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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생훈장 Aug 05. 2024

오병이어(五餠二魚) 이야기

목사님이 휴가를 가셔서 땜빵 설교를 하였습니다. 

2024. 8. 4. 말씀 나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奇蹟)”


본문 요한복음 6장 3-13 (개역개정)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 로 3)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목사님께서 여름휴가를 가셔서 오늘은 제가 대신해서 예배 인도와 말씀나눔을 하고 있습니다. 뭔가 많이 어설프더라도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려고 하는 본문 말씀은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하신 분들이라면 많이 들어서 알고 계시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이지요. 말씀 나눔을 요청받고 무슨 말씀을 나눌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두 주 전 중고등부 예배의 본문이 이 말씀이었습니다. 청소년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이 본문을 좀 더 묵상하면서 준비한 내용으로 오늘 말씀 나눔으로 하면 좋겠다 싶어서 택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으로 이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들, 그리고 두 주간 준비하면서 새롭게 묵상하고 깨달은 것들을 두서 없이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이 이야기의 소제목, 그러니까 주제에 대한 내용입니다. 혹시 성경을 읽으시면서 소제목을 유심히 살펴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네요.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 이야기를 제외하면 네 복음서 모두에 나오는 몇 안 되는 이야기 중의 하나인데, 복음서 모두에 ‘오천 명을 먹이시다’라고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원래 성경 본문에는 소제목이 없었고, 장과 절의 구분도 없이 하나의 책이 통으로 쓰여져 있었지요. 그것을 후대의 사람들이 다른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장과 절을 나누었고, 그보다 더 후대의 사람들이 소제목을 붙여서, 지금 우리가 읽는 성경은 대부분 이야기별로, 혹은 사건별로 소제목이 붙여져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사복음서에서는 모두 오늘 본문의 소제목이 ‘오천명을 먹이시다’로 붙여져 있습니다만 우리가 이 본문에 대해서 많이 기억하는 제목 혹은 주제는 무엇인가요? 그렇지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한자로는 오병이어, 혹은 오병이어의 기적 또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으로 많이들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으신가요? 소제목은 당연히 성경을 번역하고 편집한 사람들의 신학적인 입장과 주제를 반영하지만, 개인적으로 우리들은 성경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자기 나름의 제목을 붙여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제목은 우리의 신앙적인 고백과 관점을 반영할 수도 있지요. 

여러분은 ‘오천 명을 먹이시다’와 ‘오병이어의 기적’ 중 어느 제목이 더 마음에 와 닿으시는지요. 그리고 왜 그 제목이 더 마음에 와 닿으시는지요. 

‘오천명을 먹이시다’라는 제목은 예수님의 권능과 그에 잇닿은 기적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놀라운 일도 하실 수 있어!’ ‘역시 우리 예수님이셔!’라는 느낌,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사람들의 필요를 단번에 해결해 주셨어요” 이런 느낌이지요. 뭔가 주일학교 때 많이 들어 본 것 같은, ‘예수님은 참 멋진 분, 능력 있으신 분’ 이런 느낌이랄까요. 

반면 ‘오병이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는 제목 혹은 주제는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의 조건, 그럴듯하고 대단하면 좋겠지만 별로 그렇지는 않은 우리의 상황들, 보잘 것 없는 조건과 상황을 인정할 수 밖에 없지만 그러면서도 그 너머를 바라보는 믿음과 헌신을 더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쪽이든 기적이 일어났지만, ’예수님께서 오천명을 먹이셨어요‘라는 것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이 배불리 먹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느낌이며 분위기가 조금 다르지요. 

물론 두 제목을 모두 합하는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다‘라고 해도 되겠지만, 이 이야기를 찬찬히 묵상할 때 우리에게 더 와 닿는 부분이 있고, 우리가 처한 상황과 형편에 따라서 같은 이야기도 달리 보인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리고 이야기 속으로 좀 더 들어가 보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놓은 한 어린 아이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9절 앞부분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 늘 이 아이에게 마음이 갑니다. 어쩌면 자기의 길양식 전부일지도 모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함께 나누자고 내어놓은 아이의 마음에 마음이 포개진다고 할까요. 그러면 이 이야기의 제목은 또 바뀔 수 있겠지요.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내어 놓은 아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니 이 이야기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각자의 자리에 따라서 또 상황에 따라서 어떨 때는 오천명을 먹이신 권능의 사건으로, 어떨 때는 한 아이의 보잘 것 없는 헌신이 만든 공동체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겠고, 성경을 읽을 때 오늘 나에게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다가오는가를 살피면서 같은 이야기라도 매일매일 새롭게 성경을 읽어 나갈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마 다들 그런 경험이 있으시겠지요. 소제목에 대한 묵상을 통하여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내밀하고 개별적인 메시지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기억하면서 이제 오늘의 본문 속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 보았으면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이야기의 무리들, 그러니까 오천명의 남자들을 포함한 구중 속에 있다면 어떤 경험을 했을까요. 그 곳에는 잔디가 많아서 사람들이 잔디에 둘러 앉았다고 하니 아마도 비교적 물이 풍부해서 푸른 풀밭이 펼쳐진 초원지대였던가 봅니다. 

오늘 모인 사람들은 이전부터 예수라는 사람이 갈릴리 일대의 마을을 다니면서 병든 사람도 고쳐주고 귀신도 쫓아내면서 새로운 가르침을 펼치고 있고, 그 가르침이 회당의 지도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힘이 있고 놀랍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겠지요. 그러면서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올라오던 차에 근처에 예수님과 그 일행이 왔다고 하니, 뭔가 멋진 일, 신기한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여러 마을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몰려갔습니다. 나도 얼떨결에 끼어서 왔는데, 몇천 명이나 몰려 있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예수라는 사람은 뭐라고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구석에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는데 내 눈에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 사람 저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라는 사람이 이런 일을 했다더라, 이런 말을 했다더라하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는데 어느 새 날이 저물어 버렸네요.


혹시 운이 좋아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보이고 말이 들리는 곁에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직접 혹은 전해서 듣다 보니 날은 저물고 배도 고픈데, 예수님이 제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걸 듣습니다. 

“이 사람들을 먹여라”

그러자 빌립이라는 제자가 이야기합니다. 

“저희가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겠습니까.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으로도 모자랄 것 같습니다”


데나리온은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의 화폐단위로 어른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합니다. 요즘 하루 일당을 기준으로 대략 한 데나리온이 팔만원에서 십만원 정도라고 한다면 이백 데나리온은 거의 천오백만원에서 이천만원쯤 되는 큰 돈인 거지요. 제자들에게 그런 큰 돈이 있을 리 없으니 이 말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라는 뜻에 가깝지 않았을까요. 만일 우리가 곁에 있었다면 ’역시 그렇지. 저 양반들이 무슨 수로 이 많은 사람들의 끼니를 책임질 수 있겠노. 그나저나 배고픈데 같이 온 옆집 김서방이 뭘 좀 챙겨서 왔을래나“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러고 있는데 옆에 서 있던 안드레라는 다른 제자가 이야기합니다. 

”왠 아이가 갖고 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있습니다만, 이걸 누구 코에 붙이겠습니까“

 여기까지는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전개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일이 일어나지요. 예수님께서 그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아서 감사를 드리고는 떡과 물고기를 떼어서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은 대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거둔 것이 열두 바구니에 찼다구요. 

그렇다면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고, 그걸 나누어 주었더니 오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으며, 남은 음식을 거두니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서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어릴 때 이 이야기를 듣거나 읽으면서 제가 주로 상상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빵을 떼니 줄어들지 않고 뗀 자리에서 또 빵이 생기고, 생선을 떼니 그 자리에서 또 생선이 생기는 그림이었습니다. 나누어진 조각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서,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때도 역시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는 거지요.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청소년들과 이 이야기를 하면서 똑같이 물어 보았습니다. ”얘들아 어떻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오천 명에게 나누어 주어서 배불리 먹을 수가 있었을까?“

그랬더니 한 친구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음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할 수 있으시니까 물고기 두 마리를 번식시켜 가지고, 순식간에 수천 마리가 되도록 하시지 않았을까요. 뭔가 기발한 생각이 아닌가요? 오 그럴 수도 있었겠다. 아니면 빵이 갑자기 뻥 튀겨져 가지고 막 빌딩만해져서 뜯어먹어도 뜯어먹어도 줄지 않을만큰 커진 건가? 그럴 수도 있는 거겠지요. 

나이가 들면서 접한 해석 중에서 저에게 제일 설득력이 있었던 것은, 한 어린 아이가 가진 식량을 기꺼이 내어놓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모두 마음에 감동이 되어서 자기가 싸온 음식을 서로 내어놓았고, 그것이 모든 사람들이 나누어 먹고 남을 만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먼 길을 오는 사람들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맨 몸으로 왔다기보다는 어느 정도의 길양식을 챙겨서 왔다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지요. 그리고 그것을 서로 나누어 먹게 되었다고 본다면, 초자연적인 개입 없이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일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어린 아이가 내어 놓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서 감사하고 나누어 주시니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 가족 여러분, 기적이란 무엇일까요. 국어 사전을 찾아보니 기적은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 혹은 신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믿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벌어진 일에 대한 해석 중 어떤 것이 이 기적의 정의에 가장 맞는다고 생각하시나요. 


10살 오빠를 위해서 수혈을 결심한 일곱살 여동생의 이야기를 아시는지요. 오빠가 교통사고가 나서 응급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급박한 상황이라 가족 중에서 동생의 혈액형만이 수혈가능했고, 그래서 의료진은 이 아이에게 수혈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부담이 되기는 하지만 무리가 될 정도의 수혈양은 아니라 동생이 감당할만하다고 판단을 한 거지요. 오빠가 많이 아파서 너의 피를 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해 줄수 있겠니라는 요청에 동생은 심각한 얼굴로 잠시 생각을 하더니 네라고 대답을 하고는 수혈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빠는 수술을 잘 마치고 나왔지요. 

의료진들이 동생에게 네 덕분에 오빠를 살릴 수 있어서 참 고맙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동생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언제 죽나요?“ 

이 이야기에는 아무런 초자연적인 기이함이 없지만, 저는 이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어떤 초자연적인 기적 이야기보다 큰 감동을 받곤 합니다. 얼마나 큰 사랑과 용기의 이야기인지요. 

그러니 자연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기적이 아닌 것이 아니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모두 기적인 것도 아닙니다. 참된 기적은 그 일에 담긴 사랑과 헌신의 깊이와 분량이 아닐까요.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라는데, 저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꼭 과학적으로 설명가능한 방식으로 일어났다고 해석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는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신비가 있고, 그 신비를 반드시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방식으로 축소할 필요는 없겠지요. 다만, 기꺼이 물고기와 떡을 내어놓은 아이의 마음,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시는 예수님의 마음, 반신반의하면서도 그 명령을 따라 사람들에게 다시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는 제자들의 마음이 그 다음에 벌어진 일들 못지않게 놀랍고 감동이 된다는 걸 묵상해 보았으면 한다는 말씀, 그리고 그 마음이 오늘 우리 각자에게는 어떤 메시지로 들려오는지 들어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무언가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일과 기이한 사건을 경험하는 것도 믿음 안에서 얼마든지 가능하고 충분히 바랄 수 있는 일이지만, 실상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상의 모든 일 가운데서 하나님의 기적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 놀라움에 감사할 줄 아는 것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일매일의 손길로 우리를 거두시고 먹이시는 하나님 안에 우리가 있음을 매일매일 깨닫는 것, 그것이 참된 믿음이 아닐까라는 말씀입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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