 나를 기다리는 언니가 보였다. 같은 경험을 해본 사람이 누구보다 그 심정을 잘 알아서일까, 언니가 나보다 더 걱정스러운 얼굴이었고, 그래도 애써 반갑게 인사하고 입맛 없어도 꼭 먹으라며 언니가 갖다 준 그날 저녁 갈비탕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맛난 저녁과 검사의 긴장감 탓으로 그날 밤엔 며칠 만에 수면제도 없이 꿀잠을 잤고, 다음날 오후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암이 발견된 위치 바로 옆쪽에 또 다른 음영이 발견되었다고, 일단 수술 날짜를 일주일 미루고 MRI Biopsy 라는 검사를 하는 게 낫겠다는 말을 듣고 나니, 내 마음은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문가의 조언이 또다시 절실해진 나는, 예전 교회에서 알던 후배(쓰다보니 후배는 브런치 작가님 이시다)의 의사남편분 생각이 갑자기 났고, 역시나 염치 불고하고 문자를 했다. 내 얘기인 줄 모르고 답을 하던 후배는, 유방암이야, 내 얘기야 하니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게 문자상으로도 역력히 나타났고, 말을 한 내가 오히려 미안해지는 상황이었다. 남편분은 바쁘신 와중에 전화통화로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고, 침착하게 조리 있게 그러나 아주 깔끔 단호하게 마무리를 해주셨다.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는 검사라 생각하라셔서, 결국 그리 하기로 결정을 했다. 그 이후로도 그 남편분과 후배는 나를 위해 기도와 응원을 계속해주었으며 선물 패키지와 카드로 내 마음을 뭉클하게 해 주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인터넷의 수많은 비전문가의 말들은 공포심만 일으킬 뿐, 환자에게 득이 되는 내용들이 아니었던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마음속 갈등의 증폭만 일으킬 뿐, 실질적으로 내 치료와 수술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사람이 나약한 존재이고 절박한 심정이 들면 어딘가에서라도 내 경우와 비슷한 케이스를 찾아보고 싶고, 그 예후를 알고 싶고... 그래서 끊임없이 찾아보고 그러다 보면 반나절이, 온밤이 훌쩍 지나가곤 했다. 그러나 백사람에게 물으면 백가지의 의견이 나오고, 백가지의 다른 경우의 수가 나오고... 오히려 그게 더 두렵고 힘들었다.
여하튼 또 다른 조직검사를 결정하고, 첫 번의 검사만을 예상하고 별다른 긴장감 없이 갔던 두 번째 조직검사, MRI Biopsy 는, 그 이후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통틀어 나에게 가장 두렵고 힘들었던 검사였고, 검사를 받고 온 날 밤 나는 남편에게 처음으로 아무래도 서울로 빨리 가야겠다는 말을 했다. 검사시간만 한시간반이 넘게 걸렸고, 검사후 저녁시간에 예상치못한 부작용으로 담당의사와 통화하고, 이렇게 밤새 상태가 나아지지 않으면 응급실을 가야하나 걱정을 하다가, 그야말로 날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
처음으로 혼자서 수술받고 치료받는 것에 대한 자신이 없어졌고, 동시에 감당하지 못할 공포감이 몰려왔으며 그 며칠 상간에 거의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그야말로 멘붕이 뭔지 실감하며 시간을 보냈다. 다시금 서부의 경험자 언니에게 연락을 하고, 일단 잠을 자야 사람이 판단도 제대로 할 수 있고 일상이 가능해지니 의사한테 처방을 받아 수면제를 먹고라고 잠을 자라는 말에, 의사를 통해 처방을 받고 그 약을 먹고 나서 수술 전까지 일주일을 편히 잠을 자고, 기력을 회복하고 다시금 마음을 재정비하며 이런저런 마음의 준비와 정리를 할 수 있었다.
먹고 자고 움직이고 웃고 울고... 이런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 것이며,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매일매일이 기적 같은 날들임을 그때 절절히 느꼈고, 그때의 시간들 덕분에 수술도 그 이후의 치료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잘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두 번의 검사와 그 결과를 들고 의사와 한 번의 미팅을 더 한 후, 결국 내 수술일정은 처음 예정보다 일주일 미뤄졌고, 남편은 그 이후 방사선 치료 때 맞춰 오라고 해두고, 아이들에겐 여전히 "암"이라는 말은 꺼내지 못한 채 최종 수술 날짜와 구체적인 일정이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