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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미 May 18. 2023

노숙과 마음의 건강

스트레이, 익명의 미국인 이야기 - 27

노숙 생활은 많은 사람의 정신건강을 망가뜨린다. 이미 정신건강이 망가졌기 때문에 노숙하는 처지로 내몰리는 사람도 많다.


스트레이는 조현병(정신분열증)에 걸린 노숙인을 수도 없이 만났다. 조현병은 성인기 초기에 발병하는 경우가 많고, 발병 후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되어 노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심지어는 옛날 베트남에서 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을 얻어 노숙인으로 전락한 전직 군인도 아주 많았다.


중증 정신질환 환자가 유기되는 경우도 많다. 주로 플로리다나 캘리포니아에 유기된다고 한다. 아마 날씨가 따뜻해서 최소한 동사하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이미 노숙인이 많은 지역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다른 지역의 병원 직원들이 팔에 수액을 꽂고 있는 입원 환자를 차에 싣고 와서는 버리고 가는 일도 있다.


노숙을 시작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아닐지 모르지만 스트레이도 아주 오래 전부터 정신건강이 좋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우울증, 불면증, 불안장애가 있었다. 꾸준히 치료를 받을 여건도 되지 않았고, 어쩌다 치료를 받을 기회가 생겨도 효과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술과 약물에 의존했다.


흥미로운 점은 노숙 첫 해에 불안장애가 예전보다 많이 나았고 이후로도 한동안 그 상태가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불안장애 환자들은 남들이 모두 불안해할 만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불안을 덜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혹시 스트레이도 그런 경우였을까? 또는 뜻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고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불안을 덜 느꼈던 것일까? 아니면 비록 힘들기는 해도 책임질 것도 없고 계획도 없는 생활이었기 때문에 덜 불안했던 것일까? 나는 가끔 궁금하다. 스트레이는 그저 이렇게 말했다.


- 불안을 느낄 여유가 없었어. 당장 살아남느라 바빴으니까.


스트레이는 노숙을 시작하기 전과 노숙을 그만둔 후에 정신과 진료를 몇 번 받았다. 의사들은 항상 항우울제를 처방해 줬지만 항불안제를 처방해 준 적은 없다. 노숙을 하던 동안 스트레이는 항불안제인 자낙스Xanax를 처방전 없이 구해서 남용하기도 했다. 자낙스는 미국에서 젊은 사람들이 흔히 남용하는 약물 중 하나다.


처방전 없이 처방약을 구입하는 일을 그만둔 지 오래된 지금, 스트레이가 불안에 가장 잘 듣는다고 느끼는 것은 니코틴이다. 스트레이가 담배를 몇 번씩 끊었다가도 다시 조금씩이나마 피우게 되는 가장 큰 이유다. 노숙을 할 때는 담배를 직접 말아서 피웠다. 기성품을 사서 피우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너무 독했기 때문에 노숙을 그만둔 후로는 담배를 말아서 피우는 일도 그만뒀다. 그러나 팬데믹 때 실직한 후로 돈을 아끼기 위해 다시 시작했다.


비록 잠깐씩이지만 노숙 중에 불면증이 나았던 시기도 몇 번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항상 지쳐 있었던 데다 술도 많이 마셨기 때문이라고 스트레이는 추측한다. 쉽게 잠이 들었고, 도중에 깨는 일도 없었다. 그래도 불면증이 있을 때가 더 많았다. 불면증 때문에 가장 불편했던 상황 중 하나는 구치소에 있을 때였는데, 자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특별히 나빠지거나 좋아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길바닥에서 우울한 것보다는 지금처럼 따뜻한 집안에서 우울한 것이 낫지 않느냐고 내가 물었더니, 정말로 그렇다고 스트레이는 대답했다.


우울증과 불면증 때문에, 그리고 어릴 때부터 주변 사람들이 대부분 술을 마셨기 때문에, 스트레이는 노숙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자주 폭음을 했다. 노숙을 시작하고 나서는 더욱 술에 의존하게 되었다.


미국의 수퍼마켓에서는 프랜지아Franzia라는 큰 비닐봉지에 든 와인을 판다. 값이 싸기 때문에 노숙인들이 애용한다고 한다. 스트레이도 자주 마셨다. 스콜Skol 보드카도 마찬가지로 값이 싸기 때문에 자주 마셨다.


오로지 위스키만 마시던 시절도 있었다. 물론 아주 싸고 아주 품질이 나쁜 위스키였다. 켄터키 딜럭스Kentucky Deluxe, 반 갤런(약 1.9리터)에 10달러였다. 스트레이는 위스키 반 갤런을 하룻밤 안에 거뜬히 마실 수 있었다. 혼자 있고 부지런히 이동할 때에는 마시는 속도가 느려졌는데, 그래도 이틀 만에 다 마셨다.


나는 스트레이에게 한국 노숙인들은 주로 소주를 마신다고 이야기해 줬다. 알코올 도수가 거의 20도이고 12온스(360ml)에 1달러 50센트 정도면 살 수 있다고 설명했더니, 노숙인들이 좋아할 만도 하다면서 웃었다. 나중에 스트레이는 집 근처의 한국 식당에서 한국 음식을 배달시키면서 소주 한 병도 함께 주문해 봤다. 맛이 밍밍하다며 맥주와 번갈아 마시고는 다음날 숙취로 고생했다.


프랜지아 와인을 들고 있는 스트레이.


(*예전에 '스트레이, 미국의 빛과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수정 보완해서 다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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