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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Aug 15. 2021

필라테스 예찬론

필린이 3년차의 운동 정착기

몇 해전 초등학교 1학년 딸아이의 가을운동회. 출발할 땐 분명 5명이었는데, 어느새 혼자 남아 꼴찌로 들어오면서 멋쩍은 듯 웃어 보이는 아이에게 

"괜찮아 끝까지 뛰는 게 중요한 거야, 잘했어 잘했어, 엄마 우리 딸 달려오는 이쁜 독사진 찍으라고 일부러 천천히 뛴 거지?"

농담과 함께 등을 토닥이면서 피식 웃음이 났던 건 어릴 적 나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도 초등학교 때 달리기만 하면 꼴찌를 면하지 못했고, 둔한 운동신경에 겁도 많았던 나는 멀리뛰기, 오래 매달리기, 뜀틀 등등 모든 종목에서 소위 바닥을 깔아주는 존재였다. 그나마 어릴 때 수영을 배운 덕에 폐활량은 좋았는지 오래 달리기에서만큼은 자주 1등을 하곤 했는데, 그래도 체력장 결과는 늘 5급이었으니, 다른 것들이 얼마나 최악이었는지 더 세세하게 기억할 필요도 없겠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체육활동에 큰 좌절을 맛보았던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자연스레 운동과는 먼 삶을 살아왔고, 한 번씩 주위 친구들의 같이 다니자는 유혹에 충동적으로 헬스나 요가 회원권을 끊어놓고 한두 번 만에 흐지부지, 결국 그냥 운동복이라도 찾아가라는 낯 뜨거운 연락을 받은 것만 몇 번이었는지. 그렇게 매번 돈 버리길 수십 번, 그리곤 스물몇 살 이후로는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런 내가 다시 규칙적인 운동을 시작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회사일도 많은데 대학원 욕심까지 내면서 학부모 타이틀까지 얻게 되던, 내 인생 제일 바빴던 그때부터였다. 퇴근 후에 저녁을 대충 차에서 때우며 대학원을 갔다 다시 운전하고 집에 오면 이미 한밤중. 아빠와 함께 자고 있는 아이 학교 가방을 한번 더 점검하고, 대학원 시간 맞추느라 미처 못다 한 업무를 마무리하고 나면 새벽이 되기 일쑤였고, 아침이 오면 한 손에는 눈을 반도 못 뜬 딸아이 손을, 한 손에는 노트북 가방과 딸의 학교 가방, 학원 가방을 주렁주렁 달고 아이를 맡기러 친정에 들렀다가 다시 출근길에 올랐다. 주중에 못다 한 일들은 주말의 몫으로 쌓여가고, 그렇게 주말 밤낮없이 닥치는 대로 보이는 대로 해야 할 일들을 해치우고 나면 다시 월요일, 그런데 어찌어찌 일을 다 마무리하고 나서도 보람보다는 허탈한 마음이 밀려왔다. 일하는 엄마로 살아오면서 늘 무언가에 쫓기는 마음과 누군가에게 미안한 마음 사이에서 지낸 지 오래 긴 했었지만, 일도 육아도 대학원도 다 욕심만 부렸지 무엇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것 같다는 자괴감에 괴로운 마음은 커져갔고, 고용량 비타민과 홍삼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몸은 언제나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내 맘 같지 않던 어느 날, 나는 홀린 듯이 필라테스 회원권을 끊었다. 무너지는 몸이 마음까지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억지로라도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만들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빈틈없이 달라붙는 운동복을 입은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는 것도, 가족도 친구도 아닌 생면부지의 강사 선생님께 그런 눈 둘 곳 없는 모습으로 내 몸을 맡기는 일도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민망함을 가볍게 극복할 만큼 나에게 필라테스는 정말 멋진 운동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일단 학창 시절 나를 부끄럽게 하던 운동 기록들로 전전긍긍할 일 따위는 없었고, 내 몸에 필요한 동작만을 골라 내 몸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되니 둔한 운동신경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마음의 부담을 내려놓고, 그렇게 몇 주 지나고 나니 신기하게도 일할 때 긴장한 듯 어깨를 세우는 버릇 덕에 늘 어깨 위 곰 세 마리가 앉아있는 듯하던 만성 통증도 조금씩 사라졌고, 몸무게 숫자는 그대로인데 친구들도 동료들도 갑자기 살이 빠졌다며 비결을 물어왔다. 힘든데 시원한 느낌, 흐물흐물했던 몸이 조금씩 단단해지는 느낌에 뒤죽박죽 to do list에 묻혀 살던 나의 생활도 생기를 찾아갔다. 그렇게 나는 필라테스를 맹신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3년째 매주 두 번 꼬박꼬박 운동을 가게 되었다. 


태생이 몸치인 나는 여전히 선생님의 주문대로 동작을 하려면, 조금 전까지 머리를 어지럽히던 잡생각을 할 여유 따윈 없이 온 신경을 몸에 집중해야한다. 그래서 여러 고민들로 마음이 복잡할 때도 선생님의 구호에 따라 착실하게 몸을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다 보면 그 시간만큼은 세상만사가 참 단순하게 느껴진다. 나의 목표는 오로지 완벽한 자세일 뿐. 머리는 비우고, 열심히 몸을 쓰면서 땀을 흠뻑 흘리고 나와 상쾌한 공기를 만나는 기분. 그렇게 돌아와 개운하게 샤워하고 났을 때의 느낌. 그것 때문에 평생 꾸준한 운동이라고는 몰랐던 내가 추운 날도 더운 날도 내 안의 게으름을 이겨내고 운동복을 입게 되는 게 아닐까. 오늘도 왜이리 몸이 틀어졌냐며 회사 업무를 몸으로 하고왔냐는 선생님의 구박과 함께 낑낑대다 왔지만, 아무리 바빠도 이 시간을 놓치고 싶지는 않다. 선선해진 달밤에 집에 돌아오면서 몸과 친해지는 이 시간이 무척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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