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사 May 09. 2023

내가 작가지 작부냐?

모 방송사 특집 다큐 제작팀에서 일한 적이 있다.

두 번 했는데 한 번은 이력서에 기재하지 않는다.

기획 단계에서 그만뒀기 때문이다.


왜 그만뒀냐고?

나는 작가지, 작부가 아니니까.



작부 (酌婦) : 술집에서 손님을 접대하고
술 시중을 드는 여자.


당시 난 공중파로 돌아가고 싶었고

해외 촬영 준비까지 배울 수 있는 기회라서

작가진이 메인 작가와 나 달랑 둘 뿐이고

조건도 좋지 않은 그 일을 하기로 했다.


난 상근이었고,

메인은 다른 프로그램을 병행하면서

사무실 출근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문제는 연락이 안 돼도 너무 안 되는 거다.

처음 며칠은 다른 일 때문에 못 받으시나 보다,

중 보시면 전화 주시겠지 했다.


근데 웃긴 게

내 문자엔 답도 없고 전화도 안 받으면서

피디님이 전화하면 바로바로 받는 거다 ㅡㅡ

오죽하면 피디님이 김작가, 내가 해볼까?

하시기 시작했을까.

그때 솔직히 같은 작가로서 쪽팔렸다.


그녀가 나한테 전화하는 건

사무실에 피디님 계시는지 물을 때 정도.

그것도 어쩌다 한 번인데

'안 계세요' 하면 알았어~ 하고 끝이고

'계세요' 하면 잠깐 낯짝을 들이밀었다.


와서 하는 얘기라곤

피디님이 참 좋은 분이니까

많이 배우라는 것뿐이었는데

그 말도 꼭 피디님 들으시는 데서 했다.


근데 제 직속선배는 당신 아니던가요...?


그런 식으로 한 달 정도 지냈다.

진척도, 기획료도 없이

혼자 자료조사만 하고 있으니 그만둘까 싶다가도

방송 나가기 전에 그만두면

한 푼도 못 받는데 아깝단 생각도 들

계속하면 배우는 게 있겠지,

그리고 공중파 해야지... 하면서 디고 있을 때

사무실에 온 그녀가 당일 회식을 잡았다.


가볍게 한 잔 하는 자리였다.

피디님은 점잖은 분이셨고,

직전 프로 피디님과 달리

술을 억지로 먹이지도 않으셨는데

그녀가 유부남이신 피디님께

자꾸 달라붙는 통에 좀 불편해졌다.


그래서 화장실이나 가려고 일어섰는데

굳이 따라나선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뭐라 했는지 아는가?

당사자는 기억 못 하겠지만 난 똑똑히 기억한다.


"넌 왜 피디님한테 술을 안 따르니?
작가가 애교도 좀 부리고 그래야지~"



귀를 의심했다.  



"야, 작가는 다 그러는 거야~"



 뭔 개소리야???


내가 작가지, 작부냐?

작가가 애교는 왜 부려야 하는데?

당신이나 그렇게 살아!!!


작부로 살아가는 법 배우고 싶었던 게 아닌 난

다음 날,  다른 작가 구하시라고 했다.


그때 아주 기막혀하던 그녀의 소식을

년 뒤, 생각지도 못한 데서 듣게 됐다.


인성이 아주 개차반이거나

후배 작가들 돈 떼먹는 식의

문제 있는 선배들과 제작사 정보가

일명 '구성작가 블랙리스트'란 이름으로

작가 사이에 돌았는데

'후배한테 손찌검하는 작가'로 올라온 것이다.


어떤 프로그램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한 두줄로 정리되어 있었는데

연차나 프로그램 정보도 일치하지만

이름까지 독특해서 그녀임이 확실했다.


그런 식으로 살더니 후배 손찌검까지...

그런 인간이 아직까지도 작가 생활을 하고  있.


이쯤 되면 그 작가가 실력이 있나 보지,

그리고 피디한테 하는 거 보니

기본적으로 처세를 잘했네.

사회생활에서 일보다 중요한 게 처세 아니겠어?

사회생활이 다 그렇지 뭐~

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다.



난 그런 게 사회생활이라고

규정짓는 것부터 문제라고 본다.


사회생활이 원래 렇다며

부조리를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는 자세.



세상에 원래 그런 건 없다. 


사회생활에 대한 통념은

인간이 만든 잘못된 관습이 굳어진 것이 많다.

잘못된 것은 고쳐야 한다.


물론 사회생활이라는 미명 하에

온갖 부조리를 통용하는 한국 사회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고,

세상을 바꾸기어렵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여럿이 하면 바꿀 수 있단 얘기다.


잘못된 통념을 인지하고

개선하려는 개인이 많아져야 한다.

그리고 함께 목소리를 높여야만  

더 나은 사회에서 살 수 있다.


실제로 회식 문화도 꽤 달라졌잖나.


더 이상은 잘못된 걸 답습하지도 말고

더 나은 세상을 체념하지도 말자.


누군가는 이런 날

인생 참 힘들게 산다 생각할 수 있다.

맞다, 힘들다.


하지만 난 앞으로도 이렇게 살 거다.


살만한 세상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될 때까지.


그래야 할 것 같고


매거진의 이전글 방송작가를 한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