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thinking cloud Oct 23. 2021
처음에 독립을 하기로 마음먹고 어디서 살지 고민을 시작했을 때 생활권은 아주 쉽게 결정했다. 기준은 시내에서 가까운 곳. 맛집이 많은 곳, 근처에 도서관이 있는 곳, 주차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해당되는 동이 서너 군데 있었지만, 내 예산으로 갈 수 있는 곳은 희망동 원룸촌 밖에 없었다. 동까지도 자연스레 결정 난 셈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하늘이 내 독거의 길을 돕는구나 했다.
희망동 부동산에 와서부터가 문제였다. 내 방 상담을 맡은 분은 키가 아주 큰 중년 여성이었다. 한눈에 이 일을 오래 하신 태가 들어왔다. 나중에 내가 요나 선생님(천주교 세례명이라고 한다)이라고 부르게 된 그분은 내가 원하는 조건을 말하자 뭔가를 출력했다. 무려 A4용지 석 장의 방목록이었다. 촘촘한 주소와 건물주 연락처 때문에 벌써 답답해져 왔다. 설마 저길 다 가보는 건 아니...겠지?
걱정은 기우였다. 요나 선생님은 그 주소와 연락처만 보고 여기는 오래된 건물치고 깨끗하다. 여기는 원룸 치고 방이 넓은 편이다 하는 집에 대한 정보부터 주인이 좋다, 협의를 안 해줘서 별로다 하는 집주인에 대한 정보까지 꿰뚫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다 아세요?라고 물으면 너무 초짜배기처럼 보일까 봐 가만히 있었다.
그 많은 원룸 중에 직접 간 곳은 두 군데였다. 처음 보는 내 눈에는 그게 그 방이었다. 결국 그날은 결정을 못 내리고, 다음날 나는 또 다른 전문가를 데리고 요나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
내가 대동한 전문가는 현역 원룸 독거 중인 친구였다. 친구는 직장문제로 객지에서 독립을 한 베테랑 원룸러였는데, 내가 아예 생각조차 못했던 부분을 짚어주었다.
'큰길에서 가까운가. 좁은 골목길은 여자 혼자 다니기는 불안하다.'
'큰길에는 대부분 버스정류장이 가까이 있다. 버스정류장 외에도 인프라가 어느 정도 있다.'
'주방 분리가 되어있는가. 주방이 분리되지 않은 원룸은 냉장고 소음만으로도 괴롭다.'
원룸을 고르는 포인트를 하나하나 듣고 나니 전날에는 그게 그거 같던 방도 다르게 보이고, 덩달아 친구도 달리 보였다. 경험이 재산이라고 친구의 원룸 고르는 안목을 보고 방구경 시켜주던 요나 선생님이 감탄을 했다. 친구가 참 똑똑하게 집 잘 보네 하는 칭찬에 나는 의문스럽지 않은 대놓고 1패를 당했다. 기분이 나쁠건 없었다. 본인이 덜 똑똑하면 친구라도 똑똑해야 득을 본다.
결국 나는 친구가 논리적으로 추천한 방을 계약했고 결과적으로 아주 잘한 일이었다. 제대로 의견을 내준 그 친구에게는 아직도 고마운 마음이다. 요나 선생님도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영업하는 사람이다. 두 집 까지는 골라 줬지만, 두 집 중에서는 못한 쪽을 택했어도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
부동산 직원은 내가 알고 있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면 불리한 점을 절대 말하지 않는다. 이 방을 봤을 때는 남향이라고 자랑하던 분이 저 방에 들렀을 때는 향에 대해서 입도 벙긋하지 않는다. 방이 넓다는 것은 얘기하면서도 욕실 세면대가 도기가 아닌 플라스틱이라는 것은 언급하지 않는다. 들어갈 사람이 알아봐야 한다. 친구는 부동산 직원이 했던 말과 하지 않은 말을 통해서 그 방의 장단점을 파악할 수 있는 경지까지 올랐던 것이다.
사람도 겪어봐야 알듯 원룸도 살아봐야 안다. 딱 보면 아는 경지까지 가는 데는 경험이 필요하다. 딱 보고 견적 나왔다 생각했어도 막상 살아보면 의외인 면이 하나 둘 있게 마련. 8년쯤 되니 어떤 원룸에 들어가도 변수랄게 없을 방법을 알았다. 기대하는 바가 없으면 변수도 오차도 없다.