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화목한 자랑에서 번듯하게 큰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엄마 아빠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꾸준함'이었다. 어릴 때부터 엄마는 가정주부로 아빠의 아침저녁을 매일 챙기셨고, 우리가 학교 학원에서 돌아올 때마다 영양가 있는 간식을 듬뿍 만들어주셨다. 아빠는 40년을 넘게 직장 생활하시며 든든한 집안의 버팀목이 되어 주셨다. 친구들은 그 모습을 부러워할 때가 많았고, 그런 뿌듯한 자부심 속에 든든히 커왔다.
'부모님의 말씀은 언제나 옳다'는 생각은 어릴 적 학교 앞에서 산 병아리 사건에서 깊어졌다. 병아리를 키우고 싶어서 조르고 졸라 엄마와 같이 간 학교 앞 1,000원짜리 상자 속 작은 병아리. 나는 가만히 서있는 어여쁜 병아리가 맘에 들었고, 엄마는 팔짝팔짝 활기찬 병아리를 골랐다. 두 마리 중 내 병아리가 다음날 세상을 떠났을 때 마음이 너무 너무 아팠다.소중한 생명의 죽음은 엄마의 선택이 옳다고 생각한 계기 중 하나였고, 맹목적으로 따르게 되었다. (이후 홀로 사랑을 듬뿍 받은 엄마표 병아리는 튼튼한 장닭이 되었다.)
부모님의 말을 안 들을 이유가 없었다. 공부를 하는 이유도 나 잘되라는 거고, 부모님의 온갖 정성을 담은 물심양면 지원은 감사했다. 베이비붐 세대 부모님은 공부를 하고 싶어도 지원이 안 되는 힘든 환경에서 학구열을 어렵게 키워 오셨으니, 자연스럽게 내게 모든 힘을 밀어주셨다. 집안에서 공부를 하면 아빠는 TV를 끄셨고, 엄마는 방문을 닫아주셨다. 공부를 잘하면 '사람들의 인정', '부러움' 처럼 확실한 보상이 돌아왔으니 공부를 안 할 이유도 없었다.
10대의 나는 정신없이 공부만 하기 바빴으니 사춘기가 있을 리가 없다. '우리 애는 사춘기도 없이 잘 컸어요.'라는 말이 정말 위험한 말이라는데, 내가 딱 그 꼴이었다.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주어진 지원을 잘 활용하여 성장해 나가는 착한 딸, 멋진 딸인 줄 알았다.
오랫 시간을 들여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 후 엄마와 나는 다툼이 생겼다.
오랜 시간을 만나고도 내게 상처를 주고 떠난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는 나를 보기 힘들었던 엄마 VS 아무리 애써보며 노력해도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아 방황하던 나
엄마는 그깟 사랑 때문에.. 마음과 돈 등 모든 상처를 주고 떠나버린 사람 때문에.. 내가 주저앉아버렸다는 사실에 함께 무너져 버렸다. 그동안 엄마의 뿌듯함을 채워줘서 항상 예쁘고 사랑스러운 딸로만 생각했는데 딸의 무너진 민낯을 보고 나니 엄마는 견딜 수가 없어 계속 나를 닦달했다. 그쪽이 나빴고 넌 피해자다, 인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더 좋은 사람은 있다, 너 좋다는 사람 만나봐라...받아들일 힘이 없던 나는 버거워 반발이 생겼다.
10대의 사춘기는 어떤 감정인지 혼란스러워서 투정처럼 나타나는 반항이라면, 30대의 사춘기는 결과를 가지고 받아들이기까지 감내해야 하는 고통 같았다. 열심히 살아왔던 모든 순간들이 잘못된 것 같았다. 무의미했다. 혼란스러워서 매일매일을 고민 속에 살았다.
1_ '결혼 안 해도 되고 늦게 해도 괜찮다며, 이렇게 딸이 혼자 사는 게 원하던 모습이야? 말잘 듣는 착한 딸이자 근면 성실하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학창 시절 12년간을 개근상 탈 만큼 열심히 살아봤자결국 임금 노동자로 사는데 뭘 그리 열심히 달렸을까. 적당히 산 친구들이 결혼도 잘하고 더 잘 사는 것 같은데.'
2_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엄마의 18번 곡 캔디처럼 버티고 견디며 사는 모습이 행복했어? 슬퍼도 아파도 참아야 하고 해결만 찾았으니 나도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다고. 감정을 배운 적이 없어. 그러면서 나한테는 당당하게 행복하게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라고 왜 엄마는 못한 걸 내겐 강요했을까.
3_ 난 왜 예비 시댁을 어려워했을까. 효도가 뭐지? 엄마는 가끔씩 함께 사셨던 할아버지에게 드리는 정성스러운 삼시세끼 밥과 사라진 자유로 버거워하셨고, 고모의 존중하지 않는 고된 시집살이 속에 힘들어하신 모습들만 보여주신 것 같았다. 나도 '시댁'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폭탄 같은 곳이었다고.
끊임없이 생각이 꼬리를 물었고 의문 속에서 답답했다. 내가 '정답처럼' 알고 있던 세상이 모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가볍게 나누던 일상적인 대화도 큰 다툼으로 번졌다. 도무지 대화가 안 되었다. 30년간 견뎌왔던 엄마의 '시댁'에 대한 뿌리 깊은 고통과 나의 '결혼'에 이르지 못한 아픔이 역린처럼 서로의 상처를 끊임없이 건드렸다. 엄마가 이루지 못한 꿈의 대리만족이 '나'였는데,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싶었던 '꿈'에 휩싸여 '엄마처럼 한 가정을 만들어 잘 살고 싶었는데...'로 끝났다. 다툼 속에서 우리는 서로 피폐해졌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이 '내 탓' 같았고, 내 탓을 하다 보니 못나게도 부모님 탓까지 번지곤 했다.
아이를 위해 헌신하는 부모는 자식의 훌륭한 성장이 삶의 의미가 되고 그로써 자신의 가치와 목적을 획득합니다. <너와 헤어지고 나를 만났다_p.32 이별이 사랑에 대해 묻다>
몇 년에 걸친 수많은 상담과 공부, 끊임없는 대화로 조금씩 조금씩... 이제야 나와 엄마가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엄마가 그동안 나의 일에 나보다 더 분개하였고, 나보다 더 슬퍼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는 곧 엄마의 꿈 그 자체였다. 엄마의 꿈을 이루어드리는 존재. 부모 자식 간에 '분리되지 않은 관계'는 언젠가 큰 다툼이 되고 만다. 사춘기에 이루어졌어야 할 '정서적 독립'이 30이 다 되어서야 늦게 온다면 그 여파는 말로 이룰 수 없다.
'내 엄마'에서 벗어나 '한 여성의 인생'을 바라보게 되었다.
내게 '결혼' 안 해도 된다며 추천하지 않을 만큼, 일생을 고되게 버티며 살았을 그 인생을. 산업화 시대에 근면 성실이 정답인 줄 알고 끊임없이 버텼을 그 인생을. '착한 여자 콤플렉스'와 '착한 며느리 병'이라는 말처럼 어른들에게 순종하고 부창부수로 남편을 따르던 그 시대의 인생을.
'남녀 차별은 없어, 아들 딸 공평하게 키울 거야.', '당당하고 야무지게 네가 목소리 내며 살아.' 시대를 이겨내기 위해 엄마는 우리를 키우는 것으로 그 마음을 대신했다. 우리 세대는 남녀 갈등이 극심한데, 베이비붐 세대의 가르침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여자는 교육의 기회도 없이 결혼하면 일을 그만두고, 시댁의 무시와 불합리함에 맞서 싸우는 그 시대. 그 억울함은 우리 세대로 내려왔고 '너는 절대 그렇게 살지 마!'라는 악바리로 우리를 키웠다. 어릴 때부터 남자들과도 경쟁해서 이겨야 했던 학창 시절이었다. 남자를 삶을 함께 뛰어가는 동반자가 아닌 경쟁자로 보곤 했다.
나도 모르게 시댁에 있어서도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K-장녀로 자라오며 엄마로부터 내려온 감정이었나 보다. 고된 시집살이로 존중받지 못하는 그때 그 시절의 어머니들을 보며 분노하고 나도 그렇게 될 거라는 공포로 남자친구와 사귀며 행여나 그런 상황이 생길세라 소르라치게 거부하기 바빴던 과거의 내가 보였다. 엄마의 고통이 내게 전가되었고, 대신 분노하며 거부했다.
대를 이은 '가족 규칙'이 있다. 나도 모르게 쌓여온 나의 행동 패턴은 부모의 유전자 속에 끊임없이 보고 자란 환경의 배율 속에서 굳어진다. 각자도생으로 삭막한 도시에서 맨 땅에 헤딩하듯 살아온 아빠와 자식 많은 농부의 딸로 태어나 착하게 살기를 종용받았던 엄마의 삶을 끊임없이 객관적으로 돌아보며 '부모님'의 인생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은 대를 이어 '삶의 여유 없이 급하게 버티며' 살아오고 있었다.
내 모습의 일부를 엄마에게서 찾았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내 모습을 수용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냥 사랑으로 키워주신 줄 알았던 내 부모님이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나를 키우면서 많은 시간을 아프며 살았다. 자식을 키우면서 나를 갈아 넣는다는 말은 이 것이었으리라. 베이비붐 세대 속 엄마가 살아가면서 받았던 모든 고난은 오로지 나 하나만을 보며 모든 것을 감내했던 것이었다. 크고 작은 병에 걸리며 아픈 몸을 이끌고 세상의 무심함 속에서 버티고 버티며 악착같이 살아온 인생, "사랑으로 키운 줄 알았는데, 내 슬픔으로 키운 것이었구나. 내가 어릴 때부터 원했던 가정을 네게 주려고 했는데 네겐 너의 인생이 있는 거구나." 엄마는 이제야 나를 놓고, 본인의 삶을 살기 시작하셨다.
슬프게도 나의 '이별'은 우리 가족의 '이해'의 계기였다. 내가 그대로 결혼을 했더라면 모르고 지나갔을 나의 부족함과 우리 가족의 숨겨진 아픔을 직면했다. 나의 '고통'은 우리 가족의 정신적 성장의 시작이었다. 완벽한듯 보였지만 절대 완벽하지 않았던 우리 가족은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우리 세대의 많은 가족이 겪었을, 겪고 있을 시간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