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4 목요일 a) 수선루와 팔성사, 그리고 영월암
이번 여행을 와서는 아침마다 코로나에 걸린 아들과 사위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 첫 일이다. 딸, 아들에게 한 번씩 전화한 후 느긋이 아침을 먹고 숙소 밖으로 나왔다. 자연휴양림이 위치한 이곳 운장산은 높이가 1,126m로서 이 지역에서는 상당히 높은 산이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산이라는데, 우리야 구태여 등산까지는 할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에 숙소 주위를 가볍게 산책하였다.
수선루는 진안에 있는 정자인데 상당히 독특한 위치에 독특한 형태로 지어져 있다. 보통 정자라면 강이나 호수가 높은 언덕 위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은 것이 일반적인데, 수선루는 낮은 산 중턱에 천연 동굴을 이용하여 지었다. 정자 바로 아래에는 논밭이지만 그곳을 건너면 저 쪽에 섬진강이 흐르고 있으므로 경치는 괜찮은 편이다.
처음에는 정자 이름이 ‘수선루’라 길래 꽃 이름에서 가져온 ‘水仙樓’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현판을 보니 신선이 졸고 있다는 뜻의 ‘睡仙樓’이다. 운치 있는 이름이다. 이곳에서 술을 한잔 하면서 섬진강의 경치를 내려다보며 꾸벅꾸벅 졸며 시간을 보낸다면 어찌 신선이라 하지 않겠는가? 수선루는 전북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몇 년 전에는 보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수선루는 17세기 말 경 이곳에 사는 우애가 돈독하고 학문이 높은 송 씨 4형제가 늙은 아버지와 친구들이 만년을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그들의 아버지는 이곳에 벗들을 불러 모아 술을 한잔 하면서 시도 짓고 바둑도 두면서 행복한 만년을 보냈으리라. 노인들이 이곳에서 즐기고 있으면 자손들은 술과 음식을 날라 그들을 대접하는 것이 당연하다. 다행히 이곳은 마을과 얼마 떨어지지 않고 길도 험하지 않아 술과 음식을 나르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을 듯하다.
몇 년 전 보길도 여행에서 고산 윤선도가 술과 독서를 즐겼다는 동천석실에 가 본 적이 있다. 험한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어 가파른 바위길을 20분 이상 걸어 올라가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곳에서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며 술도 마시고 독서를 하는 윤선도야 지극히 행복했겠지만 그에게 술과 음식을 날라다 주는 하인들은 보통 고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에 비한다면 이곳은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여생을 즐길 수 있는 그런 평화로운 정자라 할 것이다.
정자는 얕은 동굴 입구에 마치 바위에 파묻힌듯한 형태로 세워져 있다. 들어가는 문이 잠겨져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하였지만 깊은 동굴은 아닌 것 같다.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 쪽에 바위에 박힌 듯이 정자가 지어져 있다. 이곳은 낮은 산의 중턱 아래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높지는 않다. 그래서 저 멀리 보이는 섬진강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산을 등지고 강을 내려다보는 이곳은 정자로서는 더없이 좋은 위치에 있으며, 정자를 감싸고 있는 높다란 바위는 여름에도 시원한 공기를 내뿜을 것 같다.
팔공산이라면 대구시를 멀리서 내려다보고 있는 산으로서, 그곳에는 동화사, 파계사, 송림사 등 유서 깊은 사찰들이 있다. 그런데 전북 장수군에도 같은 이름의 팔공산이 있다. 장수 팔공산에는 팔성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번엔 그곳을 찾기로 하였다.
팔성사는 처음엔 계획이 없던 곳이었다. 장수군의 유명 사찰로 영월암이라는 곳이 많이 소개되고 있던데, 그곳을 가려고 하니 내비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장수 팔성사라는 곳이 영월암과 함께 소개되고 있어 영월암이 팔성사에 딸린 암자로 생각하고 이곳을 찾은 것이었다. 도착하고 보니 팔성사는 영월암과는 관계가 없는 곳이며, 거리상으로도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팔성사는 백제 무왕 때인 7세기 초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이 절의 창건자인 해감((解橄)이 이 절을 세운 후 그의 일곱 제자가 이 근처에 암자를 1개씩 지어서 팔성사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절을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데 산 길을 꽤 오랫동안 올라가야 하는 높은 위치에 있다. 그래도 그다지 걷지 않아 좋다.
장수군이라는 오지에 위치하고 있는 절이라 아주 작은 절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는 크다. 크지는 않지만 여러 개의 전각이 들어서 있으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지 모두 산뜻한 단청으로 장식되어 있다. 들어가는 입구 왼쪽에는 작은 범종각이 마치 누각처럼 높이 세워져 있다. 절 뒤로는 키 큰 소나무 숲이 있으며, 절 마당 앞에는 정원수가 절 가꾸어져 있어 절 전체가 마치 잘 가꾼 정원과 같은 느낌을 준다.
대웅전 옆에는 최근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큰 석불이 서있다. 그다지 넓지 않은 터에 여러 개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데 하나같이 정갈하고 깨끗하다. 팔성사가 팔공산 산 허리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절 마당에 서면 앞이 탁 트여 주위 경치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처음 와보는 곳이라 산 아래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산과 산사이에 마을들과 논밭이 보인다. 애초에 계획에 없던 코스였지만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인터넷에서 장수군의 사찰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곳이 영월암이다. 이곳은 달이 오랫동안 비친다고 하여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 절은 1910년에 창건되었고 한국전쟁 때 불탄 후 1952년에 중창되었다고 하니 그다지 전통 깊은 절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규모가 큰 절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곳이 이름이 알려진 것은 사찰음식이 유명하기 때문이다. 절은 비록 오래되지 않았지만 절 뒤쪽에 몇 개의 토굴들이 있는데, 삼국시대부터 그곳에서 원효대사 등 이름난 고승들이 수련을 했다고 한다.
관광객은 우리뿐이며 승려들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절은 전체적으로 깨끗이 관리되어 있다. 사찰음식으로 유명한 곳이라 사람이 많이 찾으므로 항상 깨끗하게 관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절에 들어서면 비교적 넓은 마당이 있고, 그곳에서 돌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주건물인 극락전이다. 극락전 좌우에는 범종각을 비롯한 몇 개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하나같이 산뜻하게 단청이 올려져 있는 깨끗한 건물이다. 절 경내에도 많은 정원수가 심어져 잘 관리되고 있다.
극락전을 왼쪽으로 돌아 산 위쪽으로 올라가면 고풍스런 건물이 하나 나타난다. 바로 성은정사(城隱精舍)이다. 이곳은 18세기 초 유학자인 정석후란 분이 은거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칠 목적으로 창건한 건물이라 하는데, 현재의 건물은 1911년에 새로 지은 것이라 한다. 이 건물은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영월암이 비록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산 아래 경치는 제대로 볼 수 없는데 비해 이곳에 올라오니 산아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다.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서 정은정사를 지었다고 하는 안내판을 보고 엉뚱한 생각도 든다. 이곳은 산 중턱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야 차를 타고 쉽게 올라왔지만, 그 옛날 이곳까지 오기 위해서는 마을에서 아마 몇 시간을 산길을 걸어 올라와야 했을 것이다. 그러자면 이곳에 오고 가는 데에만 몇 시간이 걸렸을 텐데 불편해서 어떻게 공부하러 다녔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숙식을 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집도 작고 또 부엌과 같은 조리시설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너무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