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편에서 뉴질랜드 현지 학교에서 영어를 사용하면서 영어 실력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글을 썼다. 정확히는 실력이라기보다는 영어권 국가에서 일을 하려면 기본적인 의사소통의 실력은 되어야 하기에 그것을 기본으로 갖추어 있다는 가정하게 단어나 어구 같은 것들 모르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글을 적었다. 그보다는 기본적인 실력을 갖추고 있다면 모르는 단어나 어구들이 있어도 당황하지 않고 자신감 있게 현지인들과 소통하려 하는 자세만 있으면 충분히 배우면서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오늘 내가 하려는 말은 영어권 국가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 단어나 어구, 표현들을 많이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발음(pronunciation)'이라는 것이다. 발음은 한국에서 영어를 배울 때는 어쩌면 가장 중요시되지 않는 부분 중 하나이다. 요즈음 학생들은 초등학교에서부터 원어민들과 수업을 하고 영어교재나 수업에 듣기 음원이 너무 잘 되어있어 훌륭한 원어민 발음으로 제대로 공부를 하지만, 내가 학교에서 영어를 배울 때에는 제대로 된 발음으로 영어를 배우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중학교에 가서야 처음 배운 영어과목에서 본문 내용을 카세트테이프로 한 번 들려주시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그다음은 나이 지긋하신 남자선생님의 한국식 영어발음이 내가 듣고 배운 첫 영어발음이었다. 심지어 그분에게는 지방 특유의 억양이 있으셨는데 그게 접목되어서 이게 영어인지 한국말인지 모를 악센트를 가진 그런 모호한 경계의 언어를 배우고 있었다. 그렇게 영어를 배운 우리에게 일 년에 몇 차례씩 시행되는 영어 듣기 평가 시험은 말 그대로 신세계였다. 이게 진짜 영어이구나 싶으면서 놀랄 틈도 없이 스무스하게 눈 굴러가듯 지나가는 발음은 정신 차려보면 듣기가 끝나있었고 답을 찾지 못해 부랴부랴 찍기에 바빴다.
그런 시절 나에게 제대로 된 영어 발음을 알려주고 나에게 영어에 대해 흥미를 알게 해 준 사람이 있었으니 그분은 바로 나의 아빠였다. 학창 시절 영어를 좋아하셨던 아빠는 우리가 초등학교 때 학교에 데려다주시는 차 안에서 항상 팝송을 틀어주셨는데 팝송과 함께 그 노래의 가사를 한국말과 영어로 프린트해서 언니와 내 손에 쥐어주셨다. 그러면 우리는 그걸 보면서 학교 가는 내내 노래를 들었고 알파벳도 모르고 영어를 읽지도 못했지만 들리는 대로 적힌 영어 가사를 따라 읽었고 그렇게 일주일쯤 지나니 가사를 보지 않고도 외워서 줄줄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 정도가 되면 아빠는 다른 노래를 선정하여 틀어주셨고 그렇게 일주일씩 우리가 노래를 줄줄 외워 부를 때까지 한 곡을 반복해서 틀어주셨다. 그때 아빠께서는 그렇게 듣고 따라 부르며 외우는 것이 영어 학습에 좋다는 것을 알고 하신지는 모르겠지만, 지나고 나서 그리고 내가 영어교육을 하면서 되돌아보니 그 방법은 굉장히 훌륭한 방법이었다. 특히나 영어를 읽고 쓸 줄 모르는 때에 영어 듣기에 노출시켜 주신 것은 정말 영어교육적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우리에게 해주셨던 것이다. 그렇게 영어 소리에 노출되고 익숙해졌던 나는 수업시간에 문법은 조금 따분했더라도 영어자체에 흥미가 있었기에 그 당시 유명했던 팝스타들의 음반을 사서 들으며 내 나름대로 영어공부를 해나갔던 것이다. 그렇게 영어에 대한 흥미를 놓지 않다 보니 자연스레 영어 수업도 어렵지 않았고 영어 성적은 거의 항상 탑이었으며 대학에서 영어전공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게 대학을 나와 영어교육을 하면서도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다름 아닌 듣기와 발음이었다. 제대로 된 듣기가 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아웃풋이 나올 수 없고 듣기가 제대로 된다는 것은 영어의 제대로 된 발음을 알고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영어발음을 듣고 그대로 따라 하다 보면 그마만큼 재미난 게 없는 것이 영어공부이다. 영어시험을 위한 어렵고 따분한 독해나 문법공부가 아닌 영어를 언어자체로 배우는 듣고 따라 하고 말하고 이 기본대로만 공부하면 재밌고 신나고 그러면서 실력이 나도 모르게 붙는 것이 영어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렇게 공부를 하고 영어를 가르쳤던 내가 뉴질랜드에 와서 가장 먼저 멘붕 온 것이 바로 듣기와 발음이었다. 정말 거짓말 조금 보태 그들이 하는 말이 하. 나. 도 안 들렸다. 처음에는 정말 멘붕도 이런 멘붕이 없어 자괴감까지 들 정도였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뉴질랜드는 그들만이 쓰는 단어와 표현들이 있었고 발음과 억양 역시 그들만이 갖고 있는 뉴질랜드식 영어가 있었다. 한국에서 이십여 년 가까이 미국식 영어에 길들여진 내가 그들의 영어가 들리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한국에서도 서울이나 다른 지방에 사는 사람이 제주도에 가서 그들의 방언을 들으면 같은 한국말이지만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렇게 첫 일 년은 나의 귀를 그들의 발음과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와 표현에 익숙해지기 위해 그저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했다. 최대한 익숙하게 노출시키는 것만이 답이었다. 그리고 모르는 단어나 표현은 듣는 족족 물어서 알아놓았다. 그러다 보니 6개월이 지나고 1년이 다 되면서는 귀가 열리기 시작하더니 그들의 영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귀가 열리고 나니 나의 입도 그때부터 제대로 열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원어민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듣는 반응 중 많은 것은 나의 영어 발음이 좋다는 것이었다. 이민자들이 많은 뉴질랜드에서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많은 이민자들이 자국 나라의 억양이나 악센트가 들어간 예를 들면 인도식 영어라든지 한국식 콩글리쉬와 같은 자국의 발음이나 악센트가 섞인 영어를 사용하는 데 나는 그렇지 않고 영어 발음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도 발음에서 부딪힌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학교에서 일하면서부터였다. 학교는 어른들도 있지만 아무래도 아이들과 소통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아이들에게 직접적인 피드백을 받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바로 'z' 발음이었다. 한국에서는 사실 이 알파벳을 그다지 많이 사용할 일도 없거니와 제대로 발음하지 않아도 우리끼리 통용되는 발음으로 이해가 되곤 하는 발음 중 하나이어서 크게 문제 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외국에 나와보니 나뿐 아니라 한국사람들이 얼마나 이 'z'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했구나라는 것을 절실히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학교에서 z 가 들어간 학생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학생들이 나를 이상한 듯이 쳐다보았고 그중 당돌했던 한 명의 아이는 나에게 '그건 이렇게 발음하는 거야, 리즈.' 하면서 나에게 발음 교정을 해주었다. 처음에는 아이들에게 지적받는 것이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그만큼 순수한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내 발음이 그들의 발음과 다르게 들렸기에 이야기를 했었을 것이기에 나는 집에 오면 발음을 찾아 혼자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그리고 다음 날 학교에서 가면 나아지는 경우도 있지만 또 지적이 오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혼자 연습을 하고 연습을 해도 그들처럼 자연스럽게 'z' 사운드가 성대를 울리면서 자연스럽게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그들의 귀에 나의 'z' 사운드는 'j' 사운드와 비슷하게 들렸던 것이었다. 그만큼 쉽지 않았던 것이 'z' 발음이었다.
이 외에 또 하나 발음에서 새롭게 중요하게 알게 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단모음과 장모음이었다.그와 관련한 두 가지 일화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자료실 키를 받기 위해 오피스 직원에게 'Can I get the keys to the storage?'자료실 키 좀 가져갖도 될까?'라는 질문에 그녀는 무슨 키즈냐며 나에게 물었고 몇 번의 질문 끝에 나는 그녀가 내가 말한 'keys'를 'kids'라는 단어로 들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정확하게 아 keys라고 말하며 가운데 e 발음을 길게 해 주었다. 나는 길게 발음해야 할 keys 발음을 짧게 하는 바람에 내가 말한 문장이 '자료실로 아이들을(kids) 좀 데려다도 될까?'라는 말로 그녀에게 들렸음을 알았다. 그리고 또 한 경우는 미들 학년 친구들 수업에 보조로 참여했을 때였다. 그때는 담임선생님 부재로 정년퇴직한 선생님이 대타로(?) 잠시 수업을 해주시고 계셨었는데 그 선생님이 나에게 자료 몇 부 프린트를 내게 부탁했고 그 과정에서 나는 어떤 종이를 말하는 거야라고 물었는데, 그 선생님이 당황한 얼굴로 웃으면서 '리즈, 너 지금 그 단어 조심해서 말해야 해.'라고 알려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sheet'과 비속어와 은어를 뜻하는 'shit'이었다. 종이를 뜻하는 앞의 단어는 길게 발음을 해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짧게 발음을 하여 그에게 내가 욕을 한 꼴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는 유머 있으면서 친절했기에 쉬는 시간에 나에게 와서 다시 그 발음을 해보라고 알려주었고, 그 후에도 종종 나를 틀리게 말할 때마다 놀리기도 했지만 몇 번이고 내가 제대로 발음할 때까지 알려주었다. 그는 내가 이민자이므로 모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진심으로 알려주었기에 나는 실수를 하고도 크게 주눅 들거나 하지 않고 그와 편하게 배우면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내가 막상 현지에서 부딪히면서 정말 중요하다고 느낀 것은 다름 아닌 '발음'이었다. 한국에서는 의외로 단어나 문법에 대해서는 지적을 받더라도 발음에 대해서 지적을 받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한국에서 외국인과 수업하거나 할 때에도 강사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듣다 보니 한국인들이 많이 틀리거나 어려워하는 발음들을 굳이 그때마다 지적해 주니 않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았다. 그러나 한국이 아닌 영어국가에서 영어를 사용하다 보니 그들에게 가장 먼저 이상하게 들리는 것은 우리가 단어 몇 개 틀리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하는 발음이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역지사지로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한국말을 하는데 단어 모르는 것은 그다지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고 넘어가게 되는데 발음을 다르게 하면 우리 귀는 바로 그걸 픽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내 경험에 비춘 결론은 영어권 국가에서 영어를 하는 데 있어서 단어나 문법보다 중요하고 원어민들이 더 크게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발음'이라는 것이다.(물론 기본적인 단어로 문장을 만들 수 있는 기본실력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이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자면, (이건 정말이지 멘붕이 왔던 일인데) 레스토랑에서 햄버거를 주문하려 하는데 나의 버거 발음을 그들이 알아듣지 못해 몇 번이고 다시 발음해야 했던 적도 있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 언니 가족들이 놀러 와 있었을 때였는데 한동안 한국말만 하다 보니 영어로 'burger'라고 중간에 'r' 발음을 해야 했는데 나는 무심결에 한국식으로 클리어하게 '버거'라고 발음을 했던 것이었다. 사실 그렇게 해도 보통은 대충 알아듣는 경우도 많은데 그 직원은 무슨 말이냐며 계속 물었고 나는 그제야 내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r' 발음을 제대로 한 후에야 주문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단어는 알아도 알파벳 하나를 제대로 발음하지 않아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도 존재한다. 그러니 영어공부를 할 때 그리고 특히나 외국에 나와 살 계획이 있는 경우라면 더더욱이 단어하나를 공부하더라도 제대로 된 영어식 발음으로 공부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