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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게 빛나려면

프레임 리터러시 : 스물 네번째 이야기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이렇게까지 애쓰는 이유가 뭘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계속 해야 하나?”

“나만 바보처럼 성실한 건 아닐까?”


회의가 밀려오면

내가 서 있는 자리가 흐릿해진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이제는 놓아야 될까?’


그러다 또 생각한다.

이런 마음을 갖는 게 나만은 아니겠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과 감정 사이에서

어딘가를 붙잡고 버티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다독인다.

“다들 이 정도는 느끼면서 사는데,

나도 감사해야지.”

하지만 몸이 지치고 마음이 무거워지면

이 다짐도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그럴 때 문득 떠오른다.

바다 위의 등대를.

등대는 말하지 않는다.

빛을 과시하지도 않는다.

누구에게 잘 보이려 애쓰지도 않는다.

다만 자신의 자리에서

거기 있어야 할 이유를 잃지 않는다.

거친 파도 속에서도,

폭풍의 밤에도,

등대는 흔들리지 않는다.

빛은 크지 않지만

누군가는 그 작은 빛 덕분에

길을 잃지 않는다.


나는 종종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눈에 띄지 않아도 방향을 잃지 않는 마음.

스토아 철학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진짜 강한 사람은 소리 없이 버틴다.

그러나 버틴다는 건 침묵이 아니라 방향을 잃지 않는 것이다.”


묵묵함은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기준을 지키는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가끔,

내가 추구하는 이 방향을 나만 지키는 거 같아 힘이 든다.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조용한 결심이야말로 가장 깊은 소리다.”

다른 누구에게 들리지 않아도

자신의 마음에 울리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하지만 내 마음은 지금

울림보다 공허함이 더 크다.


빅터 프랭클은 말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마지막 남는 자유는

그 상황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이다.”

그 말을 붙잡으면

묵묵히 해내는 사람은

사실 포기하지 않는 사람,

태도를 잃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 외로움의 근원엔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


철학자 헤겔은 인간의 본질을

“인정 투쟁”이라 했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시선이 닿지 않을 때,

우리는 쉽게 스스로를 부정한다.


심리학자 매슬로는 이를 ‘존중 욕구’라 불렀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한 일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느끼고 싶은 본능이 있다.

그러나 그 욕구가 좌절될 때,

사람은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느끼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구조라는 점에서

모두가 비슷한 기준으로 평가받고,

비슷한 방식으로 칭찬받는다.

그 부류에 속하지 않으면 좌절하고 포기를 한다.


한편 과학은 다르게 말한다.

DNA 조합의 확률로 보면

인류 70억 명 중 단 한 사람도 같은 존재는 없다.


우리의 뇌 신경망 역시

지문처럼 유일한 구조를 지닌다.

즉, 우리는 애초에 비교될 수 없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표준화된 기준’ 안에서

자신을 재단하고, 남의 잣대에 자신을 맞추려 한다.

그 결과는 상실감이다.

‘나는 왜 이 정도밖에 안 될까?’

‘나는 왜 저 사람처럼 빛나지 못할까?’


하지만 진짜 문제는

‘빛나지 않음’이 아니라,

나의 빛을 인정하지 않는 마음이다.


그 힘은 타인의 박수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에게 보내는 믿음이 필요하다.


나는 버티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겠다.

과학도 유일무이한 존재를 우리 자신이라고 증명하는 것처럼

그것이 나만의 빛이고,

내가 존재하는 이유다.


퇴근하는 길 여전히 마음이 무겁고 힘들지만

나 자신을 위로하며 밤하늘을 바라본다.


“오늘도 나답게 빛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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