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주눅 들지 않는 자신감!
외국에 살면서 그리고 외국에서 일하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언어'일 것이다. 그 사실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우선 외국에서 살려면 언어가 필요하다는 것은 의사소통을 하는 도구이기에 맞는 사실이고 어쩌면 가장 기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실력의 편차에 대해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중, 고등학교 혹은 대학교에서 배운(영어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영어만으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을 하고 어느 정도 지낼 수 있다. 실제로 주변에 이민사례나 유학사례, 워킹홀리데이 사례들을 볼 때 언어 때문에 어려움을 느꼈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환경적, 경제적 요인 등 다른 요인이 아닌 언어 때문에 포기하고 왔다는 사례는 다른 요인들에 비해 적거나 거의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 말인즉은, 우리가 정규학교에서 배운 영어만으로도 어려움은 느낄지언정 충분히 외국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고 거기에 더 욕심을 내어 일을 하거나, 현지인들과 어울리고 싶다면 영어공부를 하는 노력을 곁들이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나 역시도 막상 외국 나와서 살아보니 언어보다 다른 문제들(예상치 못한 상황, 한국과 다른 문화, 생활패턴, 가치관 등)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을 몸소 부딪히며 깨닫게 되었다.
사실 영어는 이민 전에 대학시절 학부전공과 졸업 후 영어강사시절을 통해 계속해서 접해왔던지라 크게 걸림돌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에서 영어를 한 것과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외국에서 생활을 하면서 사용해야 하는 영어는 달랐다. 같은 언어이지만 사용방식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사용방식뿐 아니라 그들의 문화, 사고, 생활방식 그 모든 것이 언어에 녹아있기에 단순히 우리가 한국에서 교과서식으로 공부한 것과는 정말 크나큰 차이였다. 그랬기에 처음에는 내가 배워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발음과 그들만이 사용하는 뉴질랜드식 악센트의 영어가 들리지 않아 일 년 정도는 패닉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만의 악센트와 발음에 익숙해지고 (그래도 아직도 나는 미국식 영어가 편하고 미국식 영어와 영국식 영어, 뉴질랜드식 영어를 섞어서 사용한다.) 그들이 자주 쓰는 단어와 표현들을 익혀가면서 익숙해졌다.
그렇게 어느 정도 뉴질랜드식 영어가 익숙해질 즈음 학교에서 일하게 되었다. 어느 날 내가 맡은 반의 학생들 정원체험 수업이 예정되어 있어서 필요한 물품들이 다 있는지 미리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족한 물품들은 교장선생님에게 준비해 달라고 이야기를 해야 했다. 바스켓, 심을 채소모종, 비료 등 이것저것들을 확인하는데 모종삽과 흙을 담을 바스켓이 부족했다. 교장에게 이야기를 할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그날은 매달 마지막 금요일로 선생님들이 학년단위로 번갈아가며 간식을 준비해 와서 스타프룸에서 간단히 다과를 먹는 날이었다. 모닝티 시간에 모여 이것저것 준비된 음식들을 먹으며 앉아 있는데, 교장인 토니가 들어왔다. 그는 학교 일정 관련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정원체험 수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고, 나도 타이밍에 맞춰 필요한 물품들을 토니에게 이야기했다. 모종삽과 바스켓이 부족하니 준비를 더 해달라고 이야기를 하려는데 웬걸 모종삽이 영어로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아니, 생각이 나지 않는 게 아니라 그 단어를 아예 모르고 있었다. 사실 모종삽도 후에 영어로 그 단어를 찾고 나서 알게 된 것이지 그 당시에는 그냥 아이들이 사용하는 작은 삽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래서 크게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small shovel' 정도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러자 토니는 흔쾌히 알았다고 했고 여유 있게 구비를 해놓겠다고 하며 수고해 줘서 고맙다고 이야기를 했다. 나는 굳이 교장실을 찾아가지 않고도 이야기를 전하게 되어 잘됐다 생각하며 다른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다과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내 옆에 있는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자 토니가 내 옆으로 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경직'했다. 아무리 자유스러운 분위기의 학교라고 하더라도 아직 한국식 마인드와 관습에 젖어있는 나로서는 편안한 시간에 학교의 리더인 교장이 바로 내 옆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부담이었다. 갑자기 나오던 말도 나오지 않고 나는 침묵했다. 그러자 그는 나에게 아까 말한 그 삽은 모종삽이라며 영어로 'trowel'이라고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나는 경직 플러스 민망의 단계로 들어섰다. '아, 이런. 그 단어 모르다니 교장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를 영어도 잘 못하는 형편없는 직원이라고 생각하겠지?' 내가 그 단어를 모르는 것으로 그가 나를 안 좋게 생각할 것이고, 자질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온갖 안 좋고 부정적인 생각이 내 머리를 온통 에워싸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알려주는 것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가 나에게 알려주는 것이 아닌, 속으로는 나를 비난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정말 순. 수. 하. 게 나에게 그 단어를 알려주고 있었다. 마치 우리가 학생이 공부하다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당연하게 알려주듯, 한국에서 한국말을 하는 외국인이 말을 하다 잘 못쓰는 단어가 있으면 거리낌 없이 그 단어를 알려주듯, 그의 표정과 태도와 말투에는 나에게 그 단어를 알려주려는 그의 순수한 의도 외에 내가 지레 짐작한, 비난, 부정적인 것들 그 어떤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발음까지 여러 번 알려주면서 설명해 주고, 그와 비슷한 단어와 비교해서 설명해 주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조금 전까지 들었던 주눅과 열등감이 사라지고 그가 알려준 발음을 따라 하며 ' 아, 이렇게 발음하는 단어구나.'라고 하며 그에게 단어를 배우고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다시 한번 나는 외국인이고 그들은 내가 영어를 아무리 잘할지라도 외국인(그들 입장에서는 네이티브가 아닌 사람)으로 대한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이것은 때에 따라 양날의 검처럼 안 좋게도 작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후에 다른 자리에서도 나에게 그 점을 이야기했다.
리즈, 나는 나의 모국어인 영어밖에 못하는데
너는 한국어와 영어 2개 국어를 하잖아. 그러니 넌 나보다 더 대단한 거야.
라고 말이다. 그의 이 말로 나의 자존감이 올라감과 동시에 외국에서 영어를 하는 데 있어서 나의 생각이 완전히 바뀐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사실 그전까지는 나는 '그들에 비해 영어를 못하니까.'라는 생각으로 주눅 들어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면서도 헷갈리거나 잘 모르는 단어가 있을 때는 '이 단어가 아니면 어떡하지?, 이 발음이 틀리면 어떡하지?' 등등을 신경 쓰며 말이다. 그러나 막상 그들과 어울려 지내보니 그것은 그들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론 기본적인 영어실력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어실력은 필요하지만 모든 것을 그들처럼 완벽히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과 압박감은 전혀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기본적인 영어실력만 갖추고 있다면 나머지는 부딪혀 나가면 된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감'이었다. 주눅 들어 있기보다, 모르는 단어나 표현이 있을 때는 '어, 이건 뭐라고 하는 거야?' 라고 솔직하게 물어보고, 내가 모르는 단어를 알게 되거나 배웠을 때는 ' 아, 그 단어를 사용하는 거구나, 그런 표현을 쓰면 되는 거구나.' 하고 솔직하고 당당하게 이야기를 하면 되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했을 때 그런 당당함과 적극적으로 배우려는 태도에 그들은 나를 더 신뢰하고 나에게 더 많을 것을 알려주려고 한다.
나 또한 이렇게 외국생활을 하기 전까지는 영어를 하는 데 있어 '자신감'이 젤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정말 콧방귀를 뀌며 듣지 않았었다. '영어를 하는데 실력이지 무슨 자신감이야.' 하고 말이다. 물론 영어실력 하나 없이 자신감만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극과 극은 피하고,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정규학교에서 배운 기본 단어와 문장을 만드는 방식을 알고, 그것으로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면 그 다음은 배우려는 적극적인 자세와 자신감만 있다면 충분히 배우면서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외국에서 지내며 한국에서 공부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1년여를 들리지 않고 들리지 않으니 무슨 말인지 몰라 말할 수 없이 지냈던 시간을 뒤로하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몸소 부딪히고 겪으며 알게 된 외국에서 사용하는 진짜영어에 대한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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