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나도 엥뿌삐이고 싶지만, 지금 이대로의 나도 잘 하고 있어
어렸을 때부터 나는 얌전하고 조용한 아이였다. 학교를 다닐 때도 친구들과 놀거나 학원에 가지 않는 이상 대체로 집에서는 혼자 놀면서 시간을 보냈다. 혼자 놀아도 할 게 무궁무진했고, 책을 읽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다 보면 금세 잠잘 시간이 됐다. 취미나 특기는 항상 혼자서 조용히 할 수 있는 독서 혹은 글쓰기였다. 그래도 친한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땐 노래방에 가서 미친듯이 뛰어 놀기도 하고 수다 떠는 것도 좋아했지만, 대체로 별로 안 친한 사람들과 있을 땐 지금까지도 말수가 적은 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말수가 적다기보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 같다. 일단 정말 중요한 자리(면접, 뭔가를 설득해야만 할 때, 과제 발표 등)를 제외하면 구구절절 말을 많이 하는 게 귀찮았다. 특히 누군가와 1:1로 대화할 때마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라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러다 보니 항상 대화가 매끄럽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고, 다양한 사람과 깊은 관계로 이어지는 게 어렵게만 느껴졌다.
사실 스무 살 즈음까지는 친하지 않은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는 게 힘들었는데, 때때로 상대방과 눈을 마주치며 대화하는 동안에 아주 조금이라도 어색함이 느껴지는 순간 얼굴이 빨개질 때도 있었다. 상대방을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그러면 왜 나는 얼굴이 빨개졌던 걸까? 지금 돌이켜 보면 순수했던 시절이었네, 하며 귀엽게 추억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얼굴이 빨개지는 게 너무 스트레스였다. 지금은? 다행히도 전혀 안 그렇다. 살면서 여러 사람들을 보고 겪으며 수줍음도 무뎌졌나 보다. 대학교를 다니고 졸업을 하기까지 온갖 인간군상을 겪고, 사회생활을 겪으면서 20대 후반쯤부터 이런 문제는 많이 해결되었다. 나이가 들 수록 뻔뻔함과 넉살이 생기는 게 느껴진다.
대학교를 영화과에 진학하게 되며, 입학 후 2학년 2학기 때 처음으로 단편영화의 연출을 맡았다. 내가 직접 쓴 시나리오로 배우들을 직접 캐스팅하고, 촬영을 준비해서 처음으로 감독을 하게 된 것이다. 웬만해서는 아무리 작은 규모의 독립 단편영화여도 촬영장 스탭은 배우들을 포함해서 10명 이상으로 구성된다. 현장에서 연출은 하루종일 정말 많은 말을 한다. 모든 일이 연출의 말로 진행된다. 모니터 앞에 앉아서 "레디, 액션!"을 외친 뒤, 배우가 연기를 마치고 나면 10명 이상의 사람들은 일제히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의 '컷' 신호를 기다리는 거다. 내가 "컷!"을 외치고 나서도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오케이인지, 한 번 더 갈 건지 어쩔 건지 기다리고 있다. 오케이면 다행이고, 한 번 더 가야 한다면 모두를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말해야 한다. 정말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보통은 촬영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보였거나 배우에게 디렉팅을 다시 요청하고 싶을 때 NG를 외친다. 이런 과정을 밤낮없이 짧으면 3일, 길면 5일 간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씻지도 못한 극한의 멘붕 상황에서 몇백 번 반복해야 비로소 15분 내외의 단편영화 촬영이 끝난다.
영화를 찍으며 깨달았다. 사람이 잠을 너무 안 자면 입에서 언어가 잘 안 나오는 구나. 차라리 잠이라도 푹 자고 일어나서 충전된 상태로 사람들을 대한다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것 같다. 잠을 덜 자면 사회성에도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사리분별이 어렵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를 잘 쓰고, 멋진 컷을 구성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결국 영화를 찍는 것도 많은 사람들을 지휘하고 소통하고 설득하는 일이다. 내향인으로 평화롭게(?) 살아온 내게 영화 연출은 매 학기마다 정말 힘든 챌린지였다. 내 멘탈이 멀쩡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려운 장면을 자꾸만 부탁하고 찍어야 하는 게 미칠 노릇이었다. 현장에서 '대체 내가 왜 이런 내용을 썼지?' 생각하며 자신감과 자존감이 떨어지는 순간 멘붕이 찾아온다. 나중에는 방금 본 연기가 OK인지 NG인지 감독인 내가 판단하기 어려웠다. '이걸 결정해야 하는 건 나 밖에 없는데, 일단 지금 사람들이 많이 지쳤으니 OK라고 하자. 편집 때 어떻게든 되겠지.'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촬영은 망하기 시작했다. 여러 번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졸업영화를 찍을 무렵에야 잡생각을 줄이며 연출을 조금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영화 연출을 통해 단련을 해서 그런지, 졸업 후 입사해서 만드는 유튜브형 콘텐츠들은 식은 죽 먹기였다. 영상을 만드는데 더 이상 50시간 가까이 못 자면서 밤을 새지 않아도 되고, 영화처럼 모든 컷을 하나하나 배우에게 설명하고 모든 스탭이 힘들게 찍는 포맷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 돈으로 찍는 게 아니라는 점도 연출을 하는 데 있어 굉장히 심리적인 안정감을 줬다. 심지어 돈을 벌면서 촬영하고 있다니! 대체로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아침에 출근해서 퇴근 전에는 촬영이 끝났고, 집에 가서 내 침대에서 잠을 잘 수 있다는 게 너무나도 행복했다. 다만 졸업 후에 웹드라마를 찍었을 때는 학교에서와 똑같이 밤을 새며 힘겨운 촬영을 진행했었는데, 그래도 학생 때보다는 짬이 차고 요령이 생겨서 고통이 덜했었다.
나는 계속해서 유튜브 예능을 제작했고 학교에 다녔을 때보다 힘든 촬영은 이제 더 이상 없지만, 스스로에 대한 또다른 스트레스가 생겼었다. 예능에서 제작진과 출연자의 티키타카가 중요한 콘텐츠를 맡을 때마다, 스스로를 또 내향인의 프레임에 가두게 된다는 점이었다. 내가 그동안 보아 온 다른 예능 연출 PD들은 대체로 외향인들이었다. 심지어 MBTI를 물어보면 대부분이 ENFP였다. 현장에서 만나는 출연자들도 대체로 아이돌 친구들이나 외향적인 사람들이었는데, 정말 프로가 아닌 이상 외향인들도 카메라 앞에 서면 연출 PD가 어느 정도는 텐션을 이끌어내줘야 했다. 박수를 치고, 리액션을 하고, 대본에 없는 내용을 기습 질문을 하면 센스 있게 받아쳐야 한다. 그리고 그걸 카메라가 다 찍고 있다. 재미 포인트를 건지기 위해서다. '아, 이건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는데..?' 처음에는 또 뚝딱이처럼 멘붕이 왔다. 나보다 열 살 어린 남자 아이돌 친구가 애드립을 쳤는데, 순간적으로 사고회로가 멈춰서 리액션을 못했다. 클라이언트 측에서는 내게 출연자가 갈피를 잡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리액션을 잘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상황이 되니 압박감이 생겨서 잘 할 수 있었을 말도 어버버하게 된다.
어디에 내색한 적은 없지만, 처음에는 스트레스를 받았다. 괜히 나의 성향을 탓한 적도 있다. '만약에 내가 ENFP PD였다면 더 재밌는 그림이 나왔겠지?', '내가 외향인이었다면 출연자와 더 빨리 친밀감을 형성하지 않았을까' 같은 이상한 자책을 했다. 유튜브에 올라온 비슷한 다른 예능들을 보면 PD들이 재미있게 잘 말하고 받아치던데, 목소리도 작고 말도 느리게 하는 나 자신이 아쉬웠다. 그래도 이게 어릴 적보다는 많이 사회화되고 외향적인 사람이 된 상태인데도 말이다.
음.. 근데 예능 PD라고 해서 외향인만 있어야 하는 법은 없잖아? 그래도 어릴 적보다 나아진 점은, 내 힘으로 완전히 바꿀 수 없는 나의 어떠한 문제가 있다면 그 안에서 장점으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예전이라면 '그래 난 역시 내향인이야..' 하며 주눅들겠지만, 이제는 '내향인인데 뭐, 여태 이렇게 살아왔는데 뭐 어쩔 건데?' 마인드가 깔리게 된 것이다. 나는 외향인 PD만큼 리액션과 티키타카가 재밌진 않아도, 그들보다 꼼꼼하고 섬세하다고 생각한다. 외향인 PD였다면 외향인 출연자와 친구를 먹을 만큼 급격하게 친해졌을 지도 모르지만, 촬영장에 친구 사귀러 나온 거 아니지 않나. 어쨌든 일 하러 모인 비즈니스 관계고,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내 선에서 최선을 다해 많은 대화를 먼저 시도하고 질문을 했다. 내일 A라는 장소에 촬영을 하러 간다면 전날 나무위키에 A를 검색해서 그곳에 대한 모든 정보를 읽어 보고 숙지해간다. 그러면 현장에서 출연자를 만났을 때 내가 먼저 꺼낼 이야깃거리가 많아진다. '여기는 ~~해서 @@한 곳이래요. 신기하지 않아요?' 이 정도만 던져 줘도, 출연자들은 대체로 워낙 리액션이 좋은 사람들이라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러면 나는 알고 있는 정보가 있으니 그거에 대해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나가면 된다. 그렇지 않다 해도 상대방에게 내가 뭔가를 꼼꼼히 준비했다는 인상을 주는 것만 해도 믿음직한 인상을 주지 않았을까? 이런 식의 대화를 주고 받다 보면 나도 출연자와 점점 라포를 형성하게 되고, 처음에는 어렵기만 했던 티키타카를 즐기는 단계로 오게 된다.
불과 올해 초만 해도 '내가 외향인이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지금은 전혀 하지 않는다. 나는 나만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외향인 PD들이 현장에서의 임기응변에 강하다면, 나는 미리 준비된 정보와 다년간의 영화 연출 경험을 통해 계획적으로 매끄러운 현장진행을 하는 것에 자신이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조심스럽고 꼼꼼한 성격이 후반 편집 작업에서 빛을 발한다. 촬영장이 재밌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결과물이 재미있게 좋은 퀄리티로 나와야 하지 않나. 그 부분에서는 자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마음가짐으로 촬영장에 가니, 더 이상 연출이 두렵지 않았다. 현장에 내 진행만 기다리고 있는 스탭과 클라이언트가 수두룩해도, 출연자가 갑자기 나에게 예상 밖의 이야기를 꺼내도 쫄지 않는다. 미리 준비만 잘 해두고, 나다움을 스스로 인정할 때 모든 게 쉬워진다. 내일도 촬영인데, 나 혼자 또 한 번 주문을 걸고 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