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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Jan 14. 2021

어릴 적 좋아했던 그 남자애

한 번쯤 써보고 싶었던 이야기

어릴 적, 좋아하던 남자애가 있었다. 같은 반이었던 그 친구는 공부도 잘했고, 운동도 잘했고,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해서 친구들은 물론 선, 후배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기는 싫고, 그렇다고 고백을 하기엔 용기가 없어서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이로 지냈지만 아마도 내가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을 것 같다.


학교가 끝나면 종종 그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 그리고 내 친구와 넷이 어울려 놀곤 했다. 논두렁을 건너 약수터에 올라가기도 하고, 우리 집에 와서 동생 게임기로 게임을 하기도 하고, 학교 운동장에서 공놀이를 하기도 했다. 4학년이었던 우리는 서로 부끄러움을 탔기에 함께 놀아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작은 시골 초등학교였기에 친구들 대부분은 옆집이거나 동네에 살았고, 아빠 친구 아들, 아빠 엄마 가게 손님의 자녀들인 경우가 많았다. 동네에서 이발소를 하셨던 아빠의 가게는 친구들도 주요 손님이었는데 그 시절 금남의 구역인 이발소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던 건 이발소 딸의 특권이었다. 


종종 좋아하던 그 남자애가 머리를 자르러 오곤 했는데 우연히 아빠 가게에 갔다가 그 친구를 보게 되면 괜히 한 번 더 심부름을 찾아서 했었다. 이발소에서 만나는 게 부끄러웠던 건 그 친구나 나나 마찬가지였지만 어쩐지 반가웠고, 그렇다고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쯤 되고 보니 친하지는 않았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학교에서 말고 종종 만났던 걸 보면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내가 고백을 하지 못했던 건 그 친구가 우리 반 누구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어서였다. 소문이었지만 진실인 것 같아 내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4학년, 5학년, 6학년이 되었고 졸업을 했다. 중학교는 초등학교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었기에 우리 학년 모두가 옆 학교로 진학을 했다. 


두 반이었던 초등학교와 달리 중학교는 한 반으로 합쳐졌고 우리는 또다시 같은 반이 되었다. 생각이 한 뼘 더 자란 우리는 머리가 큰 만큼 몸도 자라 있었다. 그 당시 키가 큰 편에 속했던 나와 달리 그 남자애는 작은 키에 속해 나는 교실의 끝에 앉았고, 그 친구는 앞자리에 앉아야 했다. 그 거리감은 심리적으로도 굉장히 커서 말없이 이어가던 우리의 친구사이도 점점 멀어져만 갔다. 


그렇다고 그 친구를 좋아하던 내 마음이 사라지진 않았다. 언젠가 한 번쯤은 고백을 해야지 싶었지만 한 살을 더 먹으니 용기를 내는 게 두 배로 어려워졌다. 설상가상으로 용기를 내기도 전에 엄마 가게가 시내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나도 덩달아 전학을 가게 되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전학을 가는 나를 위해 '작별'이라는 노래를 불러주던 친구들. 그리고 눈이 마주친 그 남자애는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학교는 전학을 했지만 아빠 가게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기에 그 이후로 우연히 마주치곤 했다. 하지만 둘이 다시 만나거나 반갑게 인사를 한 적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도대체 왜 그랬을까 싶지만 그만큼 그 애를 좋아했다고 이해한다면 어떨까? 다른 남자애가 고백을 해도 나는 그 애만 보였으니 짝사랑이 참 길고도 길었다. 



그 친구와 다시 연락을 하게 된 건, 싸이월드와 동창을 찾는 사이트인 아이 러브스쿨이 한창이었던 이십 대 때였다. 친구의 친구를 통했던가 아이 러브스쿨에서였던 거 어느 날 그 친구가 연락이 왔다. 먼저 연락이 오고, 연락처를 주고받은 뒤 종종 문자를 했다. 좋아했던 감정은 세월과 함께 사라졌지만 어릴 적 추억은 여전히 남아있어 문자 한번 하는 것이 참 떨렸던 것 같다. 


그 남자애는 어릴 적 잘하던 운동을 특기로 살려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군입대를 했고, 전역을 했다. 종종 전화를 주고받았지만 나는 서울에 있었고 그 친구는 지방에 있었기에 한번 만나자는 말을 했지만 쉽게 만남을 가질 수는 없었다. 각자의 시간은 그렇게 또 흘러갔고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어색해하며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전화가 걸려왔다. 절친했던 초등학교 동창의 연락이었는데, 그 전화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한동안 대답을 할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좋아했던 그 남자애가 글쎄 새벽에 운전을 하고 학교에 가던 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전화였다. 동창회에 참석을 하지 않았던 나는 그 친구를 통해 소식을 들었던 것인데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 


물론 장례식장도 갈 수 없었다. 마땅히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하지만 갈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거니와 너무 심한 충격으로 마지막 인사를 할 자신이 없었다. 좋아한다는 그 한마디를 하지 못했던 그 어렸던 마음과 함께 나누었던 우리의 시간들이 떠올라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중이 되고 보니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했던 것이 두고두고 미안해서 종종 그 친구의 이름을 불러보곤 한다. 


좋아한다고 말해볼 걸, 보고 싶다고 말할 걸, 더 이상 할 수 없는 그 말들을 그 순수했던 시간들과 함께 가슴속에 묻어두고 있다. 오늘은 그 남자애가 유난히 생각난다. 그곳에서 행복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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