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현재 이야기
요즘 핫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딸인 나는 드라마를 함께 보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2주간 부모님이 계신 본가에 매일 들렀고, 가족과 함께 드라마를 한편 한편 음미하며 보고 돌아왔다. 16시간(16부작). 어쩌면 하루 이틀을 잡아 정주행 할 수 있었다만, 가족과 함께 했기에 더 긴 시간이 걸렸고, 그만큼 더 좋았다.
보고 나니 으잉?
내 삶이 곧 딸 '금명이'가 아닌가!
부모님의 삶에 1순위였던 나,
늘 압도적인 성적으로 동생을 누르곤 했던 나,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 금명이처럼 툴툴거리며 부모님께 대하곤 했던 나.
'내 딸은 자전거를 타고 넓은 세상으로 나갔으면 좋겠어!'라는 마음에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배우고 가르쳐주던 애순이었던 우리 엄마.
관식이 같은 다정함이 어려운 시대라 엄마에겐 학씨같이 틱틱거렸지만,
내겐 늘 평생을 퍼 써도 끝없이 내어 주던 바다인 관식이었던 딸바보 우리 아빠.
영범이 같은 사랑을 했고, 비슷하게 이별을 하던 나.
드라마 속 충섭이 같은 남자도 없고, 금명이처럼 대 성공을 이루진 않았지만,
사회의 일원으로 그냥저냥 충실하게 살아가는 결론의 나.
아마도 우리네 삶이 드라마와 같아서 이렇게 인기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살아온 삶과 똑 닮았던 금명이를 통해 공감을 했고, 조금은 더 단단해진 기분이었다.
K-장녀이지만 내게는 동생을 잘 돌보고 집안일을 돕는 등의 책임보다는 공부를 잘하는 것에 대한 믿음과 경제적 지원이 더 컸다. 베이비붐 세대 부모님은 공부를 하고 싶어도 지원이 안 되는 힘든 환경에서 학구열을 어렵게 키워 오셨으니, 자연스럽게 공부를 열심히 했던 내게 모든 힘을 밀어주셨다. '내 자식들은 하고 싶은 것은 마음껏 했으면 좋겠어.' 우리의 올바른 성장이 부모님의 삶의 원천이고 돈을 버는 목적이었다.
서울의 비싼 동네에 살거나, 상위 1%의 특별한 교육을 받고 지내거나, 명품 옷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랑 가득한 간식을 배 터질 만큼 주시는 어머니와 가족 여행을 든든히 진두지휘하며 이끄는 아버지.. 공부에 치여 살다가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딸을 위해 시간을 내어 함께 보러 가는 가슴 따뜻한 일상을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히 나는 잘 살고 있으리라 여겼다.
내가 살아왔던 환경은 충분히 이상적이라 생각했기에 나는 결핍이란 게 없을 줄 알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우여곡절 끝에 이제 30대 중후반이 되었다. (브런치를 시작한 지 3년이 되었다...)
우리 나이 대에 응당히 할 줄 알았던 '결혼'이라는 퀘스트가 미뤄지고 나니, 늘 사회의 흐름에 맞춰 살아오던 나는 비로소 '결핍'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말 잘 듣고 선생님들의 예쁨을 받는 모범생이었고, 각종 스펙을 쌓아오며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해보던 대학 시절을 보냈으며, 어렵사리 들어간 회사에서 10년째 일하고 있는 나는 왜 이렇게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되었을까?
내가 자라온 성장 과정에서 잘못된 것은 없었을까?
내가 놓친 부분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정서적, 경제적 독립을 한 것인가?
달려오기만 하던 삶에서 브레이크를 잡게 되었다. 이는 2년간 취업 준비를 하며 골머리를 앓던 유예 기간 정도가 아닌, 정말 인생 전반을 송두리째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시기였다.
잘 살아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잘못 살아왔던 것이었다면?
물고기를 잡는 법이 아닌 그저 사랑 가득 채워주던 결말이 '지금의 나'인 것 같아서 슬플 때가 있었다.
금명이는 결국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고, 사회적 성공을 한 승리자가 되었지만 (드라마니까!) 나는 결혼도 육아도 사회적 성공도 다 놓친 것 같았다. (그럼에도 금명이를 보며 나는 위안을 많이 받았다.)
'결핍이 없는 것이 결핍인가 봐-'
'너무 다 해주려고 해서 내가 이렇게 된 것 같아.'
철없고 배부른 투정일 수 있으나, 홀로 쓸쓸하게 살아가고 있는 내 결말이 안타까워서 많은 생각 속에 책임 전가를 하며 부모님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성격부터 환경까지 모두 내가 문제인 것 같았다.
혹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에 치중하고, 내 목표만 생각한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아니었을까?
타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방법은 어떠하였을까?
내가 결혼을 못한 것은 '자기 잘난 맛으로 세상을 늠름하게 살던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일'은 아니었을까?
부족함이 없으면, 자기중심적으로 자랄 가능성이 있다. 가끔씩 '외동이 이기적인가?'라는 담론이 나오지만 비슷한 맥락으로 보자면 '집안의 중심이 누구로 굴러가느냐?'의 느낌이다.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주변 어른들에게 받고만 자라고, 공부로 인정받는 학벌 위주의 사회가 결합한다면,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오만하고 콧대가 높아지기 쉽다. 특히 한정된 시간 속에 남들보다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사회성과 감정 같은 중요한 부분을 뒤로 미뤄야 하는데, 공부의 시기를 다 지나고 늦게 시작한 만큼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프랑스의 교육은 '권리를 찾아가는 것'으로 많은 협상을 배운다. 우리는 전쟁과 치열한 경쟁을 거쳐 악바리만 남아 '처음부터 권리를 누리고 빼앗기지 않도록' 교육을 받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사람이 처음부터 우쭈쭈 귀하게 자라면 그건 당연한 것으로 알고 받으려고만 한다. 내가 받은 권리만큼 타인도 귀한 권리가 있으며 서로 배려를 해야한다는 것을 학벌/돈 위주의 사회는 철저히 계급화시켜서 무시해버리곤 한다. 그렇게 우리는 자라왔고, 그런 일면들이 지금의 사회를 만드는 일부분일지도 모르겠다.
<끝을 맺으며>
넓은 가슴으로 기꺼이 다른 사람도 품을 줄 아는 어른이 되렴.
저는 그냥저냥 잘 살고 있습니다. 잘못 산 것도 아니고, 삶은 그냥 사는 거더라고요.
결혼을 안 하고 육아를 못하는 삶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이 또한 주어진 삶이더라요.
고군분투하며 끝없이 잘난 듯 올라가던 삶을 멈추고-
가진 것에 감사하고, 나를 사랑하려고 일상을 소중히 보내려고 늘 노력합니다.
30대에 '나'를 얻었습니다.
멋지게 잘 나가고 희망찬 과거의 내가 아닌, 민낯 그대로의 못나고 상처가 있던 나를 알았습니다.
채찍으로 차가운 질책 대신, 끌어안아서 부둥켜 안아주어야 했던 작은 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나'를 알게 되니 '남'이 보입니다. 나를 품는 만큼 타인을 품을 수 있게 되더라고요.
'지금의 내 생각과 행동은 10년 뒤에 나타난다.'라는 말을 생각합니다.
30대에 만들고 있는 성적표를 아마도 40대에 받으며 그때도 또 다른 고민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치열한 입시와 경쟁을 거쳐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 과정을 한 번쯤은 써보고 싶었습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번 드라마 덕분에 마무리를 지었네요. 여러모로 고마운 드라마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부족한 글 솜씨와 정리되지 않은 생각으로 많이 풀어내지 못해 아쉬운 마음도 늘 들곤 했어요 ㅎㅎ 긴 연재 동안 함께 지켜봐주신 분들께 늘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