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이야기: 미국으로 간 당구, 기술의 발전과 게임의 변화
1859년 미국의 디트로이트와 뉴욕에서 포켓이 없는 4구 시합이 최초로 개최되었다. 즉, 본격적인 캐롬 당구 시대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이때 경기 규칙은 4구 게임으로서, 수구로 흰 공 붉은 공 관계없이 맞추기만 하면 되는 게임이었다. 우리나라 30점대 초보자들이 치는 소위 “요시다마”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공을 맞추게 되면 1점을 획득하게 되는데, 500점을 먼저 치면 이기는 게임이었다.
이 시합 결승전은 미국의 마이클 펠런과 “프랑스의 악마”라 불리는 유럽 선수가 맞붙게 되었다. 두 선수는 장장 7시간에 걸쳐 경기를 했는데, 결국 펠런이 승리하였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펠런에 의해 기록된 하이런은 9점에 불과하였다. 정상급 선수들의 게임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초라한 기록이다. 2개의 붉은 공과 1개의 흰 공을 합해 3개의 공 가운데 2개 이상만 맞추면 되는 경기에서 세계 챔피언이라는 선수가 500점을 치는데 7시간이나 걸리고, 하이런 9점 만을 기록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는 점수이다. 그러나 그때는 기술도 발달하지 않았고, 또 당구 용품도 변변찮았으므로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이 국제 시합을 계기로 당구 기술은 급속도로 발달하게 된다. 초크와 팁, 그리고 쿠션이라는 당구 용품의 획기적인 발전과 함께 새로운 테크닉이 급속도로 개발된 것이었다. 이외에도 중요한 것이 새로운 시합 방식의 도입이었다. 지금까지의 4구 게임은 수구를 제외한 나머지 3개의 공 가운데 2개 만을 치면 되니까 너무 쉬웠다. 그래서 새로이 스트레이트 레일(straight rail)이란 게임이 도입되어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스트레이트 레일 게임이란 지금의 쓰리쿠션 게임과 같이 공 3개를 사용하는 게임으로서, 3개의 공으로 하는 4구 게임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즉, 수구로 쿠션에 관계없이 나머지 2개의 공을 치기만 하면 되는 게임이다.
스트레이트 레일 게임이 시작되면서 당구의 기술은 곧 눈부신 발전을 시작하였다. 바로 공을 모으는 기술이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이 크롯칭(crotching)이라는 기술이다. 크롯치(crotch)란 사람의 양다리의 가운데, 즉 “가랑이”를 뜻한다. 당구에서 크롯치란 당구대의 장축과 단축이 만나는 코너 쪽을 말한다. 크로칭 기술은 공을 크로치, 즉 코너로 모아간 후에 공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상태에서 끝없이 치는 기술을 말한다.
펠런의 시합이 있은지 얼마 후 세계 최초의 캐럼 당구 챔피언이자 <과학적 당구>(Scientific Billiards (1880))란 책의 저자이기도 한 알버트 가니어(Albert Garnier)는 한 시합에서 애버리지 12점, 하이런 113점을 기록하였다. 그런데 이후 나온 기록들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1931년 신화적 선수라 알려져 있는 찰리 피터슨(Charlie Peterson)은 10,232점의 하이런을 기록하였다. 공을 모아 치는 기술이 점점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공을 모으는 기술을 영어로 너스 테크닉("nurse" techniques)이라 하는데, 다양한 종류의 너스 기술이 발전하였다.
크롯칭 기술이 소개되면서 스트레이트 레일 게임에서 선수들의 점수가 급속히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선수들은 점수를 올렸지만 이를 관전하는 관중들은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생각해 보시라. 공을 한쪽 코너에 몰아넣어놓고 공을 거의 움직이지도 않은 채 공을 수십 개, 수백 개씩 치곤 하니, 구경하는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그것을 보고 있겠는가? 크롯칭 기술이 나오자마자 곧 당구협회는 크롯칭 기술을 금지하였다. 크롯칭 금지를 위해 도입된 룰이 보크 라인(Balkline)이다. 보크 라인이란 당구대 위에 구획을 정하는 여러 개의 선을 그어 한 구역 안에서 일정 수 이상의 공을 치지 못하도록 하는 규칙이다. 만약 회수를 넘어 치게 되면 반칙 타로 인정되어 상대방에게 차례가 넘어가게 된다. 보크 라인을 설정하고 치는 스트레이트 레일 게임을 보크 라인 게임이라고 한다.
보크 라인은 다른 말로 하면 “거들”(girdle)이라고도 한다. 거들이란 여자들의 속옷을 말한다. 보크 라인은 쉽게 말하면 코너 즉, 크롯칭을 방지하기 위한 규칙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들도 크롯치를 가리는 역할을 하니까 보크라인 게임에 거들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 같다.
그런데 어떤 문제가 발생하여 이를 방지하기 위해 새로운 규제를 도입하게 되면, 그 새로운 규제를 회피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들이 개발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보크 라인 도입 이후 처음 얼마 동안은 선수들의 애버리지가 크게 낮아졌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뿐이었다. 다양한 방법의 너스(nurse) 테크닉이 속속 개발되는 것이었다. 너스 테크닉이란 공을 모으는 기술을 말하는데, 이미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처크 너스(chuck nurse), 패스 너스(pass nurse), 다이언 너스(Dion's nurse), 엣지 너스(edge nurse), 레일 너스(rail nurse) 등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너스 테크닉이 개발되었다.
너스 테크닉은 대부분 수구와 적구를 레일 근처로 모아 공의 움직임을 최소화하여 득점을 올리는 것이다. 공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계속 똑같은 형태로 거의 무한으로 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레일 너스로, 레일에 붙은 공을 살짝 치면서 같은 모양을 계속 유지해 나가는 기술이다. 바로 우리가 요즘 “세리”라고 부르는 게임 기술이다. 우리나라 당구 TV의 <코리아 당구왕> 시합에서 이기범 선수가 세리 기술로 521점의 하이런을 기록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만약 보크 라인 등과 같은 규제가 없다면, 몇 천 점씩 치는 선수가 수두룩이 나올 것이다.
하여튼 너스 테크닉은 계속되는 새로운 규제에도 불구하고 발전을 거듭해 단순한 너스 테크닉뿐만 아니라 너스 형태의 공을 흩어 버린 후 다시 너스 형태로 만드는 등 실로 다양한 기술들이 개발되었다.
1869년 미국 당구대회에서 제이컵 새퍼(Jacob Schaefer)는 크로칭을 금지한 보크 라인 규칙 하에서 한 이닝에 590점을 득점하였다. 이러다 보니 관중들은 당구 게임에 흥미를 잃기 시작하였다. 생각해보시라. 똑같은 모양의 공을 살짝살짝 건드리기만 하면서 끝도 없이 점수를 올리는 게임을 구경하자니 무슨 재미가 있을는지. 이 시합 후 새퍼는 “마법사”라는 비난을 받았다. 당구협회에서는 새퍼가 비교할 수 없는 너싱의 기술을 가졌다고 인식하였으며, 더 이상 규칙 변경을 통해 이러한 고득점을 금지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였다.
1893년 미국 시카고 시합에서 아이비스란 선수가 앵커 치기(anchor nurse)란 기술을 들고 나왔다. 앵커란 배의 닻을 뜻하는 단어이다. 앵커 너스란 보크 라인의 규제를 피해 두 공을 보크 라인 경계에 위치시킨 후 공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끝없이 치는 기술이다. 마치 배가 바다 한 곳에 닻을 내려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이 보크 라인 경계선에 공을 두고 움직이지 않게 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앵커 치기 기술이 나온 후 곧바로 이를 금지하기 위해 또 파커 박스라는 새로운 규칙이 만들어졌다.
스트레이트 레일 게임이 이렇게 새로운 기술을 통해 공을 모아 대량득점을 올리게 되자 캐롬 당구는 점차 재미없는 게임이라는 인식이 퍼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당구팬들은 점차 스트레이트 게임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점수 올리기가 더욱 어려운 보크 라인 게임, 밴드게임(원 쿠션 게임), 쓰리쿠션 게임 등으로 게임방식을 변화시켜 나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게임방식을 변화시켜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캐롬 당구의 인기는 급속히 시들어버렸다. 이러한 사정으로 미국에서는 스트레이트 레일 게임이 점차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게임 기술의 발전이 게임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리고, 결국은 게임의 종말을 초래하게 된 실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보다 늦게 스트레이트 레일 게임을 시작한 유럽에서는 여전히 이 게임이 계속되었다. 주로 보크 라인 방식이나 파커 박스 방식으로 게임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규칙 아래서도 프랑스 선수 모리스 비그노(Maurice Vignaux)는 1,531점을 치기도 하고, 미국 죠지 스피어는 5,041점의 하이런을 기록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