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이, 익명의 미국인 이야기 - 9
스트레이가 만 열세 살 때 친구가 컴퓨터를 새로 사면서 원래 쓰던 컴퓨터를 스트레이에게 줬다. 운영체제는 윈도우 XP였다. 스트레이는 그전에는 컴퓨터를 만져 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가난한 동네여서 학교에도 컴퓨터가 없었기 때문이다. 스트레이는 컴퓨터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호기심을 느꼈고, 독학으로 프로그래밍을 배우게 됐다.
- 대단하네. 보통 그 나이 남자애라면 포르노 기계가 생겼다고만 생각할 텐데.
스트레이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듣고 보니 그렇다. 꼭 그 나이 남자아이가 아니더라도, 꼭 포르노를 보는 데에 쓰지 않더라도. 컴퓨터가 생겼다고 해서 컴퓨터가 작동하는 원리를 독학해 보자는 마음을 먹고, 또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특히 학구적인 분위기와는 아주 거리가 먼 슬럼가 한가운데에서.
다만 그 컴퓨터로는 포르노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집에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트레이는 인터넷을 쓰고 싶을 때 공립도서관에 갔다. 슬럼가라도 공립도서관은 제 기능을 했던 모양이다. 스트레이는 도서관에서 프로그래밍 언어 매뉴얼을 다운받아, CD로 구워서 집에 가져갔다. 스트레이와 같은 세대인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많이 놀랐다. 내가 학생 때 서울에서 다니던 도서관에서는 CD를 굽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플로피 디스켓 정도만 쓸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트레이는 프로그래밍 언어 중에서는 비주얼 베이직을 가장 먼저 배우기 시작했고, C를 조금 배운 후 PHP와 ASP.net으로 옮겨갔다. 응용프로그램 개발보다는 웹 개발에 더 끌렸다고 한다.
공립도서관 컴퓨터에서는 룬스케이프Runescape라는 온라인 게임도 자주 했다. 스트레이가 프로그래밍을 배우게 된 또 하나의 계기였다. 한국의 도서관 컴퓨터와는 달리 게임과 관련된 웹사이트들이 차단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컴퓨터로 게임을 해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프로그래밍을 조금 배운 후 스트레이는 게임 속에서 돌릴 봇을 열다섯 개쯤 만들었다. 자신이 캐릭터를 직접 조작하지 않아도 봇이 자동으로 움직이면서 경험치를 쌓고 게임 속의 화폐를 벌어다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열다섯 개의 봇을 한꺼번에 돌리는 바람에 게임 회사에 금방 들켜서 모두 차단당했다. 나중에 여자친구를 사귀고 바빠지면서 룬스케이프는 그만두었다.
프로그래밍이 먼 훗날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당시 스트레이는 전혀 몰랐을 것이다. 프로그래밍을 부업으로 삼기 시작한 것은 십대 후반이지만, 그때는 아직 용돈벌이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대학교에 가서 프로그래밍을 본격적으로 배워 보려다가 오히려 생활만 더 어려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지난 후 스트레이는 결국 프로그래머로 취직해 완전히 다른 삶을 경험하게 된다.
공립도서관이 제 기능을 한 덕분에, 가난하고 위험한 동네에서 방임과 학대 속에 자란 한 아이가 빈곤을 탈출했다. 스트레이의 동네에 도서관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면 스트레이는 평생 동안 안정된 삶을 겪어 보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프로그래밍을 할 줄 몰랐다면 지금쯤 아예 살아 있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스트레이는 말한 적이 있다.
(*예전에 '스트레이, 미국의 빛과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수정 보완해서 다시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