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에 나는 항공사 승무원으로 일했었다. 매번 다른 스케줄로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는 것이 자유로운 성향의 나에게 딱 맞았지만 육체적으로 힘든 노동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서도 오래 일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나이 들어서도 내 체력이 허락하는 한 오래도록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었기에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그것은 나의 전공에 부합하는 일이기도 했다. 학부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영어를 영어로 가르칠 수 있는 테솔 과정을 이수한 나는 20대 후반 승무원을 그만두고 프리랜서 영어강사로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영어강사로서 욕심을 내며 열정적으로 일하던 때인 서른 초중반 뉴질랜드 영주권자인 신랑을 만나 뉴질랜드로 오게 되었다.
오자마자 신랑은 내가 일을 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한국에서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한국에서의 전공을 살려 바로 일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뉴질랜드에서 학교 자격이 없기에 그에 준하는 영어공인 점수를 갖고 있던지 아니면 영어실력이 뛰어나야 했고 해당분야에서 일한 경력도 있어야 했다.그렇게 해도 일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아 보통은 다시 1년짜리 석사학위를 받던지, 아니면 다른 전공으로 다시 학교에 등록해서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게 여의치 않으면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카페, 회사 등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거나 영주권이 없는 경우 영주권을 받기 위해 풀타임으로 일을 한다. 신랑을 통해 파트너십영주권을 신청해서 받은 나는 영주권을 받을 필요가 없기에 풀타임으로 굳이 일하지 않아도 됐다. 그렇지만 우선 무슨 일이든 해야 했기에 나 역시 처음지원한 곳은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초밥가게였다.
초밥가게 일은 파트타임으로 9시부터 1시까지만 일을 하는 것이었지만, 홀서빙에 카운터에 주방보조 일까지 사장과 주방장을 도와 거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해야 했기에 1분도 쉴틈이 없었다. 9시부터 11시까지 주방에서 초밥 만드는 일과 샐러드 만드는 일을 끝내고 잠시 숨을 돌릴라치면 숨 돌릴 시간이 어디 있냐는 젊은 여사장의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화장실 한 번 제대로 갈 시간 없이 1시까지 일을 하고 집에 가면 그야말로 녹초가 되었다. 그렇게 한 달 남짓 일하고 나는 초밥가게 일을 그만두었다. 받는 최저임금에 비해 워크로드가 상당했기에 불합리하게 느껴졌을 뿐더러 무엇보다 직원을 직원으로서가 아니라 일을 시키고 부려먹는(?) 사람으로 대하는 여사장의 마인드에 더 이상 같이 일하고 싶지 않았다. (슬픈 현실이지만, 영주권을 따러오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한국인 가게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일하는 경우가 꽤 많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 일을 알아보다 커피 만드는 일을 해보고 싶어 바리스타 자격증을 땄고, 그 후로 카페에서 일하게 되었다. 똑같이 최저 임금이었지만 주방일을 하던 초밥가게보다 커피를 만들고 서빙만 하는 카페일이 육체적으로는 훨씬 더 할만했다. 사장님도 한국분이셨지만 유하시고 직원들 배려도 많이 해주시는 분이셨다. 그러나 나는 엄청난 바리스타가 되고 싶지도, 그렇다고 나중에 카페를 운영해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에 이 일 역시 나에겐 그저 돈을 버는 수단일 뿐 시간이 지날수록 일에서의 어떤 보람이나 즐거움, 열정이 따라오진 못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었다. 그것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이 나라 학교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내가 원어민인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수 있을 실력이 될까마는 그저 학교라는 곳에서 그 교육현장에서 무언가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다면 해보고 싶었다. 이 나라 학교시스템도 궁금했고, 교육방식도 궁금했고, 아이들이 어떻게 학교에서 생활하는지 그 모든 것들이 나는 궁금했다.
원하면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무작정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전공, 경력, 자격증, 졸업증 모두 첨부하고, 내가 왜 학교에서 일하고 싶은지 그 이유에 대해 썼다. 내가 주위에 학교에서 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누군가로부터 'teacher aide(보조교사)'라는 것에 대해 들었었다. 학교에서 반 담임선생님을 도와 그 반에서 학습속도가 뒤처지는 아이들, 특별히 따로 수업이 필요한 아이들을 맡아서 수업을 하고, 담임선생님의 수업 관련 업무도 돕는 말 그대로 보조 교사였다. 내가 그 일을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내가 일하고 싶은 학교들에서 보조교사를 지금 구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우선 내가 일하고 싶은 학교에 'teacher aide volunteer' 로 지원을 하기로 했다. 돈을 받지 않고 자원봉사로 일을 시작하는 거다. 그렇게라도 내가 원하는 곳에서 일을 할 수만 있다면 너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일하다가 기회가 되고 운이 좋으면 정식으로 채용되어 일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딱 그렇게만 되면 너무 좋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돈을 받지 않아도 volunteer로 일하는 것이 너무 값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을 꾸니 또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곳 주위의 학교들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그중 맘에 드는 학교 한 곳을 발견했다. 그곳에 이력서를 넣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자 그제야 나는 신랑에게 이야기를 했다. 카페가 아닌 학교에서 일하고 싶어서 이력서를 넣었는데 연락이 오지 않았다고....
신랑이 묻는다. '몇 군데에 넣었냐고.' 나는 답했다. '내가 원하는 학교 한 군데에 넣었다.' 고
신랑은 어이없게 한참을 웃는다. 그러고는 말한다.
" 내가 여기서 대학교 졸업하고 전공 관련된 일을 구하는데 몇 군데에 지원했는 줄 알아?"
"아니.."
" 100군데가 넘는 곳에 지원했어. 그래서 지금 이곳에서 일하게 된 거야."
(참고로, 신랑은 뉴질랜드에서 Performing & Screen Art를 전공을 하고 뉴질랜드 메인 방송사에 방송되는 드라마를 촬영하는 프로덕션에서 조명감독과 멀티 테크니션으로 8년째 일하고 있다.)
" 아..... 그래?"
" 여기서 대학 나온 나도 그렇게 지원을 했는데, 지금 자기는 한 군데에 넣고 연락 오길 기다린 거야?"
신랑이 어이없게 웃은 이유를 알고 나니 나도 어이가 없긴 했다.
" 그러게...."
" 이력서 줘봐."
신랑은 우리 지역에 있는 모든 초등학교를 검색하고 찾더니 내 이력서를 그 모든 곳에 메일로 넣었다.
이렇게 해도 잘해야 한두 군데에서 연락이 올까 말까라니....
현실감도 없이 어떻게 지원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일한다고 한 나 자신이 조금은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이제는 신랑 덕에 조금 더 큰 기대를 갖고 기다려 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