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그닥 다그닥~ 경주마가 정해진 트랙을 열심히 달려 나가다 길이 막혔다.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어디로 달려야 할지 모르겠어서 옆의 풀밭에 잠깐 멈춰버렸다.
못 보던 풀도 뜯어먹고, 누워서 햇살도 힐끔 보고, 한 바퀴 뒹굴어도 본다.
평상시 안 보던 종류의 책도 보고, 주 2회씩 3년간 꾸준히 필라테스를 하며 몸도 챙겨본다.
새로운 사람들도,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찾아다니며 인생의 순간을 공유해 본다.
미래는 모르겠으니, 오늘 하루의 일상... 현재라도 지켜보자. 오늘을 열심히 지내면 다시 길이 보일까?
내가 안 해본 게 뭐가 있을까? 요리, 공부, 부동산, 각종 취미, 일 등등 눈에 보이는 대로 해본다.
저 멀리 결혼이든 육아든 승진이든 달려 나가는 다른 경주마들을 보지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
사람마다 슬픔을 이겨내는 방식이 다르다.
누군가는 외부와 차단하며 스스로의 방에 머무르며 시간을 가지기도 하고, 누군가는 일이나 운동을 열심히 하며 승화시키고, 누군가는 친구들을 만나서 수다를 떨거나 새로운 것을 배우며 도전하기도 한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놔두면 고통스러워졌기에, 그 고통을 참지 못한 나는 최선을 다해 나 자신을 '바쁨' 속에 밀어 넣었다. 혼자 집안에 있으면 한없이 우울해졌고, 생각이 꼬리를 물며 부정적으로 내려갔으며, 그 과정은 자기 비하로 끝이 났기 때문에 그 꼴을 가만히 볼 수 없었다.
위의 단적인 예처럼 '시간'을 미친 듯이 채웠다. 마음속은 한없이 깊은 어둠인데, 겉으론 신나게 시간을 보냈다. 겉과 속이 다른 삶은 사뭇 괴로운데, 사람들과 헤어지며 돌아오는 길이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난 뭐라도 해야만 했다. 30대 초중반의 나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는 주어야 했다.
그렇게 지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로, 미래의 나에게 혼나기 싫었다. 미래에 지금의 시간들을 잘못 보냈다고 후회하면 어떡하지. 30대 초중반의 황금기에 사람도 안 만나고 지내서 미래에도 혼자 외로이 살아간다는 원망을 듣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내 행동의 결과들에 대한 책임이 무서웠다.
둘째로, 어차피 남는 시간인데 '뭐라도 하자'는 나름의 잘 살고자 하는 발악이었다. 원래도 시간을 가만히 놔두지 못하고 무언가 하고 있던 나였다. 멍 때리기 대회를 하면 분명 나는 예선 탈락이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아가던 일상의 모습들은 관성의 법칙처럼 나를 끌어당겼다.
인생의 전반전은 세상이 만들어 놓은 경기장에서 선수가 되어 열심히 뛰어온 삶이라면, 인생의 후반전은 내가 마음에 드는 경기장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시기라고 말이다.
<벌써 마흔이 된 딸에게_한성희 120p>
"좀 달려봐~. 우리가 트랙을 만들어줄게."
30대 초중반의 어여쁜 나이. 조금씩 들어가는 나이를 감안하더라도 모나지 않은 작은 육각형의 스펙이었다. 감사하게도 주변에서도 소개팅을 알아봐 주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주려고 하였고, 나도 다양한 소모임 취미 활동으로 길을 찾고자 애를 썼다.
'잇지의 채령 닮았어', '엔믹스 해원 닮았어' 등등 나와 언뜻 닮았다는 소리를 들을 때면 반짝반짝 빛나는 연예인의 이미지를 보며 내 자존감을 채웠다. 립서비스를 감안하더라도 뿌듯하고 고마운 표현이다. 그럼에도 한해 한해 나이를 먹었고 점점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어떻게든 채워보려고 애쓰며 지쳐가는 나의 하루하루는 한없이 작아져갔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계속 도전하곤 했다.
원하는 대학이 아니었지만 다른 좋은 대학을 갔다.
원하는 회사가 아니었지만 다른 좋은 회사를 갔다.
원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난...????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은 대체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왜 저 사람이어야 하는 것인가'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답답할 노릇이었다.
인간적으로 사람을 만나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좋았지만, 누군가와 이성적으로 데이트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툭 떨어지며 도무지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손이라도 닿을라 하면 슬그머니 빼곤 했다. 내게 이성적 마음을 가진듯한 상대와 세 번 이상 만나지 못했다. 상대의 호감을 받아들일 수 없는 미안한 감정으로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나 눈이 높은 걸까?
그전의 나는 연애를 어떻게 했을까?
내 이상형은 무엇일까?
가뜩이나 복잡한 머릿속이 사람을 깊게 만날수록 더 어지럽게 휘저은 듯 답답해지곤 했다. 20대에는 많은 사람을 만나봐야 한다는 핑계로 마음의 장벽이 낮았고, 꿈 같았던 장기 연애는 이상형을 생각할 이유도 없이 함께 하는게 당연했지만, 새로 시작해야할 30대의 연애는 더욱 어려워져만 갔다.
겨우 겨우 찾은 내 결론은 이랬다. "우리가인연이라는 의미부여를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상대의 단점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 부끄럽지만 내가 상대를 만날 때 드는 기준을 만들어보았다.
내가 봐도 어렵고 애매한 기준인지라 주변에서는 딱 보일 수 있는 구체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을 요구했고 답답한 나는 온갖 미사여구를 덧붙여 가혹한 사회적 잣대의 조건을 덧입혀야 했다.
"나랑 비슷한 대학에 비슷한 대기업에(까지 해도 확률이 많이 줄어든다.)육아에 함께 참여하는 따뜻하고 성실한 사람이면 좋겠어. 나는 성실하고 꾸준하게 열심히 살아왔고, 사치 없는 경제적 가치관이야. 내가 집이 있으니 상대도 집이 있었으면 좋겠고, 내가 차가 없으니 상대도 차는 없어도 괜찮아. 외모는 나도 못났다고 하는 수준은 아니니 그도 그랬음 좋겠어. 기념일을 함께 챙기며 삶을 즐길 줄 아는 낭만과 현실적인 능력이 함께 있어서 서로 신뢰할 수 있어야 해. 30대니까 삶에 대한 대화가 성숙한 사람이어야 되겠지."
나도 잘 모르겠다. 조건은 조건에서 그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조건이 충족된다고 해도 이성적 호감과는 별개라는 것도 알고 있다. 이러이러한 조건 때문에 만나는 것이 아닌, 그 조건이 없어진다고 해도 함께 사랑할 수 있을 사람. (왜냐면 사람은 미래를 알 수 없고, 나이가 들면서 삶의 상황은 바뀔 수 있다.) 수단이 되고 싶지 않고 목적이 되었으면 하는 사람.
나에 빗대어 기준을 만들어보았건만 돌아오는 세상의 대답은 한없이 차가웠다. "육각형 남자가 왜 30대 중반의 너를 만나니? 그런 사람들은 20대에 전부 채가고 이젠 포기할 건 포기해야 돼." 답이 정해져 있는 가시 돋친 말에 나는 허무한 웃음을 짓고 만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만나고 싶었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분명 과거에는
'그를 만나기 위해서',
'그와 더 좋은 추억을 쌓기 위해서'
-> '어떤 좋은 활동을 한다.'라는 알고리즘이었다면, 지금 만나는 사람들은 달랐다.
(독서모임) '책 내용을 나누고 성숙해지기 위해서'
(사주모임) '공부를 깊게 파서 내 인생을 알기 위해서'
(등산모임) '건강을 챙기고 혼자 산행은 무서우니까'
(게임모임) '혼자 하는 것보다 더 재밌으니까'
-> '상대를 만난다.'.... 이건너무나 큰 차이였다.
그렇게 나의 30대 초중반이 저물어갔다.
적어도 미래의 내가 '넌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 사람을 안 만났잖아.' 라고 질책하지 않을 만큼은 다양한 사람들과 활동을 하며 많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낸 것 같다. 마음이 힘든 와중에도 난 정말 최선을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