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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미 May 11. 2023

노숙과 뼈

스트레이, 익명의 미국인 이야기 - 26

스트레이는 노숙을 시작하기 전에도 아프거나 다쳤을 때 병원에 거의 가지 않았다. 악명 높은 미국의 의료보험 체계가 가장 큰 이유였다. 의료보험에 가입할 돈도 없었고, 의료보험을 지원해 주는 좋은 직장에 취직할 기회도 별로 없었던 것이다. 어릴 때 가난하게 자랐을 뿐 아니라 방임을 당했기 때문에 병원에 가는 습관이 없기도 했다. 노숙인이 되고 나서는 더 자주 다쳤고, 병원에 가기는 더 어려워졌다.


스트레이가 노숙 생활 중 유일하게 응급실에 간 것은 2009년 여름 미시간, 만취해서 철교에서 추락했을 때였다. 돌이 깔린 곳에 떨어져서 허리를 크게 다쳤다. 걸을 수가 없었고, 기찻길 옆에서 잠이 들었다. 깨어난 후 스트레이는 같이 있던 친구에게, 자신은 괜찮으니 먹을 것만 좀 가져다 달라고 말했다. 친구는 먹을 것 대신 사람들을 여러 명 불러와서 스트레이를 응급실로 옮겼다.


치료비를 낼 돈이 없었기 때문에 스트레이는 응급실에서 신분증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가짜 이름을 댔다. 그리고 하룻밤 동안 석고붕대 같은 것으로 허리를 고정해 놓는 치료를 받았다. 다음날 스트레이는 퇴원하고 싶으니 진통제를 달라고 하고, 치료비를 청구받기 전에 몰래 빠져나왔다. 이후로 다시 제대로 걸을 수 있기까지 몇 달이 걸렸다. 그 후로는 허리가 종종 아팠지만 대체로 견딜 만했던 모양이다.


10년이 지난 후에야 스트레이는 MRI 촬영을 받았다. 요추 여러 개의 위치가 비뚤어져 있고 그 중 두 개에는 금이 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의사는 지금 당장은 수술을 받지 않는 것이 더 낫지만, 앞으로 언젠가는 수술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번은 손목뼈를 다쳤다. 그때는 응급실에 가지 않았고 어떤 형태의 치료도 받지 못했다. 그저 약국에서 붕대를 훔쳐서 손목에 오랫동안 감고 다녔을 뿐이었다. 진찰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금이 갔던 것인지 부러졌던 것인지조차 아직까지 모른다고 한다. 아주 아팠지만 다행히 뼈는 저절로 붙었고 스트레이는 지금까지 손목을 잘 쓰고 있다. 그러나 아문 지 오래된 피부 밑으로, 그때 다쳤다가 붙은 뼈가 아직도 손목 부근에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다.


가장 자주 다친 부위는 손가락이었다. 노숙 생활은 마치 야생과 같아서 싸움의 연속이었고, 주먹질을 하다가 손가락이 부러지는 일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싸우는 동안에는 아드레날린이 솟구쳐서 별로 아픈 줄도 몰랐다. 싸움이 끝나고 나면 아팠지만 치료를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저절로 나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래서 스트레이의 손가락은 지금까지도 울퉁불퉁하고 부어 있다.


스트레이는 친한 친구 몇 명을 제외하고는 다른 노숙인들과 거리를 두었다.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몸집이 작은 스트레이에게 항상 시비를 걸어왔다. 그리고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일단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스트레이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싸움을 기다렸다.


스트레이는 노숙을 시작하기 전부터 싸움을 많이 했다. 병원에 거의 가지 않은 것도 노숙 전이나 후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노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사진을 보면 아직 손가락이 매끈한 편이었다. 노숙을 하는 동안은 그전보다 훨씬 많이 싸워야 했던 모양이다. 다친 손으로 막일을 한 적도 많았다. 당장 다음 끼니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시위 진압 경찰이 스트레이의 갈비뼈를 부러뜨린 적도 있었다. 허리를 다친 지 6주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2009년 가을 피츠버그에서 G20 회의가 있었다. 거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G20 회의 의제에 반대하는 사람들 약 1만 명이 모여들어 평화시위를 했다. 스트레이도 시위 전부터 피츠버그에 가 있었다. 피츠버그에 있는 동안에는 어느 버려진 교회에서 머물렀다.


스트레이의 말에 따르면 모든 법을 준수한 시위였기 때문에 경찰에게는 진압할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경찰은 시위 참가자로 가장한 선동꾼들을 잠입시켜서 다른 참가자들에게 폭력시위를 하라고 부추겼다. 선동에 실패하자 경찰은 시위대가 있던 공원을 포위하고, 그 상태에서 시위대에 해산 명령을 내렸다. 시위대는 해산하려 했지만 경찰들이 모든 출구를 막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곳으로도 갈 수 없었다. 경찰은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최루탄을 쏘며 폭력진압을 시작했다.


스트레이도 체포되었다. 윽박지르는 경찰들 앞에서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자 더 나쁜 결과가 돌아왔다. 스트레이는 양손이 뒤로 묶인 채로 땅에 쓰러졌고, 경찰에게 가슴을 밟혀서 갈비뼈 두 개가 부러졌다. 경찰은 살상용은 아니지만 큰 부상을 입힐 수 있는 빈백bean bag 총으로 급소를 쏘겠다고 스트레이를 위협했다. 연행된 후 스트레이는 아홉 시간 동안 긴 의자에 연결된 수갑을 찬 채로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평화시위에 참가했을 뿐 아무 혐의가 없었기 때문에 풀려났다. 부러진 갈비뼈를 위한 치료는 전혀 받지 못했다.


스트레이는 이미 노숙 생활이 길어지면서 정치에 점점 관심을 잃고 있었다. 생존 외에 다른 것을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특히 큰 계기가 되었다. 하루하루 연명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정치적인 활동에 참여한 대가로 돌아온 것은 부상과 유치장밖에 없었다. 스트레이는 그 후로 시위 참가를 완전히 그만두었다. 몇 년 후 정착하고 나서도 다시는 시위에 나가지 않았다.


허리를 다쳤을 때에도, 갈비뼈가 부러졌을 때에도, 스트레이는 계속 화물열차를 타고 이동하며 노숙 생활을 이어나갔다.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신기하기도 하고, 지난 일이지만 안쓰럽기도 하다. 내가 스트레이의 이야기에 대해서 그런 반응을 보일 때 스트레이는 주로 두 가지 중 한 가지 대답을 한다. 하나는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뭐든지 하게 돼 있어.” 다른 하나는 “그보다 더 나쁠 수도 있었어.” 후자는 스트레이가 오랫동안 자기 자신에게 해 온 말이기도 하다. 때로는 자기최면을 위해, 때로는 위안을 얻기 위해.


2009년 시위 때의 사진. 왼쪽 가운데, 검은 후드와 스카프로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물통을 든 사람이 스트레이. 그 뒤의 여자는 스트레이가 허리를 다쳤을 때 도와준 친구.


(*예전에 '스트레이, 미국의 빛과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수정 보완해서 다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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