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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잘하는 우등생은 사회의 열등생일까

입시 교육으로 잃은 것들

by 부니엘



내 입으로 '공부 잘하는 우등생'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민망하다만, 10대와 20대 중반까지 공부에 매진하며 많은 1등급을 받았고 명문대에서 최우수 학생이 되어보았던 경험으로 비추어보았을 때 "한때는 공부를 잘했다"라는 기준을 세워본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부만 하는 우등생', '공부를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사회의 일반인'이며 때로는 '열등생'이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곤 한다.





맙소사, 10대 때는 공부하라고 친구도 경쟁자로 만드는 몹쓸 환경 속에서 오로지 진득하게 앉아 그저 공부만 공부만 쭉~ 하게 만들더니만, 이제 와서 함께 사는 사회라고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며 높은 수준의 역량을 요구했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10화에서는 변호사 아빠가 힘들게 구한 고등학교 내신 시험 예상 문제를 친구들과 공유한 아들에게 절규하며 외친다. "걔들은 니들 경쟁자야. 적군한테 총을 나눠 준거랑 뭐가 달라? 학교가 아니고 전쟁터라고 했어 안 했어? 안 죽이면 니들이 죽는 거라고. 경쟁은 이기느냐 지느냐 딱 두 가지야. 선의의 경쟁이란 말도 이기는 놈만이 할 수 있어."

그리고 그런 아들을 기특해하며 엄마는 말한다. "잘했어 아들. 경쟁은 자기 자신과 하는 거지. 남과 하는 경쟁은 사람을 외롭게 만들거든. 엄만 외롭지 않은 인생을 사는 게 성공이라고 생각해. 인정?"



스카이캐슬 엄마처럼 생각하다가도 아빠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친구에게 모르는 문제를 알려주면 치열한 경쟁 속에 등수가 떨어지지 않을까 고민이 된 적이 많다. 난 꽤 두려움이 많은 아이였는데, 그런 불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마음을 다잡았던 것 같다. 누굴 가르칠 때 나도 확실히 알게 되니까 내게도 도움이 되는 거라고-. 그리고 서로 돕는 게 돌고 돌아 도움이 될 거라고-. 알려주지만 불안했고, 어쭙잖은 착함으로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곤 했다.



이런 사회 시스템이 맞나?

그때 느꼈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아니, 이런 생각할 시간에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워야지!!... (와우, 정말 그랬다.)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뇌(변연계)는 아동기에 진화를 마쳐 고정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동 청소년기에 감정을 최대한 누르고 공부에 매진하도록 사회 시스템이 이루어진다면 우리의 감정은 어떻게 발전할 수 있을까. 사람이 느끼는 세세한 감정은 공부에 방해되니 미루라면서, 갑자기 사회에 나왔으니 사람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하랜다. 감정을 모르면 공감이 쉽지 않은데 어떻게 사람과 유대감을 쌓는가. 더군다나 인생에 경쟁만 가득 채워놓곤 이제 와서 타인에게 따뜻한 태도를 가지라고 하다니 그 괴리감은 참 기묘했다.



합격을 확인하는 그 행복한 순간만을 생각해. 그걸 방해하는 일체의 모든 것들을 거부하고 무시해. 넌 지금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서있어. 자칫 한 발만 헛디뎌도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거야. <드라마 SKY캐슬 13화>



나는 입시 코디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나 스스로 입시 코디였다. 사람이 여유가 없으면 주변 사람을 볼 수가 없는데, 10대의 우리는 항상 도전해야 할 목표를 가지고 바라봐야 할 미래가 있었고 여유는 늘 없었다. 우리뿐일까? 베이비부머 세대 부모님도 늘 바빴다. 치열한 회사 속 먹고사는 경쟁을 하느라, 아이들 잘 키우랴, 급격한 고도성장 속 자리를 잡느라 정신없는 세상이었다.



입시뿐이랴,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무얼 느끼는지도- 모른 채 규격화된 대학생이 되었다. 대학생은 과연 다를까? 냉정히 말하자면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수동적으로 0교시~ 밤 12시까지 꽉 짜인 시간표는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시간표로 바뀌었다는 것과, 선생님께 듣기만 하던 수업에서 조모임이 좀 더 많아진 참여 수업으로 진화했다는 정도였다. 중간 기말고사는 여전히 있었고, 수능 대신 취업일 뿐이었다. 쌓아야 하던 각종 스펙은 수행평가랑 다름없었다.



그래서 또 보이는 대로 열심히 했다. 뒤처지면 안 되니까. 그리고 퀘스트를 깨듯 쌓아가며 성장하는 재미도 있었으니까. 수능 성적으로 나뉘듯 전문직, 메인 대/공기업과 금융권, 일반 대기업, 중소기업... 피라미드의 등급은 끝이 없었다. 20대의 인간관계는 10대 때와 비슷하게- 마음과 시간을 나누는 몇 안 되는 친구들과 스쳐 지나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20대 중반까지 지나가고 어느덧 사회에 던져졌다. 정말 이젠 사회인이 된 것이다.


@pixabay





직장인이 되니 180도 다른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분법으로 나눌 순 없다만 느껴지는 온도차이는 너무도 달랐다. 공부를 하던 26년 간의 나날은 어쩌면 온실 속 세상이었을까? 공부를 통해 1등이 우대받는 세상에서 인간관계 속에 얼마나 잘 어필하고 무던하게 스며드는지 평가받는 세상으로... 교과서로만 세상을 배운 게 바로 나였구나. 그 속의 나는 만만하고 바보 같고 어리석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부자는 따로 있었고, 외적인 모습, 센스와 눈치, 협상, 타인을 파악하는 능력이 대두되었다. 너무 급격하게 무 자르듯 바뀌는 것 같아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공부라는 온실에서 배운 것은 뭐지. 쓴웃음이 났다.



아마 처세술 학원이 있었으면 다녔을 거다. 급하게 시작하는 인간관계는 너무도 서툴고 미숙했다. 공부를 잘해서 인정받던 그간의 당당함으로 다가가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가식과 치장의 세계였을지도 모르겠다. 10대엔 '공부'라는 화장품을 덕지덕지 바르는 것이 인정받는 것이었는데,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직장인부터는 꾸며낸 '이미지'로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전문적이지 않아 실력이 그다지 차이가 없는 톱니바퀴 직장인이라 더 그럴 수도 있다.)



아예 대놓고 '인맥으로', '친분 관계로' 기회가 주어지고-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는 비합리적 세상이다. '배웠던 지식이 쓸모가 없네...' 그간 배운 지식은 단지 학벌 하나를 위한 노오오력이었던가. 사회 생활하며 살아가는데 직접적으로 도움 되는 게 많지 않았다.



노래 한 소절과 같은 장기자랑은 언제든 기다리고 있었고, 순간의 기지에 따라 좌중을 리드하는 센스 있는 대화가 필요해졌다. 영화 <위키드>의 핑크 공주 글린다처럼 화려함과 유머 감각을 발휘하여 시선을 끄는 사람들이 있었고, 초록 마법사 엘파바처럼 소신은 있지만 섞이지 못하는 비주류의 집단이 생기는 것 같았다. '넌 어떻게 살 건데?' 갑자기 사람들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내게 요구하는 것 같았다.






온실 속 화초와 같은 명문고와 명문대에서는 나와 비슷하게 커온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먼치킨 히어로처럼 고등학교 때 잘 놀고서도 성적까지 좋았던 소수의 몇몇도 있겠지만,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노력은 필수 조건이었을 테니까. 사회에 나오니 더 어려워졌다. 더 다양한 사람들이 많았고, 자칫 조금만 삐끗하면 바보 되기 십상이었다.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고)와 밀당, 강단과 비굴 속에서 분별력을 가지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은근한 서열 속에서 약자는 밟히고, 무시를 당하곤 했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공부는 내 힘으로 노력하면 조금이라도 채워지는 성실함이니까.



10대 때 엉덩이로 만드는 꾸준함과 노력은 하찮게 보이고, 아둔하고 미련하게 살아온 것 같았다. 아차, 이게 아니구나. 부랴부랴 인간관계를 비롯한 요령과 센스 등 다른 재능을 키우고자 노력했지만 이미 내게 새겨진 습관 같은 우직한 성격들이 남아 버렸다. 나만의 문제라고 하기엔 사회 구조적 문제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한없이 서투르게 느껴지고 헛발질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공부와 달리 감정 공감이 필요한 사람 관계는 노력해도 엇나가기 일쑤였다.



내가 내 기분을 모르고 살았으니 타인의 기분을 알 수가 없었고, 알지 못하니 맞추는 법도 불가능했다. 알아도 어떻게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입장 바꿔서 생각하기란 내게 어려운 큰 산이었다. 남의 아픔에 공감하기?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아플 땐 참고 또 도전하는 거지, 넘어지면 일어나야지 뭘. 나도 그래왔으니까.) 오랜 입시 생활 속 내 인생은 늘 로봇 같이 "~를 해야 한다"로 가득 차 있었기에 옆도 뒤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청소년기에 사회성을 기를 시간은 뒤로 두고 그저 앞의 목표만 보고 달려 나간 결과가 이것이었나.



인간관계는 참 어려웠다. 인간관계는 센스와 타이밍이 가득한 싸움이다. '결혼도 놀아본 사람들이 더 잘한다'는 말처럼 때론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사람 만남이었다. 직장 생활도 우직하게 열심히 한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믿었던 사랑까지 끝나고 난 뒤에야 감정에 미숙했던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서야 사람을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었다. 지난 몇 년간 '드라마나 예능을 보며 말투 따라 하기', '나는 솔로 같은 예능의 집단 속 인간 군상 확인하기', 'TV 속 오은영 박사가 조언해 주는 사람들의 문제 패턴 찾아보기' 같은 뒤늦은 어설픈 공부를 해보았다. 10대 때 조금씩 늘었어야 했던 인간관계를 한꺼번에 하려니 너무도 시행착오가 많았다.





학벌이 우리나라에서 살아가는데 든든한 무기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마치 첫인상 같달까. 하지만 꼭 공부를 잘한다고 인생을 성공한다고 볼 수도 없으니, 오늘날 자라나는 아이들이 모두가 같은 길을 보며 걷도록 강요하진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삶이 성숙하고 단단해지는 것은 입시 공부와는 무관하다. 나이 들면서 저절로 알게 되는 것도 아니다. 반드시 일정 수준의 경험은 필요하고, 그 경험이 늦어질수록 성숙해지는 것도 늦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쉽고 빠른 대외적 성공의 길도 '공부'라는 생각은 든다.) 만일 스카이캐슬의 엄마처럼 외롭지 않은 인생을 사는 것이 성공이라면, 공부의 길은 꽤 외로운 길일 거다. (하지만 외로움은 인간 본연의 고독이라 깊게 들어가면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점점 친구들은 각자의 시간을 살고, 사회생활은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이 지나간다. 점차 더욱 외로워진다. 경쟁 끝에 남은 것은 외로움이었다. '다름'을 '틀림'으로 살아가는 세상 속, 너무도 부족한 게 많게 느껴지기에 '사회의 열등생'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모두가 각자의 영역이 있고 때가 있는 것 같다. 내가 앞설 때가 있으면 네가 앞설 때가 있고.



즉, 성공을 무엇에 두느냐에 따라 다르니, 내가 원하는 성공을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성공의 기준은 나이나 환경에 따라 달라지겠고, 10대 때 내가 원하는 길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도 어려울 것 같긴 하다. 그렇다면 대부분이 걷는 길에 맞춰 인생에 한 번쯤은 올인해서 달려보는 게 좋을까. 정말 최선을 다해 열심히 달렸던 30여 년의 길에 '물음표'를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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