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6년), 중등(3년), 고등학교(3년)의 출결이 100%이다. 즉 단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를 갔다는 이야기이다. 그것뿐인가? 고등학교 때는 집에 있으면 게을러지며 공부를 안 하게 되니 주말에도 학교를 갔다. 100%를 넘어 120%를 채웠을 거다.
요즘 애들은 해외여행을 가고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느라 학교 빠지는 게 큰 부담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학교를 착실히 다니는 걸 외부 활동을 할 시간과 여력이 없는 가난한 집안으로 본다는 말도 들었다. 그래서 생긴 말이 개근+거지, 개근거지다... 뭐, 나도 건너들은 거지만 참 격세지감을 많이 느낀다.
아파도 학교 갔다가 조퇴해.
꼭 엄마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나 스스로도 학교 수업을 못 들었다가 선생님이 말씀해 주시는 시험 문제 하나라도 놓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으로 아파도 꾹 참고 버티곤 했다.
'국영수사과'라는 메인 과목이 아닌 상대적으로 입시에 중요하지 않던 과목에는 여지없이 포기하며 잠을 자는 친구들이 있었다. 나는 모든 과목을 다 잡고자 했다. 내신 하나라도 놓치면 그것 때문에 입시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나는 버텨야만 했다. 수영(체육 수업)으로 어푸어푸 기력을 뺀 다음 시간이 한문이었고, 서당 훈장님처럼 중얼중얼하시는 선생님의 자장가 말씀에 당연스레 쏟아지는 졸음을 꼬집어가며 이 악물고 버티곤 했다. 체육도 한문도 1등급. 나는 이겨내야 했다.
근면, 성실, 정직, 인내... 산업화 시대의 미덕이었을 거다.
그 규격화된 표본의 산증인인 듯하다.
꾸준함. 태어날 때부터 가진 기질인지, 10대의 입시를 거치며 길러진 성격인지 헷갈리지만 둘 다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회사도 똑같이 꾸역꾸역 다녔다. 이제 10년 차. 마치 관성의 법칙처럼 악착같이 아등바등. 장단점이 있지만 내 삶을 지탱해 준 한 부분임에는 틀림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요즘 시대에 꾸준함이 좋은 것일까? 확신이 들지 않는다.
하나라도 틀리면 안 돼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안 되는 거다. 입시 위주의 교육은 점차 사람을 소심하고 여유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시험 문제 하나를 틀릴 때 느껴지는 두려움은 콩알만 한 마음의 소심함을 만들었고, 시험 문제 하나를 더 맞아야 한다는 불안함은 여유 없는 삶의 모습을 만들어 버렸다. 나는 본디 그다지 꼼꼼하지 않은 수더분한 성격인데, 교과서 속 작은 글씨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외워야 하는 완벽주의로 만들어 내곤 했다.
학대에 가까울 정도로 자기 비난이 일상화되어 있었던 것 같다. 한 번은 야구 수행평가가 있던 중학교 체육 시간이었다. 친구가 던진 야구공이 멀리서 날아왔지만 그보다 빠르지 못했던 내 손은 공을 놓치고 말았다. 작은 실수가 마음에 안 들었던 나는 손으로 퍽 내 머리를 치며 그것도 못 잡냐고 혼자서 타박을 했다.
대학생 때 취업 준비는 달랐을까. '토익 900점이 안되니 이렇게 떨어지는 게 당연하지. 멍청하다. 공부나 더하고 하나라도 더 외워.' 900점이 넘기 전까지 끊임없이 심리적으로 압박하고 자책하며 채찍질을 휘둘렀다. 회사에서 승진했을 때는 또 어떻고. '이제야? 으휴 다행이다.' 슬프게도나 스스로에게 칭찬을 해본 적이 손에 꼽는 것 같다. '열등감이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심리학자 아들러의 말처럼 나 스스로를 강하게 키워야 조심하고 다음엔 실수를 덜 하며 성장하고 더 나은 내가 되는 줄 알았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백조의 모습처럼 능력 있고 멋져 보였을까. 명문대 해외 인턴 대기업 등등... 성공은 거저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모르겠어서 나는 세상의 성공에 나를 맞췄다. 나를 깎아내려가며 사회에 맞추도록 애를 썼고 운 좋게도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곤 했다. 보상심리. 외부적 보상에 나를 맞췄고, 나를 몰아붙여서 얻은 성공으로 타인의 노력을 속으로 폄하하곤 했다. 나는 큰 실패는 하지 않았다는 안도감 속에 머물렀다. 사람은 언제든 어떻게든 실패를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근성과 포기를 모르는 도전 정신의 포장지 속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세상은 정말 넓고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가득했는데, 입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시야는 좁아졌고 큰 틀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황금티켓 증후군(소수의 황금 사다리를 다수의 사람이 도전하며 드는 사회적 낭비)일까.도대체 이게 무슨 교육이란 말인가. 무엇을 위한 교육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소심하고 여유 없이 사회적 시선에 나를 맞춘 아이가 맞이하는 사회생활은 어떨까. 더 이상 공부라는 든든한 울타리는 없어진 지 오래이다.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나는 잘났어.'라며 오만하게 자기중심적인 자부심으로 버티며 우쭐해하다가, 냉정하고 차가운 사회 속에서 그조차 꺾이게 되니 풍선이 빠지듯이 쪼그라들게 되었다. 일상생활에서 실수를 하거나 직장일에서 꾸중이나 비난을 들으면 흠칫 놀라곤 관성처럼 자기 비난을 하곤 했다. 이것도 못해? 성취 위주... 성적 위주의 삶으로 점철된 10대의 습관은 그 사람의 성격을 규정짓는 많은 요인이 되곤 한다.
학창 시절엔 공부라는 든든한 무기를 들고 있으니 친구와 선생님 같은 타인들은 칭찬일색이었다. 나만 나를 채찍질하면 되었다. 험난한 사회생활을 하면서 칭찬은커녕 잘한 일에도 견제나 질투로 인정과 칭찬은 멀어져만 갔다. 나 자신이 먼저 내 편이 되어주지 않았던 습관은 내 발목을 잡았다.
내가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 나 자신조차도 내 편이 되어주지 못하면 시련 앞에서 언젠가는 무너지고 만다.
내가 회복탄력성(시련을 이겨내고 다시 튀어 오르는 힘)이 약했던 이유일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우리네 문화 속에서 이제야 조금씩이나마 '쓰담쓰담.. 실수해도 괜찮아.', '잘했어. 내가 나를 먼저 아껴주자.' 라며 어렵지만 나를 보호하는 방법을 찾아나가 본다. 마음의 근력이 약해서 여전히 그래도 되나, 뒤처지는 것 아닐까 걱정이 되지만 마음을 편히 가져보려고 노력한다.
도움을 많이 받았던 유튜브나 책을 소개하자면, 윤홍균 교수님의 <마음 지구력>과 김주환 교수님의 <회복 탄력성> 등의 내용이 있다. <인사이드 아웃>처럼 감정을 섬세하게 이름붙이고 찬찬히 살펴 보는게 좋다.살다가 마음이 지칠 때 가까이 하면 좋을 듯 하다. 이것은 우리나라 입시 제도에서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삶의 모습이었다. (아마 배웠어도 언어 지문에서 지나가는 비문학 정도로 지나갔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