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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Jan 01. 2021

누군가의 발자국

봄의 시작을 알리는 복수초 : 왕이메오름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인적이 드문 그곳으로 향하는 마음 한편엔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걷는 속도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세상이 변하는 속도. 어찌해서든 따라가야 한다는 이들 앞에 그저 멈춰 서서 멍하니 바라보는 마음이란, 혼란스러움의 연속이었다. 


나만의 속도를 내자, 나만의 길을 가자며 다독여봐도 뒤쳐지고 멀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마음을 달래고자 떠났던 제주도 여행. 그 여행에서 내가 찾은 곳들은 주류가 아닌 비주류, 어찌 되었든 나를 닮은 곳들이었다.




360개가 넘는 제주도의 오름 들 중 처음 들어보는 낯선 이름 왕이메오름. 아직 봄이 구석구석 도달하지 못한 3월, 그곳에서 봄의 시작을 알려준다는 '복수초'를 볼 수 있다는 소식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길을 나섰다. 용눈이, 백약이 같은 유명한 오름이 아니어서 좋았지만 이토록 낯선 곳을 혼자 간다는 건 조금 경솔했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다. 


사유지여서 마땅한 주차장도 없고 입구도 허술한 오름은 찾는 이도 드물었다. 좋지 않았던 날씨, 마실 물조차 챙기지 않은 허술함, 좋지 않았던 컨디션까지 오름을 오르기엔 여러모로 적당하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숲길 앞에서 고민을 하며 서성이다 결심을 하고 숲으로 들어섰다. 해송과 삼나무로 둘러싸여 숲을 이르고 있는 오름은 정상에 산굼부리를 닮은 커다란 원형 분화구가 자리하고 있다. 어렵지 않은 코스지만 길을 잘 조성되어 있는 건 아니어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키가 큰 삼나무 숲에 들어섰을 때 때마침 거친 바람이 불어왔다. 나무와 바람과 나 혼자뿐이었던 그곳에 조용히 서서 바람에 귀를 기울였다. '삐거덕삐거덕' 오래된 나무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의 정체는 삼나무. 유난히 큰 키의 나무가 바람에 휘청이며 내는 소리였다.


자연의 소리가 마땅히 위로가 되어주어야 하는데 두려움이 몰려왔다. 손바닥 뒤집기처럼 요동치는 감정 앞에서 또다시 혼자만의 싸움을 하고 있을 때 반가운 현장을 발견했다. 누군가의 발자국. 나는 지금 홀로 걷지만, 내 앞을 지나갔을 어떤 이들의 발자국이 낯선 여행자의 눈앞에 이정표가 되어주고 있었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듯한 반가움에 포기하지 않고 한 발 더 가보기로 했다.


삼나무 숲을 따라 곧장 걸어가면 분화구 둘레를 걸을 수 있고, 중간에 왼편으로 꺾어지면 분화구 쪽으로 갈 수 있다. 오늘 내가 가려고 했던 곳은 분화구이기에 좁고 가파른 길을 따라 분화구 쪽으로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땅에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돌과 나무뿌리가 가득한 좁은 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 순간 눈앞이 환해졌다. 



아직은 겨울스러움이 가득하지만 어디선가 봄이 싹 틔고 있을 왕이메오름의 분화구. 외로운 싸움의 끝에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분화구는 평평했고, 곳곳에 나무와 수풀이 우거져있었다. 사방이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외딴 별에 홀로 선 기분이었다. 기분에 취해 분화구를 둘러보다 반가운 얼굴을 마주했다. 


초록빛 선명한 잎 사이에 샛노란 얼굴을 드러낸 복수초. 봄을 깨우는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안도의 한숨과 함께, 아무렴 어떤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남들보다 느리고, 남들과 가는 길이 다를지라도 이토록 아름다운 순간을 만날 수 있는걸. 


홀로 나섰지만 누군가의 발자국이 위로가 되어주고 길잡이가 되어준다면 기꺼이 그 길을 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복수초와 변산바람꽃이 봄의 시작을 알려주는 꽃길을 걸었던 날. 차가운 계절을 지나 다시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렇게 새로운 해를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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