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중립적 표현에 대하여
글을 쓰면서 ‘그녀‘라는 단어를 사용해야하는 순간이 오면 늘 고민된다.
이번에도 단편 소설 하나를 최종 퇴고하면서 소설 에서 단 한 번 사용된 ’그녀‘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 마지막 제출하는 순간까지 ‘그’로 고쳤다가 다시 ‘그녀’로 고쳤다가를 반복했다.
‘그녀’라는 단어를 피하고 싶은 것은 그 단어가 가진 성차별적 속성 때문이다.
‘그녀’의 상대어는 ‘그남’이 아니라 ‘그’이다.
그러니까 ‘그’라는 성중립적인 단어가 일반적으로 남성을 가리키고 있으며, 여성일 때만 '-녀'를 붙여서 성별을 강조하는 형태다.
이건 언어에 녹아 있는 뿌리 깊은 차별의 공식이다.
여경, 여군, 여교수, 여검사, 여기자, 여신, 여왕은 있지만 남경, 남군, 남교수, 남검사, 남기자, 남신, 남왕이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이는 보통명사인 경찰, 군인, 교수, 검사, 기자, 신, 왕이 기본적으로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언어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즉 남성이라는 성별이 기본값이고, 여성일 경우 따로 ‘여’를 표기해서 구별 짓는 것이다.
최근 서양에서는 그녀(she)나 그(he)가 아닌 성중립(gender neutral) 대명사를 사용하는 사회적 실험을 하고 있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분과 차별을 넘어서기 위해 애초에 성별 정보를 담지 않은 대명사로 대체하는 것이다. 가령 미국, 캐나다, 영국은 ze/xe를 쓰거나 최근에는 they를 3인칭 단수로 쓰고 있고, 스웨덴은 hen, 그 외 핀란드, 노르웨이, 프랑스, 독일 등에서 성중립 대명사를 논의하거나 사전에 등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는 ‘그녀’도 ‘그’도 아닌 성중립 대명사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혹자는 한국어에서는 ‘그‘가 성중립 대명사니까 ’그녀‘ 대신 ’그‘를 쓰면 된다고 주장한다. 나도 한때는 이에 공감하여 의도적으로 여성에게도 ‘그‘를 사용하는 글쓰기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라는 단어가 현실에서 성중립적인 의미보다는 주로 남성을 지칭하는 인칭 대명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다음과 같이 단어를 설명한다.
그(대명사)
: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삼인칭 대명사. 앞에서 이미 이야기하였거나 듣는 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주로 남자를 가리킬 때 쓴다.
그러니까 사실상 ‘그’는 이미 한국에서 성중립적인 단어가 아니다.
그래서 ‘그녀’ 대신 ‘그’를 쓰라고 하면, 영어에서 'she' 대신 'he'로 통일하자는 말처럼 들리거나, 'man'은 원래 인간이라는 뜻도 있으니까 'woman' 대신 'man'을 쓰라고 하는 듯한 찜찜함이 남았다.
쉽게 말해 남성 중심의 질서에 여성을 편입시키려는 느낌이다.
마치 오빠라 부르지 말고 형이라 부르라고 하는 것 같은... 남자들의 질서에 편입되기 위해 남자처럼 행동하라고 하는 것 같은... 그런 류의 찜찜함이다.
그래서 가급적 ‘그녀’와 ‘그’를 써야 하는 상황이 오면 이름이나 다른 보통명사(그 친구, 그 사람 등)로 대체하려 애쓰고 있다.
여전히 나는 내가 오늘 한 말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그리고 우리 사회가 정답을 찾으려는 과정에 있다고 믿는다.
* ‘그녀’가 영어나 일본어의 번역체라는 주장도 있지만 정확한 유래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