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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니엘 Nov 19. 2024

일찍 접하게 된 중년의 위기

그녀의 현재 이야기


미국의 정신분석가 에릭 에릭슨은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경험하는 심리사회적 발달을 8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중 7단계인 중년의 과업은 '생산성'이다. 가족을 부양하고, 일터에서 직업적 성취를 이루며 사회에 기여하는 등 다음 세대의 번영과 사회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욕구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를 바탕으로 자기에게 몰두되어 있던 관심을 기꺼이 타인에게로 옮긴다. 만약 이 시기의 발달 과제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면 침체에 빠져 자신의 인생과 일을 쓸모없거나 무가치하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게 된다. 사는 게 공허하고 허무하다고 느끼기도 하지.





역할의 부재


40대에는 온갖 역할에 둘러인 바쁜 시기로 ""를 잃어버 방황을 한다고 한다. 

나는 오히려 주어진 역할이 없어서 방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게 몰두되어 있던 관심이 슬슬 타인에게로 옮겨지고 있던 때였을 거다.

그 타인이라 함은 새로 생길 가족이었다. 나를 줄이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 나를 넣고 싶었다.

서로를 만난 게 삶의 좋은 선택이었다는 부모님이 살아온 길처럼 나 또한 따라가고자 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예쁜 아이를 낳고 알콩달콩 살아야지!'

'32살에 결혼을 해서 신혼 1년을 보내고 34살엔 아이가 생기면 딱이겠다!'



하지만 인생은 내 맘대로가 아니라는 것처럼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아무리 노력해 봐도 쉽게 보이지 않는 길 안에서 나는 점차 지쳐갔고 체념해 가기 시작하였다. "내게 주어지는 역할이 없다." 아뿔싸, 가정과 육아를 위해 20년을 비워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빌어먹을 상황이 채워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주변 친구들은 가정과 사회에서 쏟아지는 끝없는 책임과 역할에 숨 가쁘게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었다. '야, 너 혼자만 책임지며 사는 삶이 얼마나 자유롭고 편하냐!' 친구들의 위로는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은 듯했다.


역할이 없다는 것은... 여유롭게 삶을 사는 것은... 축복일까??


내게 주어진 역할은 '부모님의 예쁜 딸', 학교의 학생에서 진화한 '회사의 직장원'... 단 2가지의 역할만이 늘지도 줄지도 않은 채 남아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내', '어렵지만 해볼 만한 도전인 며느리', '나 닮은 아이의 엄마', '승진해서 올라가는 직장 상사'... 그것도 안된다면 '종교 단체의 봉사인', '반려 동물의 돌보미'까지 생각해 보며 다른 역할을 더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30대 초중반의 나에겐 머나먼 이야기 같았다. 내가 원하지 않는 역할은 하기 싫었고, 원하던 역할은 갈 수 없는 길이었다. 답답하고 속상했다.




돈을 버는 의미


돈은 왜 벌고 있는 걸까? 돈 쓰는 재미는 뭘까?

난 사치가 없는 편이었고, 물욕도 없었다. 차곡차곡 모이는 돈이 내가 쓰는 돈보다 늘 많았기에 난 돈이 부족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새로운 가정이 생겨서 함께 행복하게 보낼 시간을 위한 돈(결국 내 행복을 위한 돈)이라 생각했는데, 의미를 새로 찾아야 했다. '나나 부모님이 다치거나 아파서 돈을 벌지 못할 때를 대비해서 돈을 모아놔야 해.', '혼자 살 수도 있으니 내 노후는 내가 대비해야지.', '사기당하지 않게 내 돈은 내가 지켜야 해.', '혼자라도 투자 가치가 있는 신축 아파트에 입성해야 하나?' 어떻게든 목표를 만들기 위해 마음을 다잡아 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내겐 투자가 재미가 없었고,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시간을 쓰는 것은 자꾸 뒤로 밀렸다. '어차피 혼자 살다 갈 거면 돈 투자하는 거 재미도 없는데 많은 돈을 벌 필요가 있나? 어차피 혼자라면 병 걸리면 가볍게 가도 되지 않나? 오래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님의 무한한 사랑 앞에서 죄짓는 기분이 들었지만, 임없는 무기력함과 싸워야 하는 시간들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브런치나 유튜브에서 투병, 이별, 가족과의 분쟁 등등 개개인에게 주어진 현실의 고통들로 힘든 와중에 굳건히 살아가시는 많은 분들의 이야기들을 읽고 또 읽었다. 끈질긴 삶의 생명력 투쟁에 감탄하며 맘을 다잡곤 했다. 인간 승리. 모두가 각자의 어려움이 있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리라. 회복 탄력성(좌절을 겪고 이겨내는 힘)이 약했던 나는 끊임없이 무너졌다가 다시 조금 괜찮아졌다가 다시 무너지는 것을 반복했다.



침체.. 무가치.. 공허.. 허무.. 온갖 부정적 감정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외로움과 고독함이 이런 것일까 싶다. '40대에 읽는 니체', '쇼펜하우어의 40대'처럼 얼마나 흔들리는 삶인가 싶은 40대가 이렇다고 하는데, 나는 조금 일찍 도달한 것 같았다. 남들이 결혼과 육아로 20년간 정신없이 지내는 삶을 보내는 동안 나는 그 단계를 다 뛰어넘어 버린 걸까. 은퇴한 60살처럼 살아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순차적 인생 모형. 생애주기란 없는 걸까?


어느 순간부터 '할 게 없어서'라는 말이 입에 붙었다. 아이 키우느라 바쁠 것이라 생각했던 30대 중반, 혼자가 되어버린 공허감에 갈길을 잃었다.


놀이-공부-일-은퇴처럼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연스럽게 진행된다는 '평범함'의 틀에서 낙오된 것만 같았다. 그것이 사회가 우리에게 주입시켜 놓은 평범함이더라도 그 안에 속해있다는 기분은 안정감을 주었을 거다. 나는 그 틀에 맞춰 인생 계획을 짜곤 했고, 그 과정에서 행복을 찾고자 했었다. 고통이 없었냐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나는 내게 주어진 트랙을 있는 힘껏 뛰어가고 성취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삼았다. 그 틀이 깨져버린 상태에선 어떻게 행복을 찾지? 그 답을 찾기 위해 어딘가에 속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듯하다. 그리고 난 그 노력도 내려놓기로 했다.


심리학자의 생애 발달 단계론이든, 경제학자의 순차적 인생 모형이든.. 지금의 나는 그 길이 아니었다.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길이었는데 나는 30대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 길을 벗어난다는 것은 데미안의 알 깨기 마냥 평생을 가져온 삶의 정답을 부수는 작업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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