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최선을 다 하며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 내가 사랑으로 무너져버렸다. 그는 나였고, 나와 함께 하는 내 미래였다. 마음이 아파서 피가 철철 흐르는 몇 년의 세월 동안 나는 그저 살아내야만 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납득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과거의 나'를 만나곤 했다.'미래의 나'는 보이지 않았다.
'미래의 나' 뿐만 아니라 '현재의 나'도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 장르는 발라드였는데, 들려오는 사랑 이야기가 고통스러워 듣지 못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지역 축제, 꽃과 예쁜 건물이 가득한 데이트 코스, 맛있는 음식과 놀이 등등 데이트가 생각나는 어떤 곳도 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가 없는 여행은 더 이상 내가 꿈꾸던 삶이 아니었다. 나 없이 잘 사는 것 같은 그의 소식을 우연찮게 듣게 될 때는 경기를 일으키듯 외면해 버렸고, 마음속에 차오르는 이 부정적인 감정들 속에서 괴로워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나'를 끊임없이 살펴보는 것 밖에 없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생각이 났다. 함께 했던 모든 순간을 수없이 되돌아보며 자책하고 후회하고 인정하며 납득하기 위해 애를 썼다. 상실의 5단계설?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감정이 있다는데 끊임없이 내가 어느 단계일까 살펴보곤 했다. 하지만 감정을 살펴보는 것은 어려웠고, 문득 나는 깨달았다.
경주마처럼 세상을 향해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기만 했지, 내 안에 있는 다양한 감정들이나 현재 상황들을 섬세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작업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그렇게 키워졌다. 늘'무언가를 해야 한다'의 당위성 안에 살았다.
조금이라도 뒤쳐지면 끝나는 사회, 그것이 내가 10대 때 겪었던 현실이었다. 60만 명이 대학이라는 결승선을 향했다. 수행평가 1점으로 등수가 갈리고, 시험문제 1개로 내 존재의 가치가 정해졌다. 치열한 동물의 왕국이었다. 세상 모든 친구는 암묵적 경쟁자였다. 악착같이 매달렸던 공부로 평가받는 사회에서 나는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하나라도 삐끗하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레 나는 부정적인 사건 하나에도 일희일비하며 초조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삶의 여유? 내게 주어진 세상을 지켜내기만 해도 벅찼다.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던 승부욕과 욕심은 나를 경쟁사회에 최적화로 만들긴 했으나 마음의 여유와 너그러움은 가질 수 없었다.
감정을 느낄 시간이 없었다.
감정을 천천히 느끼는 것은 사치였다.
해야 할 것은 많았고 나는 끊임없이 나아가야 했다.
효율성이라는 명목아래 너무 빠르게 감정을 쳐냈고, 그래서 감정을 알아갈 시간이 없었다.
내가 감정을 느끼지 않았기에 타인의 감정을 바라보는 일 또한 서툴렀다.
감정을 모르고 해결책만 찾았으니 대화가 잘 될 리가 없다. 얼마나 헛발질을 한 것인가. 하하.
성인이든 아이든, 감정의 덩어리가 잘 정리되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한다. 감정이 엉켜 있다는 말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뜻이다. 또한 자신의 상태를 나타내는 감정에 대해 섬세한 마음으로 살피지 못한다는 것은 곧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신을 잘 알지 못하면, 타인을 이해하기도 어렵다. <마음의 상처와 마주한 나에게_롤프 젤린 저>
나는 인생 처음으로 '나'에 대해 살펴보기 시작했다. 감정의 단어 설명부터 시작해서 남녀의 차이, 이별에 관한 책, 마음 헤아리는 공감력, 부정적인 감정을 잘 표현하는 방법 등등... 심리학과 종교, 철학, 인문학 같은 내면 성장법을 찾아다녔다. 몇 년 동안 분노, 우울, 죄책감, 불안 등등의 감정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내가 어떤 때 기뻐하는지, 슬플 때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감정을 알고 타인과 잘 소통하는 책과 유튜브를 계속 계속 읽었다. 이해가 안 될 때면 독서모임을 하며 생각을 나눴다. 혼자서 너무 어려울 때면 상담도 받았다.
전에는 아무리 관련된 책을 읽어도 와닿지 않더니만 이제야 쏙쏙 머릿속에 들어왔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지금이 내면에 대해 배울 땐가 봐~'라고 하기엔 나는 잃은 것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도대체 그간 무슨 대화를 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나 살기에 바빠서 작은 일상들을 스쳐 지나가거나, 내 주관적 판단으로 결단 내리며 통보해 버린 날이 많았던 것은 아닐까. 내게 거쳐간 부정적인 감정들은 어떻게 처리하고 있었을까. 부끄러워졌다.
감정 표현을 배운 적이 없었다. 배운 적이 없으니 날 것 그대로 표현한 적이 많은 것 같다. 기쁠 때 마냥 천진난만하게 좋아했고, 힘들거나 속상할 때는 짜증으로 대신했다. 난 모든 상황을 버티고 이겨내야 하는 줄 알았지, 강약조절이나 때로는 부드러운 말로 어루만져 주는 힘에 미숙했다. 생각보다 타인과의 소통이 부족했던 것을 깨달았다.
인정욕구, 남자들에게 필요하다는 그놈의 칭찬과 인정.
나는 칭찬과 인정에 인색했는데, 이유를 살펴보니 우습게도 나는 나 자신에게도 칭찬을 해본 적이 손에 꼽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대보다 잘한 일에도 칭찬과 격려보다는 안도했으며, 기대를 높게 잡아 매번 나 자신을 질책하곤 했다. 빠르게 다음 목표와 해결책을 찾고 나아가야만 되는 줄 알았다. 타인을 인정한다는 것이 내가 타인에게 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지언데 난 늦게야 그걸 깨닫게 되었다. 자존감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낮은 사람이었나 보다.
나 자신을 가혹하게 대했으니 남에게 여유를 베풀 여력이 없었다. 하하. 나 자신이 처음으로 안쓰러워졌다. '고맙다~ 잘한다~ 최고야~ 괜찮아~ 걱정하지 마~ 잘될 거야.' 인생을 살면서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따뜻한 말들이었다. 나 자신에게 해주는데 눈물이 났다.
오랫동안 힘들어하며 나는 조금씩 성숙해졌다.
화를 참는 게 아니라 현명하게 다루고, 내 욕구에 관심을 기울이고 현명하게 표현하고, 타인의 감정과 입장을 고려하여 나 자신과 조율하고, 미숙하고 부족한 나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30살이 넘어서야 비로소 깨우치게 되었다. 여전히 미숙하고 어리지만 조금은 나아졌다고 스스로 칭찬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