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날씨 때문인지 주 2회였던 수영시간이 주 5회로 늘었다.이 더위가 가진 유일한 장점은 저녁에 빤 빨래도 아침이면 풀먹인 듯 빳빳하게 말려준다는 것.덕분에 단벌 수영복으로도견뎌지고 있다.
수영복과 타올, 얼려놓은 생수병은손수건으로 돌돌 말아 아들의 가방에 넣어줬다.
아침 7시 50분. 남편과 아들은 8시 10분 출발하는 트램을 탄다.
"준비 다 돼가?"
방문을 열자 아이가 들고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엄마, 이거 어제 내가 쓴건데 못 보여줬어."
A4용지에 삐뚤빼뚤한 한글이 가득 적혀 있다.
'수영 / 미술 / 무당벌레 만들기 / 첵읽기 / 옷 혼자 입기 / 옷 지버너키 / 놀아슴 / 섬머스쿨'
"어제 섬머스쿨에서 한 일들 엄마한테 보여주려고 써온거야."
"엄청 많이 했네. 어제 자유시간에 썼구나? 선생님들이 아들 덕분에 한글 구경 좀 했겠는데?"
"맞아. 내가 쓰고 나서 선생님들한테 보여줬지. 오늘도 수영하니까 옷 혼자 갈아입고 정리해볼거야. 이따 다녀와서 얘기해줄게!"
"그래. 못 알아듣더라도 신경쓰지 말고 그냥 재미있게 놀다 와!"
집을 구하고 제일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아들의서머스쿨등록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여유롭게 적응하도록 시간을 주기에는초등학교 입학이 당장 두달도 채 남지 않았기에 지체할 수 없었다.
종일 놀이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는 엄마의 설탕발림 설명 때문인지 아들도 순순히 가겠노라 했다.
한국어 이름 발음에 익숙치 않은 선생님들 앞에서 자기 이름 소개도 하고 말이안 통해도 놀이 위주이다보니 일과를 소화하는 데엔 큰 문제가 없는 듯했다.
한편으로는 불과 얼마 전까지 한국에서 어린이집 다니던 아들이 이곳 아이들 사이에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뭔지 모를 뿌듯함까지 주었다.
'역시 초등학교로 바로 입학하는 것보다는 이게 나은 선택이었어.'
자신의 선택이 확신이 되는 순간, 뿌듯함은 배가 된다.
집을 구한 뒤 생활도 하루하루 조금씩 안정을 찾는 듯하다. 출구가 없는 것만 같던 집 문제는 결국 남편 회사의 도움으로 해결됐다.(진작에 이런 서비스가 있다고 알려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집을 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넙죽 절하고 싶을 정도로 나는 매우 겸손해진 상태다.)
남편 회사에서 거래하는 부동산 계약 대행업체에서는 총 3곳의 집 후보를 소개해줬다. 후보군 가운데 이 집이 가장 큰 크기이기도 했지만 집앞에 바로 트램 정거장이 있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도심의 활기도 느낄 수 있고 창가에서 고개를 좌우로 돌릴 때마다 건물들 사이로 다른 산자락이 보였다. 6층(한국 기준 7층)에서 누릴 수 있는 하늘뷰 역시 말 그대로 '볼 만하다'.
남편과 아들이 회사와 서머스쿨로 향한 뒤, 아직은 낯선 내 집에서 가져보는 평일 오전 나만의 여유시간. 낯설기도 하고 오묘하다.
한국에서 10년 넘게 기자 일을 하면서 한달이 멀다고 구두굽을 갈았던 나다. 특히 워킹맘이 된 뒤, 회사에서는 애엄마 딱지에 혹여 흠잡힐까 뛰고, 집에서는 늘 '엄마 갈증'에 빠져 있는 아이를 채워주기 위해 앉아서도 뛰듯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무슨 바람에선지 10년 가깝게 다니던 회사에 갑자기 사표를 냈고 이직을 준비하려던 그 타이밍에 남편이 프랑스에 일자리를 구하게 됐다. 이보다 자연스럽기도 힘든 이직=퇴직이 된 셈이다.
훵한 집에 유일한 가구인 식탁에 앉아 습관처럼 노트북 앞에 앉았다. 더이상 내 이름으로 된 월급통장도 없고 만나야 할 선후배, 취재원도 없다. 이제 내가 알아보고 해야 할 일들은 모두 가정 내에 국한된다는 뜻이다.
검색창에 넣는 키워드는 출입처, 회사, 속보창이 아닌 내가 앞으로 둘째 출산을 위해 다녀야할 병원, 아들의 초등학교 입학 관련 필요한 행정절차 등이었다. 찾아볼수록 모르는 것들이 뭉텅이로 등장했고 그럴수롯 이곳이 타국임을 증명하는 것만 같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왠지 잘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면서 하루 일과로 지친 내 가족이 편안히 충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 어색한 나머지 닭살이 돋을 것 같았지만 즐거이, 기꺼이 해볼 수 있을 듯한 기분.
프랑스에서의 삶은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줄까. 남편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 이런저런 환상에 젖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보세요, 출근 잘했어?"
"응. 근데 여보, 오늘 시간되면 쇼핑몰에 아동용 시계 있는지 한번 봐줄 수 있어?"
"갑자기 시계는 왜?"
"아침에 현이 말이 사실 하루종일 시계를 보고 싶은데 교실에 시계가 없어서 너무 답답하대. 끝날 때가 됐나 싶으면 다시 다른 수업이 시작하고, 선생님한테 매번 시간을 물어보는 것도 어렵다고.. 6시가 언제 되는지 그것만 기다리고 있나봐."
머리가 띵했다.
그래, 그랬겠지. 식당에서 잠깐만 들어도 진땀날 것 같은 외계어인데 하물며 하루 종일 그 말폭탄 안에서 혼자 눈치로 이해하고 따라해야 하니 오죽할까. 나만큼, 혹은 나보다 더 이 나라가 낯설텐데 적응하려면 필요하다는 이유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유로 아이를 그곳에 보내놓고 내 선택의 탁월함에 취해 마냥 기분좋은 상상을 하던 내가 갑자기 미안해졌다. 어느 날 갑자기 이 곳에 오게 만든 건 부모인데 그것도 모자라 "못 알아들어도 신경쓰지 말라"는 엄마 혼자 마음 편한 당부로 아이 등을 떠밀어 가장 혹독한 외계에 던져놓은 것은 아니었나 싶었다.
조금 전까지의 환상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교실 한 켠에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언어를 종이에 적으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아이가 눈 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