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의 성향이란

입시 교육으로 잃은 것들

by 부니엘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물론 10대 때도 그때의 어려움이 있었겠고, 세월이 흘러 미화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은 내 힘으로 되지 않는 것들이 많은데, 그중에 그나마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공부가 제일 쉬웠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조차 환경이 주어지지 않으면 공부만 하기도 쉽지 않다.) 운 좋게 그런 환경을 누렸던 내가 생각하는 '공부를 좋아할 수 있는 성향'을 몇 가지 꼽아본다. (개인적인 주관이 물씬 들어갔다.)




1. 새로운 것을 배우 걸 좋아하는 사람


당연히 뭐니 뭐니 해도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공부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냐고 하지만, 정확히는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즐기는 사람은 못 따라간다는 말처럼, 국어 영어의 지문 하나씩 풀 때마다 책에 쓰인 내용들이 마치 새로운 세상을 알아가는 기분이라 재밌었고, 지구과학 생물 역사 세계지리 등등 모든 과목은 내게 하나씩 쌓아가는 지식으로 충만해졌다. 하루의 내가 채워지는 기분이 들어 뿌듯했다. 그래서 오랜 시간 앉아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강제로 해야 되는 공부가 없는 직장인 때도 이것저것 공부를 찾아서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직장인이 되어 회사 업무 지식도 잡지를 보며 추가해보고, 회사 끝나고 공인중개사 공부 속 법이나, 독서모임의 책 읽기나, 타로 사주 등 취미생활처럼 책상에 앉아서 다양한 지식을 채워 넣는 나를 보며 느꼈다. "아, 나 공부 좋아하는구나."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것은 자아 통제감이 생기고 자존감이 커진다고 한다. 10대의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했으니 (아마 공부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느라 하고 싶은 것이 뭔지도 몰랐겠다만)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사주를 배웠으니 덧붙이자면 어릴 때 대운으로 인성이 들어오거나, 관성-인성-나(관인상생) 형태로 힘을 받거나, 금수쌍청(지혜, 지식)의 기운이 강하면 공부를 잘하게 되는데- 나는 3가지가 다 해당하는 편이다. 혹여나 자녀들이 공부를 잘할지 궁금하면 재미 삼아 찾아봐도 좋을 듯하다.



2. 지독한 목표주의


내가 1등이야! 지는 것을 자존심 상해하며, 승부욕이 강하고 단순한 애들이 있다. 자존감을 깎아내며 자책하기보다는 원동력 삼아 더 치고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 문제 하나씩 틀릴 때마다 나를 자책하기도, 다시 해보자고 격려하기도 하며 10대를 지내왔다. 다만 지나친 자책으로 이뤄낸 독기는 2030세를 지나서야 문제점을 알고 조금 꺾이긴 했다.


Simple is best. 무조건 SKY대. 지독한 목표주의는 삶을 단순하게 만들었다. 10대의 나의 모든 삶의 순간들은 공부와 연관이 되었다. 공부와 관련이 있으면 관심을 가졌지만, 그 외는 미뤄두었다. 사춘기의 반항, 불규칙한 수면, 소소한 각종 취미, 교우관계, 성격 등의 고민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시간이 아까웠다.


내적동기가 강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내적 동기는 내 안에서 정말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해야만 행동하는 것이다. 아무리 주변에서 중요하다고 강요하고 주입해도 일시적이고 결국엔 안 하게 되는 게 사람이다. 스스로 확신을 가지면 꿋꿋이 버티고 가는데 나는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지내왔다.





새로운 학문에 대한 호기심, 지독한 끈기와 성실함으로 만들어진 좋은 성격들이지만, 무조건 반대급부가 생긴다. 모든 성격은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다.



공부 말고 아는 게 뭐야


10대 때 노래를 듣지 않았다. 노래 들을 시간에 '영어 듣기 평가'를 들으며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고자 했다.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 억지로 듣는 팝송으로는 실력이 잘 늘지 않았다.ㅋㅋ) 잘 때는 클래식 음악이 좋대서 틀고 잤다. TV를 볼 시간에 책을 보았다. 내가 공부를 하면 부모님이 먼저 TV를 끄셨으니 자연스레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는 스몰 토크의 소재가 없었다. 그렇게 아무런 유행어도 노래도 모른 채 졸업을 했다. 삶의 목표에 대한 이야기를 제외하면 일상의 스몰 토크에 관심이 없던 성향은 나이가 한참이 들어서야 많이 채워졌다.



그래서 결론이 뭐지?


다급하게 한 문제라도 더 외워야 하는 입시 제도 속에서 우겨집어넣었던 많은 지식들이 있었다. 째깍째깍, 언어 1문제당 1분 30초. 곰곰이 이해해서 씹어 넘기기 전에, 답을 찾아야 했다. 감성적인 문학 작품들은 표준화된 정답 속에서 굳어졌다. 국영수사과를 외우고 예체능을 외웠다. 이해가 안 되더라도 납득이 안되더라도 그게 정답이면 맞춰야 하는 거야.


극도의 효율성, 로봇이 되었다.


이분법적으로 '맞다/아니다'라며 정답 속에서 살았다. '과정은 잘 모르겠지만 결과만 좋으면 넘어가던데?' 하나씩 맞아가는 빨간 동그라미를 보며 보상을 찾았다. 결과로 과정을 합리화해서 단순하게 살아야만 치열한 현실을 이겨낼 수 있었다. 급하게 문제 하나하나에 다급한 것은 생활으로 이어졌다. 빨리 결론이 나지 않으면 짜증이 나며 분노가 치밀곤 했다. 습관처럼 빠르게 판단해서 결론 내어버리던 내 성향은 어쩌면 사회적 요인에서 기인했을지도 모르겠다.


속도와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능률이 최고이기에 이분법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게 된다고 한다. 옳다/그르다, 좋다/나쁘다 구별하고 더 나아가 차별하는 방식은 에너지의 소모를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뇌가 편하다. 매 순간 새롭게 관찰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수고를 줄이니 얼마나 편하겠는가. 사고가 뻣뻣하고 딱딱하고 굳어 가는 증세이다. 근섬유화와 마찬가지로 사소한 자극에도 크게 반응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분노'이다. <책_감정 어휘>


분노. 우리 세상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며 '욱하기'와 분노로 가득 차서 뱉어내는 말들이 가득하다. 많은 사람들이 여유 없이 결론만 찾아가는 게 학습화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거 왜 못해?


"이봐 해봤어?" 현대 정주영 회장의 유명한 대사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 또한 인생에서 맞이하는 길은 끝이 없었고, 그저 폭주하는 증기기관차처럼- 열심히 달려가는 경주마처럼 열심히 트랙을 달렸다. '해보고 판단해. 돌파해야 돼, 늘 도전해야 해.' 자잘한 실수와 실패가 있었겠다만, 근성과 포기를 모르는 도전이 당연한 줄 알았다. 기회는 오늘, 지금밖에 없을 테니까.


끝없는 도전 정신으로 무장해서 운 좋게도 많은 부분을 손쉽게 채웠다. 사회적 능력치를 점차 채울수록 대도 계속 높아졌다. 못하는 사람을 보면 내 맘대로 판단하고 비난하기도 했다. "저것도 못하냐, 제대로 해보긴 한거야?" 콧대 높은 우월주의와 노력 만능주의는 주변을 사려깊게 보지 못하기에 자칫하면 눈치 없다고 외면받기도 하고, 인주의를 심화시키기도 했다.


언제까지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걸까. 30대 중반이 된 이제는 버겁고 피곤하다. 우리나라는 실패가 용인되는 문화가 아니기에 너그러움과 여유가 없다. 어릴 때의 '해보면 알겠지!''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냐?'가 되어 조심스러워진다. 추진력이 장점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날개가 하나 꺾인 느낌이다.


능력 있고 멋진 줄 알았던 내가 공부라는 베일을 벗어던지니 사실은 의존적이고 작은 일에도 멘털이 흔들리는 소심한 새가슴이며 참고 버티는 것이 익숙한 순종적인 사람의 모습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꾸준함'은 요령 없고 우직함으로 둔갑하였다. 인생을 '적극적 긍정적 도전적'으로 사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들며 성숙해진건지 무기력해진 인생을 받아들인 건지 헷갈린다.





황금티켓 증후군(소수의 황금 사다리를 다수의 사람이 도전하며 드는 사회적 낭비)을 나는 직접적으로 겪었다. 특정 시험만 몰입하게 될 때, 다양한 진로를 탐색하거나 창의적 사고를 하지 못하게 되니 사회전반의 창의성과 혁신성이 떨어진단다. 교육 제도는 변화를 반영하는데 가장 늦은 집단 중 하나인데, 공부로만 인정받는 학벌 위주의 사회에서 조금씩 바뀌어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사회의 틀은 견고하다. 아니, 고착화되며 더 강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운 좋게 가진 사람들의 보상 심리와 불평등한 출발선 속 평등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줄다리기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언제쯤 이 피라미드에서 쉴 수 있을까?


양가감정이었다. 내가 죽어라 노력해서 얻은 기득권을 놓기 싫다는 보상 심리와 끝이 없이 이어지는 성공의 길 속에서 중용을 찾가가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난 순간순간의 과정을 즐기기 위해 애를 썼던 것 같다. 어차피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라면 즐기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일 테니까.



고도의 압축 성장 시기를 겪어오며 수많은 갈등과 내려치기를 만들어낸 것에는 이렇게 커오도록 강요당한 현실도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개개인이 소외된 채 사회적으로 정해진 트랙에서 누구보다 빨리 달리기를 기대당했던 삶에서 멈춰버린 한 사람의 생각이다.



keyword
이전 19화공부 잘하는 우등생은 사회의 열등생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