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 리터러시 : 스물일곱 번째 이야기
며칠 전, 1998년 퓰리처상 수상작이자 서울대 도서관 대출 최장기 1위를 기록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다시 펼쳤다.
아직 완독은 하지 못했지만, 〈카하마르카에서의 충돌〉을 읽는 동안 마치 소설의 비극처럼 가슴을 쥐어뜯는 아픔이 밀려왔다.
스페인 정복자 피사로는 약 300명의 스페인 군사로 잉카제국의 지도자 아타우알파를 포로로 삼고, 4만 명의 병사를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다이아몬드는 그 장면을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잔인함에 숨이 턱 막혀 결국 책을 내려놓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때 내 안에 번개처럼 스친 질문은 이것이었다.
“카하마르카 사건은 과연 종교적 사명이었을까?
아니면 금·권력·패권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종교의 옷을 입은 것이었을까?”
예수님은 이 사건을 ‘은혜롭다’ 하실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일이라고 하실까?
내가 아는 예수님은 언제나 이런 위선을 가장 먼저 꾸짖으신 분이다.
성전에서 상인들의 상을 뒤엎으셨고, 종교적 권력자들의 가면을 벗기셨다.
카하마르카의 광장을 보셨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한 지도자들부터 먼저 책망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이 일관되게 선택하신 자리는 언제나 힘없는 사람들 곁이었다.
병든 자, 가난한 자, 배척당한 자, 그리고 십자가에서 고통받는 자들.
그분은 늘 ‘약한 자의 편’에 서 계셨다.
신약 어디에서도 예수님은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폭력을 멈추라고 하셨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 26:52)
그런데 스페인 병사들이 휘두른 칼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였다.
그들은 로마가톨릭 제국의 전차 같은 힘을 믿으며, 승리를 ‘신앙’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그 모습은 묘하게도 여호수아가 믿음으로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 극적인 이야기는 수 세기 동안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성도 무너진다’는 상징으로 남아 왔다.
스페인 병사들에게는 이 구약의 이야기가 자신들의 폭력에 ‘신의 보증서’를 붙여주는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여호수아의 여리고성 정복은
하나님이 직접 개입해 이스라엘을 보호하신 구약의 특정한 역사적 상황이었다.
그 가운데 인간의 탐욕은 자리를 차지할 틈이 없었다.
반면 카하마르카의 학살은
인간의 욕망이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해 폭력을 미화한 사건이었다.
여리고성은 ‘믿음의 서사’였지만, 카하마르카는 ‘욕망의 서사’였다.
믿음이 성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욕망이 사람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십자가를 지신 분은 언제나 고통받는 자의 편에 서 계신다.”
말발굽 아래 쓰러진 사람들.
창 한 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원주민들.
신을 모른다는 이유, 믿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죽음 앞에 내몰린 이들.
예수님이 그 자리에 계셨다면
그분은 검을 든 자들 뒤가 아니라
쓰러져가는 자들의 손을 붙잡고 계셨을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와 함께 있다.”
“사람의 생명은 그 어떤 황금보다 귀하다.”
신앙과 권력이 뒤섞일 때, 아이러니는 극대화된다.
카하마르카의 광장에서 스페인 병사들은 이렇게 믿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신의 영광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싸우라고 하신 적이 없다.
누군가를 공격해 달라고 부탁하신 적도 없다.
바로 이 지점이, 오늘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신앙의 슬픔이다.
신의 이름은 도구가 아니며,
누구의 전리품도 아니다.
카하마르카 사건은 단지 과거의 비극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너희는 나의 이름으로 누구를 살리고 있느냐?”
“너희는 약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
“너희는 평화를 위해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느냐?”
역사를 읽는 일은 과거를 방문하는 일이 아니다.
곧 현재의 우리를 돌아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