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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통증에 점수를 매길 수 있다면

미국 문화 적응하기 11

by ZAMBY






이거슨, 새로운 장소에서 우리가 느끼는 스트레스와 적응도의 상관관계에 관한 그래프다.

좀 절망(?)스러운 것은,

이 그래프가 일관된 우상향 직선을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르락 내리락.

빙글빙글 돌면서.

아. 이제 좀 살만한가. 싶을때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우리를 확, 넘어뜨린다는 사실이다.

어제 절망의 늪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온 우리를 조롱한다.

"메롱. 끝날 줄 알았지?"

저기 어딘가, 나선의 어느 점에서

내가 미끄럼틀을 타고 막 고꾸라지고 있는 순간에,

사람들은 말한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너가 너무 예민한거야.

복에 겨워서 저러지.


그래도 저 그래프에서 낙관적인 점은

그래듀얼리. 앱솔루틀리. 리터럴리.

우상향 한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의 낙관적 세계관을 반영한 나선의 추세다.

그리고 나도 그런 옵티미스틱한 인생관을 믿고 싶은 비관적 인간으로서

일년에 열두번 저 나선위에서

열심히 뱅글뱅글 돌고있다.


저 그래프는 이민자들의 적응과 스트레스에 관한 연구 결과이지만

어쩌면 내가 인생을 살면서 겪는 고통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는것 같다.


나는 제왕절개 수술로 두 아이를 품에 안았다.

첫 아이를 출산하던 날

예정일을 일주일정도 남겨두고 이슬이 비쳤고

그로부터 약 12시간 후

이 정도면 아이가 나올 준비가 되었겠다 싶을 만큼

몇 분 간격으로 진통이 시작되었을 때 잠든 남편을 깨워 산부인과로 갔다.

새벽 1시가 넘은 시각이라 길에는 차들도 많지 않았고 병원 정문은 닫혀있었다.

침대에 누워 초음파를 보았던 거 같다.

관장약을 먹은 후부터는 본격적인 고통이 시작되었다.

말로만 듣던 내진, 이라는 걸 하고 나서는

아, 이래서 다들 출산을 고통의 최고로 치는 거구나 싶었다.

남편의 증언에 따르면 통증 측정기 같은 게 꺾은선그래프를 그리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꼭짓점이 최고치로 올라가있더라는 것이다.

뭐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나는 내 첫아이를 잠결속에서 안아볼 수 있었지만

그때 내 아랫배와 골반에서부터 올라오는 전신의 통증은 어렴풋이 몸에 남아있다.


나는 아직도 남편이 보았다는 그 뾰족한 선이

통증 그래프인지 다른 것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러한 통증은 꺾은 선 그래프로 시각화가 가능한가 보다. 생각할 뿐.

궁금하여 찾아보니

- 고통 순위에서 출산의 고통은 6위였다. -


몸의 통증만이 아니라

마음의 통증도 수치화가 가능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싶을 때가 있다.


차마 글로 담고 싶지도 않은 그런 고통들.

누구나 이 글을 읽으며 머릿속을 스쳐가는,

다시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의 통증은

어쩌면 천, 만, 백만, 조. 이렇게 서열을 매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룹화하여

이런 고통은 A그룹, 이런 것은 B그룹..으로 분류하여 혹여 그러한 감정을 느껴보지 못한 이들에게

대략 가늠할 수 있는 실마리를 줄 수도 있다.

또는 같은 그룹에 속한 아픔끼리

오차범위를 설정하여 공감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본다.


그런데 살다 보면 어떤 형태의 고통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제법 오랜 역사적 토대를 가지고 있어

이 고통이 과연 수치화되기는 할까.

이 감정의 폭과 깊이를 객관화하여

나 스스로에게 조차 자신 있게 보여 줄 수나 있을까. 싶은 순간이 있다.


그러한 류의 심리적 통증을 마주할 때 무척 난감하다.

나 자신에게 조차 설득력 있게 주장하지 못하는,

그러나 극심한 통증.

소리 내어 울거나 비명을 지르고 싶어도

이래도 되나 싶어 삼켜야 하는 아픔.


결국에 나의 나약함에 대한 자책.

혹은 내 감정의 사치스러움으로 비하되어

마음 깊은 곳에 버려두게 되는 그런 것.

삶의 궤적이 적절한 속도와 중력에 의해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을 때.

타인의 시선에서 절묘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아름다운 타원을 그리고 있을 때.


에이 그 정도로 뭘 그래.

너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봐.

힘들 것도 없다.

곧 괜찮아질 거야.

같은 인사가 내 안에서부터 전해질 때

나는 당혹스럽고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웃는다.

묻지도 않는데 먼저 괜찮아요~~ 하고 만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혹은 '아무렇긴' 하지만

이 정도는 견뎌낼 수 있는 ‘괜찮은’ 사람이고 싶어서.

툭, 털어내는 쿨, 한 어른이고 싶어서

그저 웃는다.


아마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개별화된 고통의 형상을 시각화할 수 있다면

그 강도와 폭, 밀도와 무게를 측량화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에 가격표를 매겨 혹은 별점을 주어

주머니에 넣어 다닐지도 모르겠다.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던지는

‘아무 잘못 없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내밀어 보일 수 있도록.

저 사실은 지금 이 정도거든요.

제 몸과 마음, 제 역사와 환경 안에서 측정한 수치가 이래요.

주머니에서 살포시 꺼내어 그 가격표를 보여주고

내 상태를 장황하게 설명하거나,

혹은 내 상태를 애써 숨기거나,

나 스스로에게 조차 이 정도로 뭘 그래, 하지 않도록.


이 정도 수치에는 좀 울어도 되고,

이 정도 강도에는 요 정도로 지랄발광해도 된다는 가이드라인이 있다면 참 편리하지 않을까.

편견의 장벽으로부터

자기 비애의 위험으로부터

불필요한 인사와 과도한 은둔으로부터

사람들이 좀 편해지지는 않을까.


태어나는 순간, 아니 태아의 순간부터

내 심장에 내장된 칩이

내 평생의 역사와 스토리를 모두 기억하여

내 삶의 어느 시점에 나타나는 비애와 애수,

고독과 허무의 고통을 수치화해 준다면

그리고 그 모든 수치들이

이 세상 모든 생명체들에게 객관화되어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얼마나 얼마나 좋을까.


아,

글을 쓰다 보니 지금쯤 누군가가

거의 완성단계의 마음통증측정기와 측량표를 제작중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많이 비쌀까.

자판기로 만들어 지하철 역에서 측정하게 해 준다면, 출근길에 휙 들어가 결과지를 뽑아 올 수 있다면.

아니몀 병원 로비에서 혈압을 재듯 잴 수도 있겠지.

국가에서 필수 검사 항목으로 지정해서 연 4회 바우처를 주면 좋겠다.

뭐.

그냥 원래 쓰려던 글이 너무 신파조에

공감 안 가는 부분이 많을지도 몰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정부에 정책제안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그만 애들 데리려 가야겠다.

내 마음 통증 측량은 일단 스스로 해보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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