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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뮤 Feb 02. 2024

올리브 오일 한 병을 홀랑 깨 먹은 날

최근 컨디션이 영 좋지 않다. 새해 시작과 함께 올 한 해도 건강하자는 다짐을 한 게 무색할 만큼 새해의 시작은 병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골골한 스타트였다. 머리가 나빠진 건지 아님 정말 기억에 치명적인 이상이 온 건지, 간단한 단어 하나를 떠올리는데도 한참이 걸리고 집중력이 엉망인 건 당연한 부록에 몸뚱이 한번 움직여 뭔가를 하기가 그야말로 천근만근이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기분 상태가 축축 쳐지는 건 당연지사. 그래도 열심히 새벽 시간에 마음을 돌보려 애쓰기는 하는데, 꾸역꾸역 미라클 모닝을 이어간다기보다는 이젠 정말 깊은 잠도 잘 못 자고 새벽 일찍 눈이 떠지는, 전적으로 노친네들 새벽잠 없어진단 말이 더 이상 우스갯소리가 아닌 내 얘기가 되는 상황이 왔기 때문이다. 일찍 일어나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게 어떠한 의지의 표현이자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일찍 눈을 떴으니 뭐라도 해야겠다 싶은 상황인 게 왜 이리 웃픈지 모르겠다.


이렇게 세월을 때려 맞는구나...




낮에 아이 점심을 준비하는데 오늘은 정말 간단히 해주자며 파스타를 만들었다. 얼마 전 꽤 좋은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을 할인가에 구매해 상당히 만족하던 중인데, 오늘이 바로 그 오일을 개시하는 날이었다. 팬트리에서 꺼내 조리대 위에 올려놨을 뿐인데 어째서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아 올리브 오일병이 공중을 가로지르고 있었을까. 으악새를 찾는 나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잠시 후 들려온 소리는 '쨍그랑!'

동공이 지진을 낼 틈도 없이 눈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확장되었고 나는 재빨리 깨진 병의 반쪽을 낚아챘건만, 이미 바닥엔 영롱하게 맑고 노오란 올리브 오일이 순식간에 반경 1미터 가까이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오, 티, 엘, 좌절!

야속할 만큼 열심히 오일 마사지를 하고 있는 그 바닥이 꺼져 내리도록 한숨이 나왔다.




유리조각을 얼추 걸러내 치우고 키친 타월을 줄줄이 뽑고 또 뽑아 바닥에 좌르르 깔았다. 나도 맛보지 못한 그 올리브 오일이 얼마나 맛이 좋으면 키친 타월들이 쉴 새 없이 죽죽 흡수하고 있었다. 그저 그 모습에 또 땅이 꺼지도록 한숨만 나왔다. 아까워라... 새 거였는데.... 울어야 하나?


그 와중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선 내 상황을 누가 보기라도 한 건지 열심히 '웃어요~ 웃어봐요~'라며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더 웃긴 건 그 노래가 끝나자마자 '난 괜찮아~ 난 괜찮아아아아~'라며 쏘울 넘치는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으니... 허허 참...

그런데, 묘하게 마음이 방향키를 바꾸기 시작했다.

그래 웃자! 난 괜찮으니까!


그래도 갑자기 웃음이 나오진 않았다. 중력에 충실한 눈꼬리와 입꼬리를 한 채 아이에게 파스타를 먹으라고 내어줬다. 나도 조금 떠먹어보다 아이에게 입을 툭 내밀고 말했다.

"엄마가 올리브 오일 새거 한 병을 깨 먹었어.."


뭔가 부엌에서 난리가 난 상황이 궁금하지만 말도 못 하고 한숨만 쉬는 엄마의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는지 방에 조용히 구겨져 있던 아이는 이제야 상황을 알았단 듯이 말한다.

"아.. 아이고.. 엄마 고생했겠다..."

(응 그래 엄마 그거 닦느라 멍멍이고생 했어)

그러더니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오더니 내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려주며 하는 말이 걸작이다.

" 너무 열심히 하지 마.. 너무 노력하면 힘들 수 있어.."


하.. 이래서 딸 키우나.. 그 애기였던 게 언제 컸다고 아홉 살짜리 입에서 나온 위로의 말에 순간 울 뻔했다. 너무 노력하면 힘들다는 이 뻔하디 뻔한 말이 왜 그리 큰 감동으로 다가왔나 모르겠다.


그래.. 너무 애쓰지 말자.. 딱히 애썼단 생각도 안 했지만 마음은 노력하는데 협조하지 않는 몸뚱이 때문에 마음이 많이 속상한 건 사실이었는데, 어떻게 사람이 늘 열심히 사나.. 천천히 가야 할 때도 있는 법. 현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그렇게도 안되나...


일찍 귀가한 남편이 한마디 보탠다. 인생은 속도보다 방향이라고...

그래.. 사랑한다 이 유 씨들아.. 우리 다음 생애엔 모두 판다로 태어나 먹고 자고 구르며 살자..

휴... 올리브 오일 새로 사야겠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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