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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뮤 Nov 23. 2020

오페라 레페티터

그거 먹는 건가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저녁 7시 공연 시작을 위한 관객 입장 종이 울렸다.

이 날은 푸치니의 3가지 단극으로 구성된 오페라 ‘il Trittico(일 트리티코)’ 의 Premiere(첫 공연)가 있는 날이다. 나는 주니어 레페티터로서 건반악기 셀레스트(celeste)를 연주하기 위해 오케스트라 피트(pit) 에 처음으로 앉았다. 그동안 여러 차례 리허설을 통해 준비는 완벽히 되었다고 믿지만, 실전 무대에서의 첫날 그저 바짝 긴장하여 입술에 침이 마른다.     


관객석 불이 꺼지고 오직 오케스트라 뮤직 스탠드의 조명만이 어두운 오디토리움을 비추고 있다. 박수와 함께 마에스트로가 등장하고 실내는 다시금 고요해진다. 오프닝의 첫마디 맑은 종소리 사운드를 등장시키는 역할이 바로 나에게 달려 있었다. 준비를 알리는 마에스트로의 손이 허공에 올라갔을 때 , 나는 눈이 튀어나올 만큼 지휘봉의 끝을 노려보다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연로한 마에스트로의 작은 손떨림에 그만 건반을 누르고 말았다. 


‘아뿔싸, 이 고요함 속에 혼자 울려버린 이 소리 어떡해...........’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Show must go on!’  그렇게 실수로 시작한 첫 공연은 무사히 성황리에 마무리가 되었다.     

 

나는 내 20대 시절을 피아노, 오페라와 함께 보냈다. 그리고, 오페라 레페티터라 불리었다.

오페라 무대 위에 올려지는 모습들은 아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한 땀 한 땀 들인 노력의 결과물인데, 오페라 레페티터는 아마도 그 다양한 과정 중에 가장 기본 터를 닦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처음 코칭이란 걸 접했을 때 스승님께 푸념을 늘어놓았었다. 음악을 하던 나 역시도 오페라 레페티터가 뭔지 낯설기 짝이 없었고, 더구나 피아노를 쳐온 내가 노래하는 사람들을 ‘코칭’ 한다는 게 도무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노래 전문가도 아닌데, 과연 내가 음악적으로 가이드를  줄 수 있는 부분이 있을지 좀 겁이 나요”     


스승님은 웃으며 말씀하신다.     

“You already know a lot” (넌 이미 많은 걸 알고 있어)          


한 작품에서 각각의 성악가들에게 배역이 주어지면, 전체의 스토리와 그 캐릭터의 이해를 위해 공부해야 할 것들이 많다. 기본적으로는 작곡가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해 전체 스토리 라인이 쓰인 배경, 그러한 음악이 만들어진 백그라운드 스토리 등을 알아야 하는 것은 기본 시작일 뿐이다. 게다가 단순히 예쁜 목소리로 노래를 잘하는 것이 전부이던가. 그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명확한 가사 전달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유명 오페라 작품들은 이태리어, 독일어, 불어로 불린다. 그러니 남의 나라 말들을 전부 유창하게까지는 아니어도, 정확하게 읽고 발음하고 대략적인 이해를 할 수 있게끔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레페티터가 되기 위해 이태리어, 독일어, 불어를 동시에 배울 때는 그야말로 카오스의 한 복판이었다. 물론 회화가 유창할 수준까지는 할 수도 없었지만, 당시에 정말 두툼한 세 나라의 사전을 끼고 살며 손가락에 지문이 사라지도록 단어를 찾아대던 기억이 난다.     


어떤 작품들은 3시간에 육박할 만큼 규모가 큰데 사실 이 모든 것을 성악가 혼자 다 알아내고 공부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바로 레페티터라는 "도우미"가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노래를 잘하기 위한 기술을 제외하고는, 배역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배우고, 익히고, 연습하게 도와주는 것이다. 따라서, 레페티터는 열심히 읽고 공부하고 한 개라도 더 알아야만 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작품의 준비 과정은 모두 자연스러운 리허설 분위기에서 이루어진다. 성악가들은 주어진 배역의 노래 파트를 익히기 위해 수도 없이 많은 연습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레페티터는 기본적으로 반주를 하고노래를 들어보며 음악의 방향성이나 적절한 곡의 해석을 알려주고정확한 가사로 부를 수 있도록 코칭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음악의 방향성이란, 해당 작품을 지휘하게 될 마에스트로의 곡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 지휘자의 그러한 의도와 해석들을 성악가들에게 전달하여 오케스트라와 만나는 최종 리허설 단계에서의 수정 작업과 혼선을 최소화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레페티터는 오페라 작품 전체를 피아노로 연주하는 사람들이다. 피아노 파트가 제대로 쓰여진 앙상블 작품과는 다르게, 오케스트라 파트를 피아노로 칠 수 있게끔 옮겨놓은 악보이다 보니, 일단은 복잡하다. 그리고, 단순히 그 복잡한 악보를 잘 치는 게 중요하다기보다, 성악가들이 오케스트라와 만났을 때 그 사운드에 이질감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피아노를 통해 오케스트라 내의 각각 악기의 특징들을 표현할 수 있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 예를 들면, 코칭 세션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고 간다.     


“여기 이 부분 들어오는걸 항상 놓쳐요”
“아 거기는, 자 봐바요. 오케스트라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면, 여기 베이스 라인에서 똑같은 멜로디가 나오고 있어요. 그러니, 한 마디 전에 플루트 소리가 들리면 4박자를 카운트하고 들어오면 돼요”     


이렇게 어떤 악기의 소리가 성악가에게 큐(queue) 사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팁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한 작품을 들어가기 전에 전곡을 열심히 연습을 해야 하는 건 기본이고, 오리지널 사운드를 외울 만큼 듣는 것도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레페티터가 되기 전 그저 피아노를 혼자 치고 내 소리에만 집중하는 게 익숙했던 나에게 가장 큰 챌린지는 바로 손은 움직이되 귀는 늘 다른 사람에게 열어두어야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손은 어려운 곡을 치면서 뭔가를 알려주기 위해 말이나 노래를 해야 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온전히 피아노 소리에만 집중하던 나의 두뇌를 2단, 3단 분리하는 작업과 같았다고나 할까. 게다가, 레페티터가 노래를 전혀 안 하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돼지 멱따는 노래 실력으로 성악가들 앞에서 주름을 잡아야 할 때도 있는데, 이것은 노래를 가르쳐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 부분의 느낌이 어떤 게 어울리는지, 발음은 어떻게 하는 게 잘 들리는지, 오케스트라와 잘 어우러지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등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처음 성악가들 앞에서 내 나름 노래라 불리는 소리를 내야 할 때는 너무 부끄러워 그야말로 얼굴이 불타는 감자가 되었더랬다. 그러나 그 역시도 차츰 익숙해진다. 사실 그런 엉망진창 노래 실력을 성악가들이 꽤나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성악가들의 개인 연습이 완료되었다면, 노래 파트에서는 앙상블, 코러스와의 리허설 순으로 점차 합체 작업을 하게 된다. 이러한 여러 단계의 리허설에서 레페티터의 역할은 반주하고, 들어주고, 지적질을 하는 것이다. 표현이 좀 대차지만 사실 지적질이 맞다. 다만, 그 어떤 아티스트들 보다도 감수성이 예민한 성악가들이 상처 받지 않게 에둘러 예쁘게 지적하는 것이 바로 고도의 스킬이라는 점이 중요 포인트이다. 한 번은 내 스승님께서 해주셨던 말씀이 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실수를 지적받는 것이 기분 좋진 않아. 그러니 꼭 한 가지는 잘한 것을 칭찬해주고 그다음에 개선해야 할 부분에 대해 얘기해줘야 해. 지금도 좋은데 여긴 이렇게 바꾸면 조금 더 듣기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말이지”     


그때의 그 말씀이 인생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떠오를 때가 많다. 참 감사한 가르침이다. 나는 사람들을 대할 때, 또 내 아이를 대할 때, 정말 이렇게 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되곤 한다.     


오페라 작품이 무대에 올라가기까지는 단계 단계가 꼭 블록 쌓기 같다. 노래 파트가 완성이 되면 이제는 연출 디렉터와의 시간이 온다. 이 단계에선 무대에서 쉴 새 없이 어디로 움직일지, 어떻게 액션을 취할지를 익혀야 하기에 사실상 노래는 자동반사 수준으로 몸에 익혀져 있어야 한다. 노래와 연기가 장착이 되었다면, 오케스트라와의 만남이 거의 막바지 작업이다. 오케스트라와의 리허설을 Sitzprobe(짓츠프로브)라고 하는데, 독일어로 '앉아서 하는 리허설' 이라는 의미이다. 이 시간에는 노래 파트와 오케스트라가 통합이 되는 데에 가장 큰 목적이 있다. 

    

그다음은 대게 드레스 리허설로 넘어가는데, 실제 분장하고 무대에서 전체 그림을 맞춰보는 단계이다. 드레스 리허설은 중간중간 멈췄다 가기도 하는 그야말로 연습 과정인데, 이를 지켜보는 것이 또 꿀잼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레페티터의 역할은 피아노로 작품을 연주하거나, 필요시 오케스트라에서 건반악기를 연주하고, 연출가나 지휘자의 디렉션을 메모하여 추후 성악가들과 리허설 진행 시 리마인드 시켜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좌) 공연이 끝난 후 전체 출연진과 기념 사진 (우) 리허설 브레이크 중 지휘자와 연출자가 상의중인 모습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있는데, 그건 바로 무대 한가운데 프롬터(prompter) 박스에 들어가는 일이다. 작품이 너무 길거나 장황할 때는 사실 성악가들도 그 많은 분량의 대사 및 가사를 정확하게 기억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레페티터들이 무대 앞쪽 아주 작은 프롬터 박스에 들어가 가사를 불러주는 것이다. 그 역할은 사실 해보지 못했는데, 작은 공간에 앉아 쉴 새 없이 악보를 따라가며 가사를 불러주는 일이 만만치 않은 일일 거라는 건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그래서인지 주로 능숙하고 경험이 많은 시니어 레페티터들이 맡았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이런 모든 과정을 거친 최종 결과물이 바로 관객들이 접하는 무대의 모습이다. 레페티터는 말 그대로 이 전체의 과정을 매끄럽게 이어가는 코디네이터들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다양한 역할 수행을 경험해볼 수 있었던 나의 첫 번째 직업이, 이후에도 내가 새로운 세상을 접해 나가는데 큰 밑바탕이 되었다. 사실 모든 일이 내 직업이 되면 힘들기 짝이 없고, 남들이 하는 일은 다 멋지고 재미있어 보이기 마련인데, 어쨌거나 지금도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힘들었던 부분들은 퇴색되어 사실 다이내믹하고 즐거웠던 기억만이 남아 있다.      


나 역시도 이 직업에 대해 처음 접했을 때는 '그게 뭐예요?'라고 말했더랬다. 워낙 한국에서 대중적이지 못하다 보니 이러한 직업이 보편적이지도 못하고, 그래서 더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게 당연할 따름이다. 나의 글을 통해 좀 더 많은 분들이 이런 직업도 있구나 하고 알게 된다면 그나마 다행이고, 여러 사람의 조그만 관심이 앞으로 이런 공연예술계의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우리에겐 현재 케이팝이 있지만, 언젠가 한국이 오페라의 중심에 설 날도 오지 말란 법이 어디 있다던가. 내 인생만큼이나 예측 불가한 요즘 세상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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